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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3월 2일 일요일

호주 백호주의의 등장과 발전 양명득 2012

호주와 한국 문화연구원 Center For Australia & Korea Culture : 호주 다문화사회와 재호 한인동포

호주와 한국 문화연구원 Center For Australia & Korea Culture

2012년
8월 30일 목요일

호주 다문화사회와 재호 한인동포







호주 백호주의의 등장과 발전


호주와 뉴질랜드는 영국이라는 국가 밖에서 가장 영국적인 나라로 알려져 있다. 호주는 지리학적으로 아시아와 남태평양에 위치하고 있고 가장 근접한 이웃이 인도네시아로 다인종, 다문화, 다 종교 국가이다. 그럼에도 호주가 현재 이렇게 영국계 국가로 성장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

이것은 출생지와 관계되는 것으로 캐나다나 미국보다도 더 아이랜드계와 스코트랜드계 인종들이 호주 주류사회의 구성원을 이루고 있고, 그들 대부분이 기독교인들이고, 인구의 4분의 3이 영어만 사용하고 있다. 호주를 영국적인 문화와 국가로 성장시키기 위한 계획적이고 정교한 정책이 제도적으로 진행되어 왔는데 그 중 하나가 바로 백호주의 정책이었다. 이것은 백호주의가 철폐된 현재까지 진행되고 있는 국가정책 골간으로 이민정책을 통해 다른 인종의 호주 유입을 철저히 통제하고 있다.

졉(Jupp)은 그의 책 From White Australia to Woomera(백호주에서 우메라까지)에서 지난 150년동안 진행된 호주이민정책은 세개의 기둥에 근거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영국의 헤게모니와 백인통치의 유지; 호주의 경제와 군사적 강화를 위한 선택적인 이민; 이 과정을 국가가 철저히 통제 (Jupp, 2002: 6)


이 세가지 정책이 현재 나라 안팍에서 많은 도전을 받고 있지만 두번째와 세번째는 여전히 현대 호주국가의 중요한 정책이 되고 있다.

이런 실제를 역사적으로 가장 극명하게 나타낸 정책이 바로 백호주의 정책이다. 1901년 호주가 영국에서 독립되어 연방정부를 구성한 해에 공포된 ‘이민 제한법’ (Immigration Restriction Act)으로 공식화된 백호주의 (Australian White Policy)는 이미 1850년대 중국인의 골드 러쉬 이후 ‘황색공포 (yellow peril)’의 확산으로부터 그 정서가 형성되고 있었고, 향후 거의 백년동안 호주의 사회와 정치에 막대한 영향을 미쳐온 정책이다. 인종차별을 기본으로하는 이 법은 호주의 백인인종 순수성 보전, 아시아의 갚 싼 노동력에서 호주 노동인구 보호, 그리고 아시아의 침략 가능성에 대한 호주국가 방어 등이 그 골자이고, 이 정책을 통해 내적으로는 호주 백인 민족국가의 일치와 애국심을 증진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이 정책은 영어구술시험 등의 제도적 장치를 철저하게 진행하여 유색인종을 배제하고 영국백인들 중심의 국가로 기틀을 잡는데 큰 공헌을 하게 된다.

그러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인구증가인가 아니면 멸망인가 (populate or perish)’라는 슬로건으로 집약되는 인구번성의 절박한 필요성과 사회의 하부구조를 발전시키기 위한 노동력의 수요, 그리고 특히 인종차별에 대한 아시아국가들의 반발과 원성으로 인하여 이민제한정책은 1950년대와 60년대에 단계적으로 무너지면서 비 유럽계 이민자들을 수용하기 시작하였다.

마침내 새로 들어선 노동당 정부가 1973년 전격적으로 다문화주의를 공포하므로 백호주의 정책은 공식적으로 폐기된다. 당시 그레스비(Grassby) 이민성 장관이 아시아를 방문하며 새 이민법을 적극 홍보하는데 “백호주의는 죽었다. 나에게 삽을 달라. 그것을 묻어 보이겠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기기도 하였다.

이후 시간이 지남에 따라 이민정책이 여러 굴곡을 거치면서 백호주의는 이제 호주정부의 공식적 플랫폼에서 사라졌다. 그럼에도 호주를 영국계 국가로 지키려는 백호주의 정신은 여전히 많은 호주인들 마음속에 사라지지 않은 이데올로기로 다른 형태의 모습으로 계속 드러내어 왔고, 심지어 너무 조숙하게 백호주의 정책을 포기하였다는 원성이 표출되기 시작하였다.

1984년 호주 역사학자 블레이니(Blainey) 교수의 아시아인 이민과 다문화정책에 대한 공개 비판으로 시작된 논쟁이 1997년 등장한 핸슨 (Henson)의 완 네이션 당 (One Nation Party)으로 그 절정을 이루었다. 핸슨 국회의원은 호주가 아시아인으로 넘쳐나고 있다며 다시 이민제한정책으로 돌아 갈 것을 호소함으로 호주사회에 적지 않은 지지와 영향을 이끌어 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당시 뉴스폴(Newspoll) 여론조사에 따르면 호주인들 70% 이상이 다문화주의를 지지한다고 응답하고 있다. 2001년 템퍼 사건으로 알려진 난민선박을 돌려보낸 사건과 그에 따른 하워드(Howard) 수상의 발언 “이 나라에 누가 그리고 어떤 상황에 들어 올지는 우리가 결정한다”는 인종차별을 다시 정당화하는 분위기였다. 또한 2004년 시드니 레드펀 지역에서 발생한 원주민 폭동사건과, 2005년 시드니의 크로눌라 해변가에서 일어난 인종폭동은 호주사회에서 거의 보지 못하였던 적극적인 집단 인종폭력 사건으로 증가하는 중동계와 아시아인 이민자들로 불안해 하는 호주사회의 한 단면이었다.

