Thursday, December 2, 2021

알라딘: [전자책] 척하는 삶 A Gesture Life

알라딘: [전자책] 척하는 삶


[eBook] 척하는 삶 - 개정판 
이창래 (지은이),정영목 (옮긴이)
알에이치코리아(RHK)2014-05-16 
원제 : A Gesture Life

전자책정가 10,360원
 8.7 100자평(16)리뷰(22)

책소개

이창래가 1999년에 발표한 두 번째 장편소설로, 아니스필드-볼프 도서상을 비롯한 미 문단의 4개 주요 문학상을 수상하였다. 한국계 일본인이었으나 세계 2차 대전에 일본군 군의관으로 참전하여 한국인 위안부를 관리하는 임무를 맡았었던 구로하타 지로는 전쟁이 끝난 뒤, 미국 뉴욕 근처의 베들리런으로 이민해 프랭클린 하타라는 이름으로 반평생을 살았다.

이제 70대 노인이 된 그가 들려주는 지나온 삶의 이야기들 - 전쟁, 사랑, 이민, 그리고 현재 그가 가장 사랑하는 (미국 이민 후 입양했던) 한국계 딸 서니와의 이야기가 슬프고도 아름답게 그려진다. 2000년에 출간되었던 <제스처 라이프>의 개정판이다.
책속에서
P. 13 만일 내가 여기서 사는 동안 늘 지나치게 감사하는 태도를 보였다고 한다면, 글쎄, 그렇게 말하랄 수밖에. 어떤 사람이 왜 어떤 방식으로 살아왔는지, 어떻게 해서 이런 행동은 하고 저런 행동은 하지 않게 되었는지, 과거를 기쁜 마음으로 돌아보는지, 아니면 평정한 마음 또는 후회하는 마음으로 돌아보는지, 내 생각에 이런 것들은 다른 ... 더보기
P. 82 나는 그 애를 처음 보았을 때부터 뭔가를 눈치챘다. 그 애는 소지품이 든, 거친 돛천으로 만든 가방을 꼭 움켜쥐고 있었다. 지퍼 한쪽이 그 무늬 없는 더러운 직물에서 뜯겨 나와 너덜거렸다. 내가 살며시 그것을 받아 들려 하자 그 애는 작은 두 팔로 가방을 꼭 감싸 안더니 차 있는 곳까지 그렇게 들고 갔다. 자그마한 아이의 사랑스러우면서도 애처로운 모습. 아이는 입양 기관에서 나온 여자와 함께 내 뒤를 쫓아왔다. 여자는 자신의 기관에서 아시아의 고아들을 위하여 개발하고 있는 다양한 프로그램들에 대해 흥분한 채 떠들고 있었다. 내가 새 딸에게 아는 체를 하고 싶어 그 애의 눈길을 잡기 위하여 돌아볼 때마다, 마치 오랫동안 몰아치는 빗줄기를 뚫고 꾸준히 앞으로 나아가듯, 아이가 단정하게 턱을 끌어당긴 자세로 꾸준히 앞으로 헤치고 나오는 모습이 보였다.  접기
P. 105-106 나는 나를 낳아 준 부모를 따뜻한 마음으로 생각하듯 키워 준 그들을 마찬가지로 생각한다. 그러나 둘 가운데 어느 부모에 대해서도 그들이 나를 길러 주었다는 말은 하지 못하겠다. 나를 길러 준 것은 목적을 가진 사회였지, 그 외에 아무것도, 다른 누구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나는 고마울 따름이었다. 나는 불과 열두 살의 소년이었음에도 늘 사회의 불침번으로서 나 자신을 바쳐야 한다는 것, 내가 알 수 있거나 바랄 수 있는 모든 것을 사회에 의탁하여 해결해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접기
P. 232 농민 차림이었다. 불룩하고 주름진 하얀 바지에 헐렁한 셔츠를 입었다. 땋은 머리가 아니라면 어린 소년들이라고 해도 될 것 같았다. 나이 든 여자와 운전병이 팔을 잡고 여자들을 하나씩 끌어내렸다. 나이 든 여자는 베란다 계단 앞에 여자들을 한 줄로 세웠다. 차려 자세로 서 있는 오노 대위는 그들을 보는 것 같지 않았다. 사령관이 그를 불러, 도착한 사람들(나이 든 여자를 제외하면 모두 다섯 명이었다)을 안으로 들여 검사하라고 명령하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겨우 다섯 명밖에 안 된다는 것이 내게는 특이해 보였다. 우리 부대에는 거의 이백 명에 가까운 병사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때만 해도 나는 앞으로 며칠 낮밤 동안 그 여자들에게 어떤 일이 벌어질지 짐작도 못 하고 있었다.  접기
P. 308 여자아이는 베일을 쓴 채 한동안 꼼짝도 않고 그대로 있었다. 쇼핑몰의 긴 그림자가 드리운, 텅 빈 주차장에 세워 놓은 차 안에서 나는 여자아이의 독특한 행동의 의미를 이해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여자아이가 얼마간 자신을 사라지게 함으로써 남자아이의 모욕을 물리치고, 마침내 남자아이 자신을 물리칠 수 있었다는 것. 자신을 사라지게 하는 것이 스스로 초연해질 수 있는 수단이라는 것. 이런 생각 때문에, 그리고 또 그 천, 서니가 내 옷장의 옻칠한 상자에서 찾아낸 널찍한 천과 아주 비슷한 그 천 때문에, 나는 다시 그 여자를, 끝애를, 내가 그냥 K라고 부르게 된 여자를, 그리고 전쟁의 마지막 몇 달 동안 우리 부대에서 일어났던 사건들을 기억하게 되었다.  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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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및 역자소개
이창래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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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5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세 살 때 가족과 함께 미국으로 이민했으며, 예일 대학교 영문학과를 졸업하고 오리건 대학교에서 문예창작 석사 학위를 받았다. 월스트리트에서 주식 분석가로 1년간 일하다가 작가의 길에 들어섰다. 1995년 『영원한 이방인』으로 화려하게 문단에 데뷔한 그는 1999년 일본군 위안부의 참상에 충격을 받아 집필한 작품 『척하는 삶(A Gesture Life)』으로 다시금 주목을 받았다. 한국계 일본인이었다가 2차 세계대전에 일본군 군의관으로 참전한 후 미국으로 이민한 70대 남성 프랭클린 하타의 삶을 다룬 작... 더보기
수상 : 1996년 펜/헤밍웨이 문학상
최근작 : <영원한 이방인>,<알럽 스페셜박스 : 소설>,<만조의 바다 위에서> … 총 58종 (모두보기)
정영목 (옮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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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학교 영문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을 졸업했다. 전문번역가로 활동하며 현재 이화여대 통역번역대학원 교수로 재직중이다. 지은 책으로 『완전한 번역에서 완전한 언어로』 『소설이 국경을 건너는 방법』이 있고, 옮긴 책으로 『클레이의 다리』 『바르도의 링컨』 『로드』 『말 한 마리가 술집에 들어왔다』 『새버스의 극장』 『미국의 목가』 『에브리맨』 『울분』 『포트노이의 불평』 『바다』 『하느님 이 아이를 도우소서』 『달려라, 토끼』 등이 있다. 『로드』로 제3회 유영번역상을, 『유럽 문화사』로 제53회 한국출판문화상(번역 부문)을 수상... 더보기
최근작 : <소설이 국경을 건너는 방법>,<완전한 번역에서 완전한 언어로>,<21세기 청소년 인문학 1> … 총 293종 (모두보기)
출판사 제공 책소개
선과 악의 모호한 공존, 그 틈새를 파고드는 아름다운 문장들
현 미국 문단을 대표하는 작가 이창래, 그가 들려주는 극복의 서사

