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라질 이민사의 환국
중앙일보
입력 1972.08.1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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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 있는 한국의 「브라질」 이민사』라 할 수 있는 교포 장승호옹(65)이 47년만에 그리던 고국의 땅을 다시 밟았다.
장옹은 「브라질」이민 초창기에 이역 만리 「상우파울루」로 건너가 오로지 성실과 근면으로 일하면서 같이 이민을 간 교포들이 새 생활의 터전을 잡도록 뒷바라지 해주는 등 공로가 많아 광복절에 초청되어 11일 일시 귀국했다.
장옹이 한국을 떠난 것은 16살 되던 1925년.
충북 영동군 양강면 죽촌리가 고향인 그는 처음 일본으로 건너가 심부름꾼으로 전전하며 고학을 하다가 3년만에 일본인 목사 「니시즈미·마사요시」씨(작고)의 권유로 그를 따라 「브라질」로 갔다.
1천여 일본 이민단 틈에 끼어 「브라질」 「산토스」항에 첫발을 디딘 그는 농장의 날품팔이, 「상우파울루」 농협 고용원 등으로 젊은날을 성실한 농부로 보냈다. 그의 진실한 성품은 목사인 「니시즈미」씨의 감화에 영향을 받기도 했다. 돈을 모으기도 했으나 한 일본인의 사기에 송두리째 빼앗겨 빈털터리가 됐다. 그런데도 그는 의욕을 잃지 않으며 일했고 고아가 된 「미다」란 어느 일본인 농부의 딸을 동정해서 결혼했다.
일본 이름(삼전승호)과 국적을 딴것도 결혼후부터였다.
차차 생활의 기틀이 잡혀가자 장옹의 집은 교포 이민들의 첫 기착지가 됐다. 이민 30년만에 그의 집에 발을 처음 들여 논 우리 동포는 반공포로였다.
1956년2월 인도를 거쳐 반공포로 55명이 「브라질」에 왔을 때 장옹은 떡을 해 가지고 「리오데자네이로」까지 가서 맞았다. 이중 김창언씨(39·기사)를 둘째 사위로 삼고 나머지는 장옹의 도움으로 지금은 사업가·목사·대학 교수 등 각계에서 지위를 잡고 있다.
63년 이민법 제정과 함께 한국 이민이 시작되자 그의 나날은 더욱 바빠졌다. 그의 집은 이민 교포들의 무료 숙박소가 되어 마당에 산더미처럼 이삿짐이 쌓여졌으며 자신은 교포들의 각종 사업의 보증인이 됐다. 교포의 대부분이 전세 등기를 할때 그의 보증을 받았는데 그 때문에 그는 집문서를 잃기까지 했다. 47년만에 그리던 고국에 온 그는 공항에 내리자마자 어린애처럼 엉엉 울었다. 그리고 고국의 변한 모습에 놀랐다. 네 개의 가방 속에 교포들이 가족·친지에게 보내는 편지 3백여통을 들고 와 고국에 온 날부터 편지 전하기에 바빴다. 장옹은 오는 15일 경복궁 파티에서 박정희 대통령을 만나면 선물하겠다고 보석과 같은 「브라질」돌(「브라질」명산품)을 들고 왔다. 그는 『이민 온 한국 사람이 돈을 많이 가지고 와 호화로운 아파트에 사는 사람이 많다』고 말하며 이민의 태도를 나무라기도 했다.
성실한 기독교 신자인 그는 국적이 일본이라서 자비 부담으로 왔으나 71년 8월 23일자 중앙일보 『세계의 한국인』을 통해 생존을 확인한 친형 일호씨(76) 만호씨(70)를 찾아본 다음 전국 고아원·교회·양로원의 실태를 돌아보고 9월 중순쯤 출국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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