그리고 이것은 현재진행형으로 지금도 난민과 중동계 혹은 아시아계 이민자들은 호주정치의 뜨거운 감자로 항상 논쟁의 주제이며, 여당과 야당할것 없이 보수적인 이민정책의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터번(Tavan)은 그의 책 The Long, Slow Death of White Australia(백호주의 길고 느린 죽음)에서 비 유럽계 이민자들에 대한 영국계 백인들의 근본적인 태도변화가 없을뿐 아니라 오히려 그들에 대한 원망이나 적개심이 커지고 있다고 주장한다. 백 여년동안 지속되어 온 백호주의 정신과 가치를 그들이 쉽게 버릴 수 없을뿐 아니라, 그것이 여전히 긍정적으로나 부정적으로 호주사회에 영향을 미치고 있으며, 그리고 호주백인들은 그 정책 철폐에 대한 역사적인 중요함을 아직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Tavan, 2005: 4).

『인종차별의 간추린 역사』에서 프레드릭슨(Fredricson)은 현대 세계역사에서 가장 악명 높은 공개적인 인종차별 정권 셋을 다루고 있다. 독일의 나찌정권, 남미국의 노예정책, 그리고 남아프리카의 인종분리정책이 그것이다. 그러나 호주의 백호주의 정책은 간발의 차이로 빠져 있는데 이 책의 서문을 쓴 매네(Manne)는 호주 백호주의 정책도 공개적인 인종차별 정책이 가지고 있는 대부분의 요소를 포함하고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 (Fredricson, 2002, XII-XIII). 이런 역사적인 배경을 가진 호주를 현재 다문화 사회라고 칭하는데 그것이 얼마나 사실적이며 또 그 의미가 무었인지 다음에서 다루도록 한다.

호주 다문화 정책과 실제


현대 호주인들의 고민 중에 하나가 정체성에 관한 질문이다. 호주인은 누구인가? 호주인이라는 의미는 무었인가? 그리고 이런 담론들은 더 나아가 호주문화는 무었인가? 그 문화는 어떤 가치를 담고 있는가? 라는 더 깊은 염려들을 유발하고 있다. 그리고 언제부터인가 ‘다양성 (diversity)’이란 단어가 그 대답의 하나로 등장하고 있다.

호주인들 중에는 세계 200여개의 나라에서 온 다양한 종족들, 전체 인구의 50페선트정도가 해외에서 태어 났거나 부모중 한명이 해외에서 태어난 사람들이다. 그리고 이들 대부분이 스스로를 호주인이라 부르며 호주 땅에서 새로운 삶을 창조해 나가고 있다. 호주 해안선을 따라 발전된 주요 도시들을 보면 말 그대로 다문화 다종족 도시의 모습을 띄고 있으며, 어떤 지역은 이곳이 호주인지 월남의 한 거리인지 혹은 레바논의 한 지역인지 모를 정도로 게토화되었는 곳도 적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문화주의(multiculturalism)’라는 단어는 호주에서 죽어 가고 있는 단어 아니면 적어도 호주정치인들이 기피하고 있는 단어가 되었고, 그 대신 다양성이란 단어가 현대 호주의 정체성을 설명하는데 자주 사용되고 있는 이유는 무었인가? 그만큼 다문화주의는 그동안 호주역사에서 정치적으로 사용되어 많은 논쟁과 분열을 야기한 개념으로 일반 호주인들에게 부정적인 인식을 가져 왔다는 사실이다.

먼저 다문화주의가 무었인가?라는 질문이다. 호주정부가 1973년 백호주의를 폐기하면서 당시 국민들의 여론이나 공감을 얻는 절차 없이 정치권 밀실에서 다문화정책을 기안하여 일방적으로 공포하였다는데 기인한다. 다문화주의가 장차 호주사회에 어떤 영향을 가져 오는것인지, 다문화 사회에서는 다른 인종과 종교와 어떤 관계를 가져야 하는 것인지, 무었을 포기하고 무었을 수용해야 하는지 등에 관한 충분한 이해나 교육없이 호주정부는 다문화정책을 국가정책으로 홍보를 시작한 것이다.

호주 주류문화에 이민자들의 문화가 완전히 흡수되기를 기대하는 동화정책(assimilation policy)이나 이민자들의 문화를 유지하면서 주류사회와 새로운 문화를 이루는 통합정책(integration policy)과는 어떻게 구분이 되는지, 그 실제는 무었인지 대한 논쟁은 계속되었다. 1977년 ‘다문화 사회로서의 호주 (Australia as a multicultural society)’라는 문건이 정부에서 나옴으로 학교 교육과 언어 정책에 대한 실제가 좀 더 구체적으로 제안되었지만, 1978년 당시 호주수상에게 제출된 갈발리(Galbally) 보고서가 비로소 다문화주의의 근본을 제시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이 보고서는 다문화 정책의 원칙을 말하고 있는데 현재까지 각 단체에서 인용하고 있는 내용이다.


1) 우리사회의 모든 구성원은 그들의 가능성을 온전히 성취하기 위한 평등한 기회를 가지며, 사회의 프로그램이나 복지에 평등한 권리를 갖는다.
2) 모든 개인은 편견이나 불이익 없이 개인의 문화를 유지할 수 있으며, 반면에 다른 사람들의 문화도 이해하고 수용할 수 있도록 권장한다.
3) 이민자들의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한 프로그램이나 복지가 전체 사회에서 제공되어야 하고, 그리고 현재 그들의 특별한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해 평등한 기회와 돌봄이 있어야 한다.
4) 복지와 프로그램은 이민자들과 충분한 협의를 거쳐 계획되고 운영되어야 하며, 그리고 스스로 도울수 있는 제도를 제공하여 그들이 이 사회에서 스스로 일어설 수 있도록 해야 한다(Jupp, 2002, 87).