노벨 문학상 후보로 거론되는 한국계 미국인 베스트셀러 작가 이창래
그가 1999년에 발표한 두 번째 장편소설
아니스필드-볼프 문학상을 비롯한 미 문단의 4개 주요 문학상 수상작

놀라울 정도로 침착하고도 정확한 그의 문체를 따라가노라면
솜씨 좋은 외과의가 칼날을 쓰는 걸 지켜보는 듯하다.
- 소설가 김연수

참혹한 전쟁 속에서 피어난 아름답고 순결한 사랑
일본군 위안부의 참상에 충격을 받아 집필한 작품

≪척하는 삶≫은 이창래가 1999년에 발표한 두 번째 장편소설로, 이창래는 이 작품으로 아니스필드-볼프 문학상을 비롯한 미 문단의 4개 주요 문학상을 수상하였다. 한국계 일본인이었으나 세계 2차 대전에 일본군 군의관으로 참전하여 한국인 위안부를 관리하는 임무를 맡았었던 구로하타 지로는 전쟁이 끝난 뒤, 미국 뉴욕 근처의 베들리런으로 이민해 프랭클린 하타라는 이름으로 반평생을 살았다. 이제 70대 노인이 된 그가 들려주는 지나온 삶의 이야기들-전쟁, 사랑, 이민, 그리고 현재 그가 가장 사랑하는 한국계 양녀 서니의 이야기가 작가 특유의 유려한 문체로 슬프고도 아름답게 그려진다.

이 작품은 발표 전부터 이미 떠오르는 신예 작가의 특별한 소재, 라는 측면에서 큰 주목을 받았다. 이창래는 한국인 위안부의 참상을 전해 듣고 충격을 받아 소설의 집필을 결심하고, 자료를 수집하며 집필을 시작한다. 이 작품이 전쟁 위안부를 다룬 다른 작품들과 차별성을 갖는다면, 피해자가 아닌 가해자의 입장에서 쓰였다는 점을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 작품을 단순히 ‘위안부’ 문제의 피해자와 가해자에 집중한 소설로 생각해서는 곤란하다. 전쟁 피해자에 주목하면서도, 시대의 모순으로 인해 뿌리를 잃은 한 남자의 눈물겨운 한 생애에 집중한 작품이라고 말해야 할 것이다. 주인공은 한국에서 태어났지만 당시 한국은 식민지 상태였고 어린 나이에 일본으로 입양을 가게 된다. 부모와 떨어져 오래 절망하는 대신, 주인공은 자신에게 주어진 삶을 착실히 살아나간다. 그리고 열심히 노력하여 사회가 원하는 한 구성원이 됨으로써, 어딘가에 바로 뿌리 내리기를 간절히 바란다. 주인공 프랭클린 하타는 평생을 일관되게 이와 같은 마음으로 살아간다. 사회적 성공을 바라는 것이 아닌, 사회의 한 구성원으로 인정받음으로써 외톨이가 되지 않기를 간절히 바랐던 것이다. 이러한 그의 삶의 자세는 그가 베들리런에 정착한 후 보여 주는, 타인들에 대한 친절한 태도, 직업에 대한 책임감 등으로 발현되고, 그렇게 30년 넘게 베들리런에서만 산 의료 기기 대리점 ‘서니 의료 기기’의 주인 프랭클린 하타는 ‘닥(Doctor의 약칭) 하타’로 불리며 타운에서 어른으로서의 존경을 받게 된다.
이야기는 성실하고 매력이 넘치는 부동산업자 리브 크로퍼드가 은퇴한 70대 노인 프랭클린 하타에게 집을 팔라고 권유하는 지점에서부터 시작된다. 하타는 그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 중 하나였던 집을 파는 문제를 앞두고 지나온 삶을 정리하기 시작한다. 그가 베들리런에서 살아온 이야기, 과거 세계 2차 대전에 참전했던 이야기들이 얽히고설키며 그의 삶을 재구성한다. 가출해 버린 양녀 서니, 잠시 사랑에 빠졌었지만 이루어지지 못한 연인 미망인 메리 번스, 그의 좋은 이웃 레니와 리브, 그의 가게를 매입하여 운영하고 있는 히키 부부, 그리고 무엇보다 그가 평생을 잊지 못한 한국인 위안부 여자 끝애의 이야기가 잔잔하면서도 강렬하게 펼쳐진다. 김연수 작가의 말처럼, 이 소설의 도입부는 매우 잔잔할 뿐만 아니라 당혹스러울 만큼 평화롭다. 그러나 이야기가 쌓이면 쌓일수록 독자들은 감당하기 어려운 감정의 홍수를 맛보게 될 것이다. 전쟁 속에서 가해자인 동시에 피해자였던 프랭클린 하타의 성실한 삶을 따라가다 보면 인간과 세계에 대한 작가의 깊은 성찰과, 인간사의 아이러니가 풍부한 감동으로 다가올 것이다. 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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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롭고 아픈 이야기를 찬찬히 그리고 우아하게 다루는 건 재능이 아니라 작가의 자질에 속한다. 그의 문체는 따라 읽으며 자연스레 숙고하게 만드는 힘이 있다. 가즈오 이시구로와 비교되는 것도 이해된다.  구매
AgalmA 2020-09-09 공감 (16) 댓글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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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어로 글을 쓸 수 없는 한국인이 그린 슬픈 한국역사의 초상
피해자이면서도 가해자인 그는 이렇게 숨죽이며 살아왔는데
진짜 가해자들은 지금... 에휴.... 
capsyong 2014-11-25 공감 (3)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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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든 이민자의 마음 풍경을 그려내는 솜씨는 탁월한데 젊은 군의관의 사랑과 우울을 다루는 대목은 허하다. 이 책이 어느 동양인 이민자가 늘그막에 겪는 관계의 소외와 스산한 심정만을 다루었다면 더 짜임새 있는 작품이 되었을 듯싶다. 위안부 이야기는 있으나 마나한 고명 정도에 불과해 보인다.  구매
수다맨 2017-07-14 공감 (2)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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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겐 약간 지루한감이 있었다.
한남자의 정체성에 관한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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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이엉덩이 2016-01-29 공감 (1)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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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적인 소설. 굳이 한국계 미국인이고, 위안부 소설이라고 홍보를 하는 게 나는 이상해 보인다. 이해는 되지만.  구매
웽스북스 2015-05-12 공감 (1)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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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은 당당하기보다 부끄러워할 게 더 많다 - 이창래 『척하는 삶』 새창으로 보기 구매
좋은 소설은 가시권이 매우 넓다. 이 소설은 가족, 민족, 국적, 인종, 세대 갈등, 노년, 위안부, 양심 문제 등 인간 실존에 대해 많은 스펙트럼을 보여준다.

한국인이었으나 일본인 부부에게 입양되었고 천황을 위해 일본군으로 2차 세계 대전에 참전했던 그는 일본을 떠나 미국으로 가 미국인으로 살았고 한국인 소녀를 입양했다. 우리가 어떻게 보든 그는 한국인의 정체성이 전혀 없다. 입양되어 미국에서 자란 서니(내 귀에는 자꾸만 '선희'로 들리던) 또한 그렇다. 애국심이나 한 나라의 국민으로서 가지는 자긍심은 '상상의 공동체주의'다. 생존본능에 가까워 그 땅에서 태어나 살아왔다면 사실상 벗어던지기 어렵다. 타인과 부대끼며 살아가는 사회에서 내 피부 색깔과 성별, 언어로 인해 규정되는 틀은 타국에서 쉽사리 공격 거리가 된다. 숨기고픈 과거는 함묵하며 인정받기 위해 어딘가에 속하기 위해 우리는 평생 '척하기'에 골몰한다. 우리는 정말 당당하게 살고 있을까.

 

 

중산층의 노년에 대한 성찰은 필립 로스 『에브리맨』과 비슷하면서, 로스가 유대인이자 미국인의 삶을 그렸듯이 이창래는 동양인이자 미국인의 삶을 그렸다.

전쟁 중에 군의관 역할을 했고 전쟁이 끝나면 의사가 될 꿈을 꿨지만 그는 미국으로 건너가 프랭클린이 되었다. Doc(doctor 약자) 하타로 불리며 평생 의료기기 판매상을 했고 은퇴했다. 위안부 K와의 일 때문이었으리라 짐작되는데 그는 평생 독신으로 살았고 굳이 여자아이를 입양했다. 두 사람은 원하는 가족이 되지 못했다. 이 소설에 나오는 많은 인물들도 잘 살든 어렵게 살든 자신이 원했던 대로 살고 있는 사람은 없다. 더 비참하게는 열심히 살고자 하고 사랑하려 하는 사람에게 죽음이 불운이 닥친다. 전쟁에서도 살아남았고 부유한 삶을 살고 있는 프랭클린이 지금껏 행복한 삶을 살았다고 말할 수도 없다. 일본인 부모에게 부끄럽지 않은 아들이 되고 싶었던 일본인의 삶을 떠나 미국에 왔어도 프랭클린은 지역에서 인정받는 주민으로 평생 체제에 순응해온 사람이었다. 그의 그런 모습에서 서니는 더 반항적이 된 것인지도 모른다. 프랭클린과 서니의 어긋난 관계도 그들의 남은 생의 결과도 각자의 선택이나 잘못 때문이라고 말하기 어렵다. 삶은 원하든 원하지 않든 많은 것들과 얽히게 되고 궤도가 달라지고 마니까. 삶을 '언제나 지금부터'라고 말하며 새로운 시작을 꿈꾸는 것은 지난 삶의 변명이나 핑계가 아니라 다시 바꿀 용기와 각오를 위해서일 것이다. 프랭클린의 삶과 의지는 오로지 자신만을 위한 노력이 아니었고 앞으로의 선택은 더 그렇지 않을 거라는 방향성은 이 소설을 더 의미 있게 만드는데, 둘러보면 그런 삶을 산 사람들이 얼마나 많았던가. 부자가 되겠다는 욕심과 개인의 영달만 꾀하는 요즘 분위기를 생각하면 이 소설은 매우 올곧아 비현실적으로 느껴지기도 했지만 이 소설이 다루는 문제, 그것을 담은 문장들은 변함없이 현실적이고 현재와 닿아있다.

 

 

ps) 가혹한 피해자였기에 그랬을 테지만 위안부 k, 여성을 너무 신성시 다룬 게 아닌가 싶다.

 

 

 

 

 

 


1. 어떤 사람이 왜 어떤 방식으로 살아왔는지, 어떻게 해서 이런 행동은 하고 저런 행동은 하지 않게 되었는지, 과거를 기쁜 마음으로 돌아보는지, 아니면 평정한 마음 또는 후회하는 마음으로 돌아보는지, 내 생각에 이런 것들은 다른 사람이 제대로 이해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자신의 성공이나 실패를 생각할 때조차 완벽한 진실성을 추구하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인 것 같다. 다 아는 일이지만, 과거란 결국 매우 불안정한 거울이어서 너무 가혹하면서도 동시에 지나치게 비위를 맞추어 주기 십상이며, 따라서 사람들이 믿고 싶어 하는 것과는 달리 절대 진실을 비추어 주지 않기 때문이다.