1980년 초 호주정부 이민성장관의 지시로 연구하여 보고된 다문화정책에 대한 제안서도 그 중요한 내용을 담고 있다. 이 보고서는 다문화주의는 호주의 여러 인종들의 관계를 위한 가장 적절한 모델이고 정부의 소수민족정책을 위한 최선의 근거라고 제안하면서 다문화주의를 다음과 같은 두가지 의미로 사용하고 있다.


첫째는 다양한 문화 그룹들의 관계와 제도적인 기구들을 설명하는데 이것은 자원, 특권 그리고 참여에 관한 모든 결정권의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고, 둘째는 사회와 국가의 이상을 위해 인종들간의 자유로운 왕래와 공동의 과제를 나누는것이다(Zubrzycki, 1982, 2)


이 보고서는 다문화 사회에 기회의 평등성을 가지고 여러 인종들간의 자유로운 경쟁이 중요하다고 하면서, 한 두 인종이 독점하는 것을 극복할때 다문화주의의 참 성과를 가져올 수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당시 이민심사점수제와 사업이민프로그램이 도입되면서 전례에 볼 수 없었던 많은 비 영국계 이민자들이 호주에 정착하였으며, 이런 분위기에서 1984년 아시아계 이주자 증가와 다문화주의 비판이 고개를 들기 시작하였고, 이후 계속하여 다문화와 이민정책에 대한 개편이 정부차원에서 있게된다. 1989년 호주정부는 다문화주의를 국가정책으로 발표하고, 1999년 또 다시 다문화주의를 새 국가정책으로 발표한다. 그 다음해는 그 실천을 위한 다문화 호주위원회가 정부 안에 설치되어 이후 다문화주의에 대한 전략적 방향을 제시하게 된다.

당시 다문화 정책의 네가지 원칙을 제시되었는데 첫째는 모든 국민들의 책임을 강조하였다. 호주국가의 근본인 자유와 평등을 지키기 위해서는 국민 개개인이 시민의무를 다할 때 가능하다. 둘째는 각 사람을 존경해야 하는데 자기 문화가 소중한 것처럼 다른 사람등의 것도 존중해야 한다. 세째는 각 사람이 갖는 평등권으로 인종, 문화, 종교, 언어, 성, 출생국가 등에 의해 차별받지 않는 권한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경제의 생산성 공유로 모든 국민들이 문화의 다양성과 경제의 생산성에서 오는 이윤을 수혜한다는 것이다 (Multicultural Australia: United in Diversity, Strategic Direction, 1994).

1996년에는 인종관계에 대한 정책선언이 연방의회에서 의결되었고 이것은 다섯가지의 원칙을 천명하고 있다.


1. 모든 호주인은 인종과 피부색, 신념과 출신지역과 관계없이 동등하게 존중되고 대우받으며 동등한 권리를 누릴 수 있으며,
2, 인종과 피부색, 신념과 출신지역에 근거하여 전혀 차별받지 않는 이민정책을 지속하고,
3, 사회와 경제적으로 심각한 어려움에 처한 원주민과 토레스해협 섬주민들과 치유와 화해의 과정을 계속하며,
4, 우리의 국가, 민주제도, 그리고 가치에 대한 모두의 헌신을 통해 단합하여 호주를 문화적으로 다양하고 관용적이고 개방적인 사회로 지속시키며,
5, 우리 모두가 원하는 사회와 결코 양립할 수 없는 어떤 형태의 인종적 폭력과도 단절한다 (Federal Government, ‘Statement on Racial Tolerance’, 1996).


그러나 이러한 다문화주의의 이상이 계속하여 호주의 주류사회의 일각으로부터 도전을 받고 있다. 딕슨(Dixson)은 다문화 사회에서 특히 호주 백인들의 역할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이들이 사회의 결속과 일치를 가져올 수 있는 중추적 기능을 다할 때 비로소 분열의 두려움, 시민정체성의 상실, 정서적 깊이의 메마름, 그리고 공동체에 대한 무관심을 극복할 수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혼란스러운 다문화 사회에서 앵글로 켈트계의 주류인들이 정체성과 가치를 굳건히 할 것을 호소하고 있는 것이다 (Dixson, 1999: 6-8).

이런 불안은 호주 다문화주의에 대한 비판으로 이어져 우파와 좌파 모두에게 나타난다. 좌파들의 비난은 다문화주의가 여러가지 희망과 약속을 제공해 왔지만 실제 결과는 미미하고 교육적 성과가 저조할 뿐 아니라, 인종차별과 백인 우월주의를 은폐시키고 있다는 비판이다. 반면 우파들의 염려는 여러 인종들의 문화를 불필요하게 강조하므로 오히려 인종간의 경계선과 민족심을 더 강화하여, 사회결속을 저해하고 국가를 분열시키고 있다는 지적이다. 또한 정부 안에서도 수상이 바뀔때 마다 다문화정책을 시행하는 부서가 바뀌거나 통폐합되는 과정을 거치면서 일관성있는 정책이 시행되지 못하고 예산만 낭비되고 있다는 비평이다. 1996년 하워드 수상이 집권하면서 수상실의 다문화부서를 폐지하였고, 이민프로그램과 난민수용인원을 대폭 축소하였는데, 사실 그 이후 다문화주의에 관한 공식적인 담론이 현격하게 위축되어 온 것이 사실이다.