2. 히키 부인은 좋게 봐 주어서 고맙다고 했다. 나는 뭐라고 토를 달지는 않았지만, 내가 좋게 봐 준 것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사실 전혀 그렇지 않았다. 굳이 말하자면 그것은 이해였다. 극한 상황에 처한 사람은 비뚤어진 태도를 보일 수 있고, 심지어 충격적인 모습을 보일 수도 있다는 것에 대한 이해. 우리는 어떤 사람이 보여 주는 모습 중 무엇이 진정하고 핵심적인 것인지, 또 무엇이 어느 모로 보나 비정상적인 것인지, 그리고 그것이 (우리 입장에서도 쓸데없이 되풀이해 생각하기보다는 빨리 잊어버리는 편이 좋은) 순간적인 실수인지 아닌지를 분별해 내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한다. 나는 나 나름의 경험을 통해 그래야 함을 안다고 말할 수 있다.


3. 은퇴를 하게 될 때 부딪히는 또 하나의 문제는 이제 무엇을 할 것이냐 하는 것이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리브 크로퍼드도 깊이 있는 이야기를 해 줄 수 없다. 설사 그녀가 그녀 표현대로, ‘전방 180도에서 바다를 볼 수 있는, 신경 쓸 것 전혀 없는 최고 수준의 콘도’를 찾아 준다 해도 그녀의 일은 거기서 끝이 난다. 내가 괜찮은 거처를 가지게 된다 해도, 거기서 어떻게 살지, 그리고 거기서 왜 살아야 하는지는 나 혼자 궁리해야 할 문제다. 흔히 말하는 은퇴 후의 라이프스타일이라는 것에는 쉽게 마음이 끌리지 않는다. 예를 들어 나는 낚시를 하지 않고, 브리지도 하지 않는다. 작은 인형이나 이국적인 새나 골동품 장난감을 수집하지도 않는다. (중략) 전문학교에서 강의를 듣고 침대에서 책을 읽는 것 정도는 해 볼 수 있겠지만, 내가 그런 데서 듣고 보게 되는 것들 대부분은 나처럼 늙은 축에 속하는 사람들은 그냥 영원히 잠들어 버리는 것이 속 편한 일이라고 말해 주는 것 같다.

4. 떠난다는 생각을 할 때 내가 가장 크게 우려했던 것은 모두가 이따금씩 느낄 수 있는 어색함이었다. 예를 들어, 매일 다니는 거리나 가게에서, 또는 다른 경우라면 은은하고 푸릇푸릇한 공원 그 이상일 수 없는 곳에서 주변 환경에 대해 생각하지 않고 자기 자신에 대해 생각하는 것. 사람들이 발을 멈추고 저 사람은 누구일까 하고 생각하는 것(대부분이 다른 사람의 눈에 띄지 않게 그리한다)에 대해 의식하고, 그것이 어떤 의미일까 궁리하는 것. 내 생각이든 남의 생각이든 나는 정말이지 이런 식의 생각을 좋아한 적이 없으며, 그래서 내가 이 타운에서 나 자신을 위해 꾸준하게 조성해 온 그런 상황 속에 들어가 있기를 늘 원해 왔다.

5. 우리는 그 말에 마음껏 웃음을 터뜨린다. 기침이 자꾸 나왔지만, 레니 바네르지 같은 사람과 이야기를 나눈다는 것은 기분 좋은 일이다. 이상적인 환경은 아니다. 그러나 이제는 인생의 순간들이라는 것이 꼭 적확해야 할 필요는 없다는 느낌, 그렇게 ‘가치’가 충만하고 묵직해야 할 필요는 없다는 느낌이 든다. 그냥 그 순간, 있는 그대로이면 된다. 이 경우에는 나와 레니가 다시 한 번 농담을 하고 서로의 생각을 이야기하며 가벼운 시간을 보내는 순간일 뿐이다.

6. 사람의 유년기가 놀랄 만큼 취약한 시절이라는 것에 대하여 공적인 논의와 토론이 많다. 시기와 상황이 사람의 성격과 관점, 심지어 행동에까지 중대한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것이다. 제멋대로인 아이가 공동체의 생산적인 구성원으로 발전해 나가도록 도와야 하며, 이것을 무시하면, 기본적으로 훌륭한 본성을 가진 아이라도 어른이 되었을 때 사회적 상호 작용에서 곤란을 겪을 수 있고, 심지어 병적이 되고 범죄를 저지를 수도 있다는 것이 근래의 통념이다. 그런데 처음부터 아버지 없이, 낙인찍힌 가족으로 살아야 했던 베로니카는 어떻게 이렇게 나름 훌륭하게 성장한 것일까? 아이의 어머니 코모 경관은 어떻게 했길래 딸의 마음에서 타고난 기품과 선을 끌어낼 수 있었던 것일까? 아니면 베로니카든 다른 사람들이든 실제로는 신의 뜻에 따라, 또는 약간의 우연에 따라 한 가지 기질, 딱 한 가지 기질만 지니고 있을 뿐이고, 겉보기에 변종으로 보이는 것들은 각각의 윤곽, 일상적인 장식물에 불과한 것일까?

7. 은퇴하고 나서 몇 년 동안 이곳의 집단 기억이 내가 믿고 싶어 하는 것보다 짧다는 것, (중략) 나는 선량한 닥 하타에서 괜찮은 노인네에서 저 늙은 동양인이 누구냐로 바뀌었다. 그 질문(지난 여름 처치 스트리트의 새 식당에서 점심 값을 치르다 그런 소리를 들었다)에는 심각한 악의나 편견은 담겨 있지 않다. (중략) 이런 식으로 처량하게 자신의 자리가 줄어드는 것은 나이 든 사람들이라면 모두 겪는 일, 심지어 한창 때는 적당한 위치를 확보했던 사람들조차 겪는 일이 틀림없다. 그러나 내 경우는 시간으로 인해 흐릿해지는 것과도 다르고 현대 생활에서 늙어 가면서 일반적으로 예상할 수 있는 일과도 다르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한다. 내가 어떤 사람이냐 하는 것은 둘째 치고, 내가 어떤 인종에 속한 사람이냐 하는 것이 지속적이고 변함없는 사실로 남기 때문이다. 내 얼굴이라는 단순한 항상성. 따라서 나와 같은 사람은 사소한 손실들은 받아들이면서, 삶에서 생기는 위안들에 행복해해야 하는 것일까?