한편 시간이 지남에 따라 호주정부가 더 관심을 가지고 실행하고 있는것이 시민권받기 운동이다. 2001년부터 시민권의 날(Citizenship Day)을 정하여 새로 시민권을 획득한 사람들을 축하해주며 모두가 그 의미를 되새기는 기회를 갖게하였다. 또한 정부는 2007년 이민과 다문화부를 이민과 시민권부로 바꾸므로 그 정책의 우선권을 표명하였다. 많은 이민자들이 호주의 영주권을 취득하여 호주에 살면서도 본국의 시민권을 유지하며 민족의 정체성을 지키고 있다. 호주정부 입장에서 보면 시민권 취득과 영어 사용이야말로 국가개념을 확고히 하고 국가 구성원들을 하나로 묶어 애국심을 갖게 할 뿐 아니라 법에 대한 권리와 의무를 준수하게 하는 중요한 전략적 정책이다. 이것은 강압적으로 되는 것이 물론 아니고 다문화주의가 확고할 때 시민이 되고 싶고, 또 시민권을 가질 때 다문화 사회에 책임있게 참여 할 수 있기에 상호보완적인 소위 ‘다문화 시민권’ 개념이다.

단적으로 이 현상이 가장 극명하게 드러나는 예가 바로 4년마다 열리는 월드컵 축구대회이다. 평상시에는 호주인으로 살다가 이때가 되면 본인이 출생한 나라의 국민으로 돌아가 본인의 민족팀을 열심히 응원하는데 시드니에서도 이탈리아인들이 많이 사는 라히카드 지역이나 멜본의 그리스인 지역 등에서는 그들의 국가가 울려퍼지며 큰 축제가 있다.

호주에서 태어난 필자의 고등학교 아들들도 평소에는 한국인인지 호주인인지 알지 못하는 이중적이고 복합적인 생활을 하다가 월드컵 축구대회 기간이나 올림픽 때는 분명한 한국인으로 돌아가 애국자가 된다. 2010년에도 한국, 북한 그리고 호주 순으로 관심을 갖고 응원하는 모습을 볼 때 호주의 시민권을 가진다고 해도 호주정부가 원하는 국민으로서의 일치감을 끌어 내기가 쉽지 않다는 사실을 목격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호주정부는 최근 세계적인 안보위기로 인하여 시민권 시험제도를 다시 도입하였다. 호주인이 되기 위해서는 최소한의 호주 역사와 가치문화를 알아야 한다는 의도이지만 일각에서는 백호주의 시대의 영어시험처럼 특정한 민족을 배제하기 위한 의도가 아니냐는 지적을 받기도 하였다. 한편으로는 시민권받기를 권장하면서 또 한편으로는 제한해야 하는 현실이 세계의 다문화 국가들이 가지고 있는 공통적인 고민이라 하겠다.

커야샤리안(Kerkyasharian) 뉴싸울스주 다문화협의회 회장은 “Multiculturalism in Australia - Today and Tomorrow” (호주의 다문화주의-오늘과 내일)란 소책자를 통해 호주의 다문화정책이 성공적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 내용을 보면 호주의 평등주의 정신이 이민자들이 호주 땅을 밟는 순간부터 법적으로 평등한 자격을 갖게 하였고, 사회의 하모니를 이루려는 다문화정책을 정부나 야당이 적극적으로 추진해 왔고, 정부에서 실제적으로 다문화 부서를 두어 예산편성, 지도자훈련, 정책발전, 학술대회 등을 지원해 왔고, 그리고 세계적으로 진행되고 있는 글로벌화의 일환으로 정보통신이 발달되므로 이제는 이웃에 대한 개념이 달라지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Kerkyasharian, 1998: 5-6).

또한 그는 호주의 다문화정책이 성공하고 있는 이유를 몇 가지로 지적하고 있는데 그 내용을 보면 첫째, 다문화정책은 호주사회의 일치성과 단결을 가져왔는데 그것이 걸프전쟁과 이라크전쟁 시 호주에서 시험되었지만 큰 전쟁의 여파가 없었고, 둘째, 호주사회에는 미국이나 영국에서 보는 것 처럼 과격한 인종분규가 없다는 사실이며, 셋째, 다문화주의로 인하여 국제적으로 경제수익과 자원이 증가되고 있으며, 마지막으로는 호주내에서의 일상생활이 다양한 문화, 예술, 음식등으로 더 흥미로우며 풍요로워지고 있다고 하였다(Kerkyasharian, 1998: 6-7).

그러나 호주의 저명한 사회학자 메케이(Mackay)는 Turning Point: Australians Choosing Their Future라는 책에 호주 다문화정책이 가지고 있는 여러가지 문제점을 지적하고 있다.
1) 현대판 부족주의: 현 시대에 살면서도 우리는 여전히 부족주의를 버리지 못하는데 다른 부족에 대한 무관심이나 혹은 적대감은 인종차별을 조장하고 있다. 같이 이웃이 되어 살 수는 있지만 그들이 절대로 우리 부족은 될 수 없다는 우월의식이 존재하여, 나의 부족 보호와 누리고 있는 특권을 유지하려는 경향이 다문화관계를 유명무실하게 하고 있다.
2) 원주민들과의 관계: 영국인들이 오기 전 이 땅에 살고 있던 250여개의 부족들이 호주의 다문화주의에 포함되기를 거부하고 있다. 그들의 투쟁은 훨씬 근본적인 이유를 가지고 있으며, 그들과 화해되지 못하는 한 온전한 다문화 사회를 이룰수 없다는 딜레마이다.
3) 다문화주의, 그 단어 자체: 이 단어가 정치적 이데올로기로 너무 이용되어 호주인들 뇌리 속에 거부감이 존재하고 있다. 자연적으로 발전된 단어가 아니라 정책적으로 사용되어진 단어이기에 여러가지 부정적인 역사적 짐이 남아있다.
4) 호주시골생활의 동경심: 다문화 사회는 결국 대도시 중심으로 발전하고 있는데 사막이나 산간지역의 시골과는 상관없는 것처럼 보인다. 특히 도시생활에 만족하지 못하는 호주인들이 시골생활을 미화하며 그런 ‘진짜 호주생활’을 동경하며 돌아갈 것을 꿈꾸고 있다는 현실이다.
5) 혼합된 정체성: 호주에서 태어난 2세나 후세들이 살 수 있는 문화나 환경이 아직 조성되지 못하고 있다. 이들은 부모세대와는 또 다른 지대에서 호주사회의 구성원이 되고 있지만 이들의 정체성으로부터 시작하여 여러 생활의 이슈들이 충분히 성찰되지 않고 있다 (Mackay, 1999: 36-48).