8. 서니 의료 기기도 지금처럼 속이 반쯤 빈 채 문을 닫는 대신, 활기로 인해 눈부신 곳이 될 수도 있었을 것이라는 환상적인 상상이 펼쳐지니 감당할 수 없을 정도다. 너무 복에 겨운 상상이라 그런지도 모르겠다. 그렇다고 무슨 명예나 부의 측면에서 복을 누리는 상상은 아니다. 그저 매일 밤 가게를 나오면서 슬쩍 돌아보았을 때, 그곳이 우리를 담아 줄 만한 그릇이구나 하고 느끼는 것에 대한 상상이다. 어쩌면 그것이야말로 내가 평생 동안 얻으려고 노력했던 것이 아닐까? 어렸을 때 일본인 부부의 손을 잡고 정규 학교에 입학했을 때부터 영광스러운 전쟁으로 일컬어지던 전쟁에 군인으로 참전하기까지, 그리고 이 나라에, 그것도 매우 품위 있는 타운에 정착하기까지. 그것이 내 오랜 어리석음, 나의 연이어 온 실패는 아닐까?

9. …… 내 집으로 돌아와 그 애의 아들과 함께 보낸 편하고 즐거운 시간들의 여파 속에서 내 집이 훨씬 더 거대하게 자라 버렸음을, 그리고 그 안에서 내가 훨씬 더 작아졌음을 느끼지 않아도 되었을 테니까. 그와 더불어 내 인생이 갑자기 다시 잠정적인 것이 되었음을 느끼지 않아도 되었을 테니까. 실제로 나는 마치 젊은이처럼 내 인생이 가능성과 선택을 향해 열려 있다는 느낌, 그만큼 취약한 상태가 되고 말았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것은 늘 내가 진실로 두려워하던 존재 상태였다. 사람들의 취약한 상태는 오랫동안 나를 끈질기게 괴롭혔다. 물론 나는 전쟁 중에 임무를 수행하면서 죽음과 연약함을 목격할 때마다 경악했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가 아니었다. 전쟁을 맞아 무딜 대로 무디어진 남자들의 의지는 어떤 종속적 상태를 피해 가지 못했다. 들을 귀와 볼 눈만 있으면 무력하게 빠져들고 마는 그 비인간적인 행위들.

10. 우리는 좀 더 전방으로 이동할 날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랑군 여행은 짧은 마지막 위로 휴가였다. 빛이 사그라지지 않는 해변의 어스름 속에서 묘하게도 전쟁이 그렇게 끔찍한 것만은 아니라고 생각했던 기억이 났다. 자신에 대해 확신을 가지지 못한 젊은 남자라 해도 공동의 목적을 앞에 두고 함께 일하는 동료들과의 동료 의식 속에서 어떤 의미를 찾을 수도 있는 것이라고. 사실 이보다 더 진정한 증명의 시간은 바랄 수 없는 것이라고. 그러나 오노 대위가 나를 부를 때마다 모든 것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세심하게 쌓아 올린 모든 인식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그런 안쓰러운 고갈 상태에서는 순수한 증오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것이 솟구쳐 오르며 모든 것을 태워 버리는 느낌이었다. 그러나 나는 그것을 그대로 표현한 적이 없다. 그때 오노 대위에게도 마찬가지였다.

11. 그는 위안부를 생경하게 ‘조센삐’라고 불렀다. 여자가 한국인이라는 사실에다가 천한 해부학적 욕설을 덧붙인 말이었다. 물론 나는 그가 동료들에게 허세를 부리려고 그런다는 것을 잘 알았다. (중략) 마치 우리 안에 있는 짐승 이야기를 하듯. 때문에 나는 잠시 몸이 얼어붙었다. 물론 나는 그 여자들을 짐승으로 생각한 적이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들이 그때 내 시야 속에서 어떤 위치를 차지했다고 말할 수도 없겠다. 내 생각은 부자의 생각과 비슷했을 것이다. 자기 집이나 소유지에서 일하는 수많은 하인들을, 그들의 노력과 몸부림을 거의 인식하지 못하는 부자. 그들을 그의 삶이라는 메커니즘의 부품으로만, 매일 밤낮없이 꾸준히 돌아가는 기계로만 보는 부자.

(중략) 나 역시 생각이 조금만 달랐더라면 아마 여자들을 그런 식으로 대했을 것이다. 부드러운 살덩어리들로. 사라지기 전에 얼른 가져야 할 짧고 따뜻한 쾌락으로. 그것이 전시의 기본적인 방식이다.


12. "자, 그 아이를 위하여 뭘 할까?"

내가 생각하고 의도하는 바는 먼 미래다. 그 아이의 교육, 훈련, 직업. 내가 사라진 뒤에도 남아 있을 것들.

그러나 서니는 대답하지 않는다. 나는 이 애가 얼마나 자제하고 있는지 깨닫는다. 이유가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흔히 하는 말로 ‘신앙심을 갖게’ 된 것 같다. 이 아이 내부에서 용서의 비밀 창고 같은 것을 발견한 것 같다. 내 창고는 이미 오래전에 바닥이 났는데. 어쩌면 용서는 고갈되지 않는다는 것, 현재 어떻게 되었다 해도, 아무리 찌꺼기만 남고 빈약하다 해도, 원하기만 하면 기적이 일어난 것처럼 가없이 늘 새로워진다는 것이 진실에 더 가까운지도 모른다.

서니가 마침내 입을 연다.

"지금 생각하면 우스워요. 만일 첫 아이를 낳았다면, 아마 토머스는 낳지 못했을 거예요. 토머스고 누구고 아무런 존재도 없었겠죠. 상상만 해도 끔찍해요."

"그래, 물론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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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galmA 2020-09-09 공감(17) 댓글(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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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읽다.

마음이 휑해지는 느낌은 어쩔 수가 없다.

덥지도 춥지도 않은 어느 계절의 잔잔한 수영장의 표면같은 베들리런.

한차례 전염병이 휩쓸고 간 듯한 끈적하고 불쾌한 공기가 가득 채워진 밀림 속의 웅덩이 표면같은 인도네시아의 병영.

이렇게 상이한 느낌의 두 공간이 예고도 없이 불쑥 교차되는 시점을 지날 때는 알것 같기도, 전혀 이해할 수 없을 것 같기도 한 기분이 들고 만다.

두 공간은 물리적으로도 시간적으로도 크나큰 간극이 있으나,

얇아서 뒷장이 훤히 비치는 매끈한 종이 한장을 사이에 둔 것처럼 가깝게 느껴졌다.

삶의 표면을 스르륵 미끄러지듯 살아온 프랭클린 하타를 어떻게 읽어야 할지 중반까지도 갈팡질팡했다.

완벽한 일등 시민으로 살아가는 이민자의 모습인가,

전쟁의 한 가운데 반인륜적인 범죄를 눈 질끈 감고 외면한 목격자인가,

역사의 광풍 속에 이리저리 휩쓸린 나약한 인간인가.

처음부터 끝까지 이타적이지 못했던 나약한 놈. 겨우 죽음에 이르는 경험 끝에 삶을 되돌아 보는 마치 크리스마스캐롤같은 캐릭터에 진절머리가 났다가,

그 어쩔 수 없음, 무기력함, 그럼에도 완벽하게 악한 적은 단 한번도 없었던 가엾은 피조물이라는 생각에 안타까웠다.

그러다가 결국 하타를 어떤 종류의 인간이라는 카테고리 안에 넣으려는 시도 자체가 무슨 의미가 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한마디로 말한다면 나는 분명 프랭클린 하타, 구로하타 지로의 인생을 백분 이해한다.

그런 이해를 바탕으로 둔다고 해도 어쩔 수 없이 ‘너는 끝까지 망쳐진 적이 없다.’ 라는 생각을 떨쳐낼 순 없었다.


문장 하나에도 배수구에 빨려들어가는 물처럼 감정이 소용돌이 쳤다. 잔잔하고 격렬한 글이다.


2017. oc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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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llas 2017-10-05 공감(11) 댓글(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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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거리

마을 사람들은 구로하타를 ‘닥 하타’라고 부른다. 닥 하타의 ‘닥’은 닥터, 즉 의사라는 뜻이다. 구로하타는 의사가 아니라 의료기기 판매상인데도 말이다. 그는 일본에서 온 동양인 이민자였다. 이 마을에 정착해서 수십 년 동안 의료기기 가게를 운영해왔고, 이제는 가게를 팔고 은퇴한 몸이다. 그가 하는 일이라고는 노구를 이끌고 천천히 산책을 한다든가 고급 주택가에 자리잡은 자신의 저택 수영장에서 고적하게 수영을 즐기는 게 전부다. 그럼에도 그를 아는 사람들은 여전히 그를 ‘닥’이라 부르며 환대한다.

이 즈음 하타는 리브 크로퍼드의 집요한 연락에 시달렸다. 리브는 부동산 중개인이었다. 그녀는 하타의 집을 매매하고 싶어 했다. 고전적인 양식으로 지어지고 오랜 세월 정성껏 관리된 그의 집은 금전적 가치가 높았다. 리브의 매매 제안은 타당했고, 오래된 단독주택을 관리하기에 하타는 너무 노쇠했다. 하지만 하타는 집을 팔 생각이 없었다. 그에게 있어 이 집은 곧 그의 삶이나 다름없기 때문이었다.

그는 평생 독신이었고 넓은 저택에 혼자 살지만 가족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아니, 가족이었던 누군가가 있었다. 서니라는 이름의 딸이었다. 사회복지기관을 통해 입양해 온 한국인 여자아이였다. 그러나 그녀는 하타를 떠나 독립한 지 오래였다. 서니는 커 가면서 새아빠인 하타와의 충돌이 잦아졌고 둘의 사이는 서먹해졌다. 서니는 결국 떠났고 연락도 주고받지 않는다. 그래서 벽난로에 피워 놓은 불이 카펫에 옮겨 붙었을 때 그를 구해내고 구조대에 전화를 걸어준 사람은 서니가 아니라 리브 크로퍼드였다.

유독한 연기를 들이마신 탓에 하타는 며칠간 병원에 입원한다. 히키 부부의 아이가 중환자실에 누워 있는 병원과 같은 곳이었다. 몇 해 전 은퇴할 때 하타는 의료기기 가게를 히키 부부에게 팔았다. 그가 가게를 처분한 뒤 지역 경제가 나빠지고 근처에 의료기기 체인점이 들어섰다. 히키 부부의 가게는 운영난에 시달렸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부부의 아이가 심장질환을 앓았다. 끈질기게 청구되는 병원비와 불어나는 보험료를 감당가기도 벅찬 상황이었다. 히키 씨는 하타를 원망했다. 가게가 예전처럼 잘 돌아가지 않을 거란 걸 숨기고 자기에게 가게를 넘겼다는 의심하는 듯했다. 그러나 히키 부인은 하타를 원망하지 않았고 늘 따뜻하게 대해주었다. 하타는 퇴원하기 전날 밤 아이의 병실에 몰래 찾아간다. 병색이 완연한 아이의 모습을 보면서 그는 전쟁 때의 기억을 떠올렸다.

하타가 전쟁에 나갔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는 전쟁 얘기를 꺼내지도 않았을 뿐더러 전쟁을 떠올리는 힌트조차 내비치지 않았다. 그가 사실은 한국인이고 일본인 부부에게 양자로 들어갔단 걸 비밀로 했듯이. 그러나 그는 늘 그때를 기억했다.