호주에서 이민자들을 가르켜 흔히 ‘에쓰닉 (ethnic)’이라고 칭하여 호주정부 부처에도 에쓰닉 담당 커미션(Ethnic Affairs Commission)이 이민자 관련 부서였다. 그러나 에쓰닉이란 단어가 호주 사회에서 주로 부정적이고 분열적인 이미지를 동반하여 정작 이민자 자신들은 스스로가 에쓰닉으로 불리기를 원치 않는다. 그들도 호주 백인들처럼 ‘호주인’으로 불리기를 원하는 것이다. 그러던차에 뉴싸우스웨일즈 (NSW)주 정부는 2000년 Ethnic Affairs Commitssion을 Community Relations Commission (커뮤니티 관계 커미션)으로 정부부처 이름을 개명하며 “이것은 우리 뉴싸울스웨일즈 주 이민자공동체의 승리이다. 그들은 더 이상 ‘에쓰닉’이 아니라 자랑스런 호주인이다”라고 당시 수상이 공포하고 있다 (Premier of NSW News Release, 2000: 1).

그러나 재미있는 것은 최근 호주사회에 ‘호주인답지 않은 (unAustralian)’ 이란 단어가 등장되어 종종 사용되고 있다. 호주 주류사회의 가치나 문화를 따르지 않으면 호주 시민권자라고 해도 호주인으로 생각할 수 없다는 의미이다. ‘만약 너희가 우리와 같지 않으면 우리를 적대하는 사람들이다’ 라는 주류사회의 무언의 압력이 담겨 있다. 현재 이런 분위기의 가장 큰 희생자들은 물론 호주인들이 두려워하는 회교도인들이지만 타 소수민족들도 그 대상에서 제외되지 않는것이 사실이다.

호주의 다문화주의는 이렇게 한편으로는 법적 제도적으로 호주사회에 확고히 자리를 잡아 회귀할 수 없는 사회가치가 되고 있지만, 또 한편으로는 그 복합성과 분열성이 호주인들 마음속에 여전히 두려움을 주고 있다.

호주 다문화 사회와 한인동포


호주의 다문화 정책과 이민정책의 부침에 따라 호주에 사는 한인동포들도 그 명암이 바뀌어 왔다. 아시아인 이민에 우호적인 정권이 들어서면 늘어나는 한인 이민자들로 인하여 한인사회도 경제적 활기를 찾았고, 이민정책이 보수적인 정권이 들어서면 현상을 유지하며 새 날을 기다려야 했다. 이러한 굴곡을 거치면서도 지난 50여년간 호주의 한인사회는 숫적으로나 질적으로 괄목할 만한 성장을 해 온 것이 사실이다.

호주의 사회학자 코간(Coughlan)은 그의 글 ‘Korean Immigration in Australia(호주의 한국인 이민)’에 다문화 호주사회 속에서 한인이민자에 대한 평가를 다음과 같이 하고 있다. “전체적으로 젊고, 교육수준은 높고, 실업률은 비교적 낮은 한인들의 특성은 호주사회의 경제 발전과 사회 발전을 위해 가치있는 공헌을 하고 있고, 또 이들은 전반적인 호주 복지제도에 부담이 적은 공동체이다” (Coughlan, 1997: 194).
다음은 호주이민과 다문화정책에 따라 발전한 한인이민사를 간략하게 요약한 것이다.


1) 초기 한인 방문자들 (1920-1950)


호주를 방문했던 최초 한인유학생에 관한 기록은 1921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호주선교사가 세운 마산의 창신학교의 선생이었던 김호열은 호주장로교의 후원으로 호주에 입국하는데 백호주의 정부로부터 비자를 받아 멜본대학에서 학교행정에 관한 공부를 하게 된다. 그는 멜본에 있는동안 후두암이 진행되어 치료를 받지만 의사의 권고대로 1925년 한국으로 돌아간 직후 사망했다.

1926년 호주선교사 에이미 스키너가 호주에 휴가차 올때 그의 한국어 선생이자 친구인 양한나와 동행한다. 호주에 머무는 동안 그는 유치원 운영에 관해 공부하고 나중에 부산으로 돌아가 고아원을 운영했다.

1934년에는 심문태 목사가 호주에서 기독교교육을 공부하고 미국으로 건너가 계속 공부한 후 1937년 한국으로 돌아가 사역했다. 1935년에는 세브란스 병원의 이춘철 의사가 연구차 호주에 왔었다. 1937년에는 빅토리아 장로교 총회 연사로 이약신 목사가 초청되었다. 그는 빅토리아주에 몇 달 머물면서 여러교회에서 설교와 강연을 하였고 한국으로 돌아가 진해와 마산에 있는 교회들을 섬겼다. 1937~1939년에는 손옥순과 이영복 간호사들이 멜본에 와 공부를 했는데 나중에 손옥순은 한국정부의 건강과 복지부에서 이영복은 이화여대에서 각각 공헌을 하게된다.