그의 부대는 버마 전선의 최전방으로 투입됐다. 그는 소위였다. 진료소에서 근무하며 군의관 오노 대위의 일을 보조했다. 전황은 좋지 않았다. 영국군이 곧 공습할 거란 불안이 퍼지고 있었다. 불안과 두려움이 절정으로 치달을 때 여자들, 그러니까 ‘지원자’들이 보급됐다. 여자들이 오는 날 부대는 들떠 있었다. 엄격하고 냉정한 오노 대위도 그랬던 모양이었다. 군의관은 여자들 가운데 한 명을 빼돌렸고, 하타에게 여자를 가두고 감시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위안부들은 하루에도 수십 명의 굶주린 남자들을 받아내느라 만신창이가 되어갔다. 그러나 K라는 이름의 그 여자만은 진료소 뒤편의 창고에 숨겨져 하타의 보살핌을 받았다. 하타는 그녀를 사랑하게 된다.

그러나 운명은 마치 파도처럼 그들을 덮쳐왔다. 오노 대위에게 K를 내줘야 할 때가 다가온 것이었다. K는 하타에게 자신을 죽여 달라고 부탁한다. 하타는 그럴 수 없었다. 그는 K에게 전쟁이 끝나면 어디로든 함께 떠나자고 말한다. 그러나 K는 단호히 거부한다. K의 입장에서 하타와 다른 군인들은 별 차이가 없었다. 하타는 K를 사랑한다고 믿고 있었지만, 사실은 K의 몸을 원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위안소를 들락거리는 다른 병사들과 마찬가지로 말이다. 하타의 사랑 고백은 K의 운명 앞에서는 공수표에 불과했다. 결국 하타는 K를 구할 수 없었다.

퇴원하던 날 그는 우연히 딸 서니의 소식을 들었다. 서니는 도시의 빈민가에서 그녀의 아이와 함께 살고 있었다. 하타는 딸을 찾아가보기로 결심한다. 세월이 많이 지났기 때문에 둘의 감정은 많이 누그러져 있었다. 하타는 서니와 조심스럽게 왕래하기 시작한다. 서니가 직장에 나가야 했기 때문에 서니의 아들 토마스를 종종 돌봐주었다. 하타는 토마스의 존재에 기쁨을 느끼고 서니와의 관계가 좋아질 거란 희망에 부푼다.

어느 날 하타는 토마스와 야외 수영장으로 놀러갔다가 사고를 당한다. 토마스가 수심이 깊은 곳에 빠진 것이다. 하타의 친구 레니가 급히 물속에 뛰어 들지만 갑작스럽게 심장마비가 와서 물에 가라앉는다. 레니가 잘못됐다는 걸 알아챈 사람은 하타뿐이었다. 그러나 하타는 토마스를 먼저 건져낸다. 토마스를 안전 요원에게 맡기고 나서야 하타는 레니를 구한다. 토마스는 금세 먹은 물을 토해내고 일어나지만 레니는 상태가 좋지 않았다. 다행히 구급대가 일찍 도착해 준 덕분에 레니는 죽지 않았다. 레니는 하타를 생명의 은인으로 여긴다.

마침내 하타는 집을 팔기로 결심한다. 집을 팔고 히키 부부의 가게를 다시 매입해서 딸에게 물려줄 것이다. 그리고 하타 자신은 먼 여행을 하기로 결심한다. 아무런 계획도 세우지 않고 떠나는 멀고 긴 여행. 그리고 여행을 끝내고 이곳, 고향으로 돌아오리라고 말이다.





감상

요즘 개그맨 안일권의 유튜브 영상을 즐겨 본다. 영상 속에서 그는 자신이 연예계 싸움 1위이자 건달이며 동시에 무도가라고 주장한다. 그러면서 건달의 말투와 행동 따위를 흉내낸다. 결국 그는 진짜 실력자를 만나 ‘참교육’ 당한다. 그러곤 다음번 영상에서 거만하게 팔을 흔들면서 카메라가 꺼진 뒤에 제대로 상대방을 손봐주었다고 떠벌린다. 그의 개그 포인트는 건달인 척하는 데에 있다기보단, 건달인 척하는 사람인 척하는 것에 있다고 생각한다. ‘척하는 인간’은 눈꼴 시리지만 ‘척하는 인간인 척하는 사람’은 코믹하다는 게 얄궂었다. 안일권 씨의 영상을 보면서 나는 ‘척’이라는 것에 흥미가 생겼고, 이내 알라딘 중고서점에서 ‘문학적인 척’하려고 샀다가 책장에 처박아 둔 이창래의 『척하는 삶』을 떠올렸다.

그러나 주인공 구로하타는 척하는 인간도 아니고 척하는 사람인 척하는 인간도 아니었다. 그는 조곤조곤 자신의 삶을 고백한다. 그의 고백들은 진심이었고 한 치의 거짓도 없었다. 그런데 왜 나는 마지막 장을 덮고 나서도 찝찝한 것일까. 그는 자신이 척하는 줄도 모르고 척하는 사람이었다. 나는 비난할 수도 웃어넘길 수도 없었고, 다만 그가 가련할 뿐이었다.

하타는 K에 대한 자신의 사랑을 굳게 믿는다. K를 부드럽게 응시하는 하타의 눈길은 그러므로 결백하다. 그러나 사랑하는 척하는 스스로에게 속아 있었다면, 그게 속임수였음을 마침내 깨달아버렸다면, 그는 유죄인가 무죄인가. 위안부를 물건처럼 마구 겁탈하는 저열한 짐승과 K를 정중히 대하는 자신이 방식만 다를 뿐 사실은 같은 마음이란 걸 알게 된다면, 그는 강간죄인가 사기죄인가. 나는 모르겠다. 왜냐하면 나 역시도 스스로에게 속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으므로.

그래서 소설의 결말은 참 얄궂다. 하타는 히키씨가 파산해 은행에 압류된 가게를 사들이기로 한다. 아마 그 가격은 자신이 가게를 팔았을 때보다 훨씬 저렴했을 것이다. 개이득이다. 그러나 그의 계획은 장삿속으로 세운 게 아니었다. 딸 서니와 손자 토마스를 위한 것이었으니까. 어쩌면 그는 또다시 자기 자신에게 속는 줄도 모르고 속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아무리 길고 먼 여행을 한다고 해서 그의 삶이 과연 달라질 수 있을까. 그는 여전히 ‘척하는 삶’을 살 것이고, 여행에서 돌아온 그의 정든 마을과 서니는 여전히 그를 ‘환대’하거나 ‘냉대’할 것이다. 그는 고향이 아닌 이민지에서 ‘영원한 이방인’으로 머물 것이다. 정말 그뿐일까?

그러나 이야기에는 완전히 다른 측면도 존재한다.

하타가 어린 서니를 공항에서 처음 만나던 날, 그의 마음은 의심의 여지없이 행복과 기대로 부풀었다. 그러나 후에 서니는, 자기가 당신의 마음에 전혀 들지 않는 것 같았다고 그날을 회상한다. 하타는 서니가 낯선 환경에 겁을 먹었다고 짐작했지만 서니가 겁먹은 상대는 다름 아닌 하타였다.

그러므로 하타는 어쩌면 정말로 K를 사랑한 것인지도 몰랐다. 정말로 순수한 마음으로 파산한 히키의 가게를 재인수한 것인지도 모른다. 다만 상황이 그에게 누명을 씌웠던 것인지도 모른다. 진실은 무엇일까. 진실을 가려낼 수 있는 건 자기 자신도, 그를 마주하고 있는 상대방도 아닌 것 같다. 진실은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과 상대방의 관계에서 연기처럼 피어오르는 것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므로 애인에게 “나 이러려고 만나는 거야?”하고 따지지는 말자. 혹시나 묻게 되거든, 모텔 카운터 앞에서 단호히 “아니”라고 잡아떼는 남자를 단죄하자. 능청스럽게 “사랑하는 사람끼리 이러는 게 어때서?”라고 반문하는 남자로부터 돌아서자. 그러나 어쩔 줄 몰라 하며 허망하게 서 있는 남자에게는 손을 내밀어주자. 그는 당신을 사랑하거나, 혹은 가련하게도 사랑한다고 믿고 있기 때문이다. 어쩌면 그 믿음은 사랑보다 더 단단했는지도 모른다. 당신이 사기라고 귀띔해주기 전까지는 말이다.








어떤 사람이 왜 어떤 방식으로 살아왔는지, 어떻게 해서 이런 행동은 하고 저런 행동은 하지 않게 되었는지, 과거를 기쁜 마음으로 돌아보는지, 아니면 평정한 마음 또는 후회하는 마음으로 돌아보는지, 내 생각에 이런 것들은 다른 사람이 제대로 이해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자신의 성공이나 실패를 생각할 때조차 완벽한 진실성을 추구하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인 것 같다. 다 아는 일이지만, 과거란 결국 매우 불안정한 거울이어서 너무 가혹하면서도 동시에 지나치게 비위를 맞추어 주기 십상이며, 따라서 사람들이 믿고 싶어 하는 것과는 달리 절대 진실을 비추어 주지 않기 때문이다. -p.13

"난 상어한테는 뼈가 없는 줄 알았는데."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린다. 레니 바네르지가 문으로 들어오고 있다. 부드러운 초콜릿빛 얼굴에 익살맞은 표정이 걸려 있다.
"하하."
리브는 그렇게만 대꾸할 뿐이다. 기습을 당한 데다, 그가 나타난 것이 미묘하지만 분명하게 즐거움을 주었기 때문이다. 레니가 나타난 것은 갑작스럽지만, 동시에 충분히 예상할 수 있었던 일이다. -p.174

후지모리는 어두운 감수성을 지녔는데, 나로서는 그것을 이해하는 것이 늘 쉬운 일은 아니었다. (중략) 그러나 그의 성격 때문에 그와 함께 있다 보면 늘 어떤 일의 가장 괴상한 측면을 생각하게 되었다. (중략) 예를 들어 이렇게 히키 부인에게 그녀의 죽어 가는 아들과 시간을 보내는 일을 피하는 것에 대해 양해를 구한 뒤에는, 그가 나를 어떤 눈으로 볼지 생각해 보아야 한다. 내가 시드는 꽃다발을 들고 상쾌한 기분으로 이 널찍한 주차장을 가로지를 때 그는 나를 어떻게 묘사할까? 내가 결혼한 적이 없다고 말하면 그는 뭐라고 할까? 내가 양녀로 들인 아이가 나와 함께 편하게 살기보다 달아나는 쪽을 택했다고 하면 그는 뭐라고 할까? 네가 가장 귀중하게 여기는 집에서 벽난로에 불을 때면서 왜 그렇게 부주의했느냐, 혹시 스스로 불을 질러 모든 것을 파괴하고 싶었던 것은 아니냐고 악마처럼 묻지 않을까? -p.183

"당신 도움은 필요 없어요!"
그녀는 소리를 질렀다.
"한 번도 필요했던 적이 없어요. 내 말 못 알아듣는 거예요? 그냥 내버려 둘 수 없는 거예요? 당신은 나를 사랑한다고 하지만 당신이 정말로 뭘 원했는지 아직도 모르고 있어요. 아직 젊고 점잖으니까요. 하지만 이제 말해 주죠. 그건 내 섹스예요. 내 섹스라는 물건이에요. 나한테서 그것만 떼어 내서 털가죽이나 좋아하는 돌처럼 지니고 다닐 수 있다면 그것으로 끝일 거예요. 당신은 점잖은 사람이에요. 하지만 사실은 당신도 다른 사람들과 조금도 다를 것이 없어요. 당신한테 내 몸을 준 것이 안타까워요. 나 때문이 아니라 당신 때문에 안타까워요. 순간적인 희망이었겠죠. 그것 때문에 나는 죽을 때까지 아쉬울 거예요. 하지만 나를 사랑한다면, 진정으로 나를 사랑한다면, 나와 함께 있는 걸 견딜 수 없을 거예요. 이런 나를 볼 수 없을 거예요. 내가 살아 있다는 생각조차 한순간도 더 견딜 수 없을 거예요." -p. 415

"...저는 그것이 늘 궁금했어요. 저는 늘 제가 오기를 바라지 않으셨다고, 사실 저를 보내 달라고 하신 적도 없었던 걸 거라고 생각했어요."
"나는 그런 생각을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는데. 단 한 순간도."
"생각하셨다 해도 상관없어요."
서니는 평온하고 상냥한 태도로 덧붙인다.
"우리는 지금 여기 있잖아요, 안 그래요? 지금까지 무슨 일이 있어났든 간에." -pp.463~4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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