이렇게 대부분 교회기관을 통해 호주로 온 초기 방문자들 대부분이 한국으로 돌아갔는데, 이 당시는 호주 이민제한정책이 왕성하던 시기라 아시아인들에게 거의 시민권을 주지 않았을 때였다. 또한 골드러시때부터 살고 있었던 중국인이나 일본인의 숫자 조차도 크게 감소한 때라 본인이 원한다 해도 호주에 영주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이즈음 언급되야 할 한인 ‘집단 방문자’들이 있다. 세계2차대전 중 일본에 의해 강제로 징용된 한국 청년중 일본군인들과 함께 포로가 되어 호주에 잡혀 온 162명의 전쟁포로들이다. 이들은 시드니 서북부 카우라수용소에서 포로생활을 하다 전쟁 후 1946년 시드니를 거쳐 한국으로 송환된다.

한국전쟁을 전후해서도 계속하여 호주로 온 한국인들이 있었는데 호주 적십자나 YWCA를 통해, 그리고 특히 호주장로교가 부산에 세운 일신병원의 관계자들이 훈련의 목적으로 호주에 왔고 그 중에 호주에 영주하게 되는 경우가 비로서 나중에 생기기 시작하였다.


2) 초기 한인 이민자들 (1950-1970)


1950년대에 와서 이민 차별법에 대한 변화의 필요성이 호주 정부안에 대두되게 된다. 특히 비 유럽계인들에게 시민권과 영주권을 주지 않는데서 야기되는 외교적이고 상업적인 어려움은 호주 정부의 큰 짐으로 계속되고 있었다.

호주정부가 매년 발행하는 백서를 보면 1957년에 한국인 한명이 호주 시민된 것을 기록하고 있다. 최근에서야 그 이름과 배경이 알려 졌는데 그는 곽묘임이라는 여인으로 한국전쟁에 참여했던 호주군인 리챠드 가렛(Richard Garett)을 일본에서 만나 호주로 입국한다. 그녀는 시드니에서 곧 결혼하고 빅토리아 주 푼카펀얄에서 외로운 호주에서의 삶을 시작하였고, 현재 시드니에 거주하고 있다. 이 여인의 시민권 수여 연도를 기준으로 후에 ‘호주한인50년사’가 출판된다.

1960년 초에는 호주를 방문하여 호주인과 결혼하므로 영주권을 받아 호주에서 일하는 경우가 생긴다. 이런 경우 방문자의 신분에서 영주권을 받는 과정까지 여러 복잡한 어려움이 있지만 호주사회에 정착하게 되는 초창기의 사례이다.
또한 공식문건의 확인이 어려운 1968년 이전을 제외하고 1969년 이후로 지금까지 호주에 입양된 한인 숫자가 3천명 정도 되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들도 당연히 이곳 한인이민사의 한 몫을 차지하고 있다.

첫 가족이민으로 알려진 최영길은 1968년 이민수속 절차를 밟아 가족과 함께 호주에 입국한다. 그의 경우는 한국전쟁에 참여한 호주군인들과의 인연과 호주 재향군인회등의 후원으로 비자를 받아 이민 한 초창기의 경우이다. 당시 시드니모닝헤랄드 신문은 이 가족을 사진과 함께 보도하면서 최영길을 호주군인들이 ‘입양한 전쟁고아’로 소개하였는데 한국에서 함께 일했던 그들과 결국 호주에서 재회한 것으로 전하고 있다 (1968년 6월 21일).

주 시드니 총영사관 웹싸이트 한국인 호주이민 역사에 초기 전문직 이민자들에 관한 내용이 간단히 소개되어 있는데 1970년 이전 소수의 유학생및 콜롬보 계획 장학금 수혜 공무원들이 50명에서 60명 수준으로 호주에 온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 당시 아시아국가들의 정치적 불안과 공산주의 확장을 막기위해 호주 정부는 다각도로 지원하였는데, 그 일환으로 ‘선한 이웃’정책을 60년대 이전부터 실시하였고 그 중에 성공적인 프로그램이 콜롬보 플랜이었다. 이 장학금제도를 통해 수 천명의 아시아인 학생들이 호주에서 기술을 배울 수 있었고 아시아국가들 중에 이 플랜만큼은 인기가 있었다. 이 플랜을 통해 1960년 입국해 호주에 정착한 소설가 김동호는 내 이름은 티안 (My name is Tian)이란 영문 장편소설로 호주문학상을 수상하기도 하였다.


3) 한인 이민사회의 시작 (1960-1980)


호주 정부는 백호주의 정책을 한편으로 시행하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아시아 나라들과의 외교와 경제협력을 계속 유지하였다. 그러므로 한국정부와 호주정부의 외교관계는 더 일찍 거슬러 올라 가지만 주 호주 한국대사관은 시드니 영사관을 시작으로1953년에 개관되었고 1962년에 가서야 대사관으로 승격된다. 한편 호주와 북한과의 국교수립은 1974년에 가서야 이루어지지만 그 다음해 북한대사관은 유엔에서의 의견차이로 호주에서 일방적으로 철수한다.

호주의 백호주의 정책이 공식 첼폐된 1973년을 전후로 호주의 광산과 유전개발에 필요한 지질학자및 헬리콥터 조종사, 보석 디자이너, 그리고 태권도 사범등 소수의 전문기술자들이 호주로 입국하였다. 호주 이민성 웹싸이트에도 1969년에서야 기술이민 프로그램으로 첫 한인 이민자들이 들어 왔다고 적고 있는데 1971년 당시 지질학자로 입국한 남기영은 그 당시 상황을 다음과 같이 증언하고 있다. “1969년 부터 소수이기는 했지만 서울 서소문에 있었던 주한 호주대사관에서 이민 신청서를 접수하였고 그 일진이 1970년 말과 1971년 초에 호주에 도착하였다. 그 당시의 이민은 소위 말하는 기술이민으로 호주에 필요한 인력을 선발한다는 원칙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이공계의 고등교육을 받은 사람들이 주류를 이루었다” (남기영, 2003: 11).

멜본에서는 한국에서 사역했던 호주 선교사들이 호한회란 이름으로 한인 이민자들을 환영해 주었는데 그들이 작성한 명단에 의하면 1972년 말 멜본에는 영주 거주자가 36명, 그리고 유학생 등이 21명 있는것으로 나와있고, 그 다음해 1973년 초 멜본 한인회 주소록에는 성인 47명, 어린이 22명 초 69명이 기록되어 있다 (남기영, 2003: 11). 호주정부가 실시한 1971년 인구조사에 468명의 한국태생 한인들이 호주에 살고 있는 것으로 기록된 것을 보면 그 당시 시드니에 300여명 정도의 한인들이 살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이 시기에 한인이민사회에 중요한 발전이 있었는데 1966년 브리스반한인회, 1968년 시드니한인회 그리고 1972년 말 멜본한인회가 각각 창립되었다.

4) 월남전쟁과 사면령 (1970년대)


1975년 사이공이 함락되면서 막을내린 월남전쟁은 정치적으로 호주에도 논쟁을 불러 일으켰을 뿐 아니라 지역적으로 비교적 가깝다는 이유로 호주 사회에 큰 영향을 끼치게 된다. 전쟁 고아들이나 보트피플 등의 난민들이 나중에 호주로 입국하기 시작한 것은 물론이고, 그곳에서 일하던 많은 해외 인력들이 호주행을 택했기 때문이다.

월남패망 직전인 1974년 부터 파월기술자 500여명이 관광비자로 입국하였는데, 물론 이것은 그 당시 백호주의 정책의 철폐와 비자 간소화정책으로 가능한 일이었다.
1960년대에 들어 와 호주정부는 인종차별적인 백호주의 정책에 대해 일본, 필리핀, 인디아 등 주변 국가들로부터 계속 공격을 받고 있었고, 한국의 김수환 추기경도 호주 백호주의 정책이 아시아 나라들로부터 원망을 사고 있다고 말하기도 하였다(Australian Financial Review, 22 Feb 1973). 내부적으로는 호주의 적은 인구와 아시아 침략의 불안으로 인해 ‘인구증가인가 아니면 멸망인가’ 라는 질문이 2차대전 후부터 끊임없이 대두되고 있었다.

이때 1973년 노동당 정부가 들어서면서 극히 제한적이었던 아시아 이민을 개방할 뿐 아니라, 호주에 3년이상만 영주하면 누구에게나 시민권을 수여하여 인구증가 정책을 시도하게 되고, 더 중요하게는 아시아국가들과의 정치경제관계를 개선하면서 당시 이민성 장관이 아시아를 방문하며 새 이민법을 적극 홍보하게 된다.

이런 배경속에 월남에서 일하던 많은 한인들은 한국으로 돌아가기 보다 더 나은 미래를 찾아 호주로 오게된다. 1973년 월남에서 호주로 입국한 이상기는 그 당시 많은 파월 기술자들이 그곳에서 저축한 돈과 또 월남전에 참여한 용사라는 배경으로 비교적 쉽게 호주 관광비자를 받았다며, 일년 비자기간이 지나면서 더러는 다른 종류의 비자로 바꾸기도하고, 더러는 비자 유효기간이 지나기도 하고, 또 소수는 그 당시 이민이 쉬웠던 캐나다로 건너갔다고 말한다. 그 당시 한인들은 주로 시드니 시내 근처인 레드펀에 살았고 월남에서의 노동력 경험을 바탕으로 대부분 부지런하고 근면하게 일하면서 실제로 한인사회는 이때부터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고 증언한다 (인터뷰, 2005년 12월 8일).

한국의 한겨례 21에 호주 이민사의 산 증인으로 소개된 고 신경선도 월남전 당시 파월 기술자 측량사로 맹호부대에 파견되었었고, 전쟁이 막바지에 접어들 무렵인 1974년 일자리를 찾아 지하자원이 풍부한 남부호주 퍼스에 첫 발을 디뎠다고 적고 있다(179호, 1997년 10월 23일). 이 당시 많은 이들이 열심히 일하는만큼 돈을 벌 수 있고 또 미국달러보다 높았던 호주달러를 벌수있는호주를 기회의 땅 혹은 지상의 천국으로 여기면서 돈 벌어 한국으로 돌아가기 보다, 이제는한국에 있는 가족들을 불러 올 생각을 하게 된다.

1976년 호주 정부는 마침 이민쿼터를 7만명으로 대거 늘리면서 1975년 말까지 입국했다가 비자지간이 지난 소위 ‘불법체류자’들에게 사면령을 내리게 된다. 멜본의 The Age신문은 그 당시 호주건국기념일에 발표된 사면령을 3면에 조그맣게 기사화하면서 비자 간소화 정책으로 많은 관광객들이 들어와 불법으로 체류하기 시작했다며, 그들중에 범죄 기록이 없고 좋은 시민이 될 수 있는 자들을 선별하여 영주의 기회를 주겠다고 당시 이민성 장관의 말을 인용하고 있다. 그러면서 이런 사면령이 앞으로 더는 없을 것이라고 강조하고 있다. 전체적으로 약 8천명 정도의 이민자가 이 사면을 통하여 호주에 영주하게 되고 또 그들의 가족이 줄줄이 입국하게 되므로 ‘체인 이민’이 시작된다. 한인사회도 이 사면을 통하여 숫적으로 성장하게 되는데 특히 여성들과 자녀들이 들어오므로 남자들만의 이민사회 성격이 좀 더 안정적이고 다양하게 바뀌어지게 되고, 70년대 말부터 여러 한인 단체들이 생겨 나기 시작하였다.


5) 호주 한인 이민사회의 성장 (1980년대)

사면령을 통하여 많은 이민자들이 호주에 영주하게 되자 세계 곳곳에 있던 많은 한인들도 기대를 가지고 호주로 입국하게 된다. 특히 한국에서는 물론 중동과 남미에 있던 한인들도 이 시기 입국한 것으로 알려졌는데, 호주를 통과하여 다른 나라로 가는것처럼 비행기 표를 구입하면 3일간 호주 체류가 가능하였는데 이것을 이용해 호주에 계속 머무는 방법이 있었다.

호주 프레이저(Fraser) 수상 정부는 사면령이 많은 방문자들을 불법으로 체류하게 만드는 요인인 것을 알면서도 또 한번의 사면령으로 알려진 신분정례화 프로그램을 1980년 선포한다. 영국인이지만 비 유럽계 배우자일 경우에도 엄격하게 제한하던 가족 재결합 정책을 완화하고, 아시아 피난민들 숫자를 늘이고, 또 비자유효기간은 지났지만 이미 호주에 적응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신분의 합법화와 영주의 기회를 주는 인도적인 이민정책이 이 당시 진행되고 있었다.

호주 이민성 웹싸이트는 “1976년과 1978-79년 사이에 있었던 사면령으로 500명 이상의 한인들이 호주의 영주권을 갖게 되었다”고 적고 있다. 1976년 한인의 공식 숫자는 1,460명 이었는데 5년 후 1981년에는 4,514명으로 급증한 것으로 보아 사면령의 영향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사진으로 보는 호주 이민사’라는 글을 쓴 김인기는 “초창기 체류자들은 주급 $120불을 모아 한국의 가족들 생활비및 자녀교육비로 보내며, 또 한편으로는 이민 경찰의 습격에 항상 긴장해야 하는 이중의 고통을 감당하고 있었다” 고 그 당시 긴박한 상황을 전하고 있다 (2004년 2월 13일: 124). 불법체류자의 신분으로 숨어 다니며 (그 당시 그들은 ‘잠수함’ 혹은 ‘맨발’로 불리기도 하였다) 갖은 고생과 불평등을 견뎌 내다 결국 호주의 시민이되어 가족을 불러들이는 여러 한인들의 경험과 증언은 그것만으로 가치있는 이민역사의 한 부분이다. 그 후에도 1980년 말까지 꾸준히 입국한 사람들에게, 특히 호주 건국 200년을 맞는 1988년 또 한번 사면의 희망은 물거품이 되어 많은 사람들에게 좌절을 안겨 주었다.

이 당시 한가지 주요한 현상은1980년 대 초 부터 시드니의 캠시(Campsie)라는 지역에 한인들이 모이기 시작했고, 한국식당과 식품점등이 자연스럽게 생기면서 한인촌이 형성되어 한인들의 보금자리가 된다. 한인들이 캠시에 모이게 되는 다섯가지 현상을 번레이 (Burnley) 교수는 The Impact of Immigration on Australia에 설명하는데 정신적인 안정감, 직업 찾기의 용이함, 낮은 가격의 셋집, 한국식 서비스와 생활용품, 그리고 시드니 시내와 남쪽 공업지역으로의 교통편리 등이 그것이다 (번레이, Burnley, 2001: 271) . 캠시는 그 후 오랬동안 한인들의 경제적, 사회적 중심지로 특히 갖 입국한 한인들에게 호주 이민생활의 징검다리 역할을 하게 되고, 또 중요하게는 호주인들과 타 민족 이민자들이 코리언 음식과 문화를 접하게 되는 나눔의 현장이 된다.


6) 투자 이민과 기술 이민 (1980 – 1990년 대)


인종차별을 근거로 하는 이민 제한정책은 철폐되었지만, 이민은 결국 국가의 경제적이고 사회적인 필요와 이익에 따라 책임있게 통제되져야 한다는 원칙은 후에도 여러 집권당에 의해 계속 유지되었다. 이민 점수제도가 그런 취지에서 1979년 도입되어 교육, 사회, 그리고 경제적인 능력에 따라 점수를 가산하므로 호주의 경제 발전에 얼마나 이바지 할 수 있느냐가 향후 이민의 골간을 이루게 된다. 그리고 좀 더 구체적으로 투자이민, 사업이민, 기술이민 등이 생겨나므로 아시아의 중산층 이상 수준의 이민자들을 불러 오게 되는데 이 정책들은 실패와 성공속에 계속 보완되어 현재 호주사회에 필요한 여러가지 기술이민 카테고리가 나와있다.

한 예로 1987년부터 시작된 사업이민은 해외의 자본있고 기술있는 이민자들을 호주의 주요도시로 불러오는 매력있는 정책이었다. 호주의 경제를 활성화 시키는 한 방법으로 사업체 소유자, 투자자 그리고 기업간부 등이 호주에서 새 사업이나 기존의 사업을 계속할 수 있도록 영주권을 주고 있었다. 또한 호주의 고용주가 본국 시장에서 찾을 수 없는 기술이나 또 훈련이 불가능한 고급 기술 인력에게 우선적으로 이민을 허용하였다. ‘숫자’를 찾았던 호주정부의 이민정책이 이제는 ‘질’을 중심으로 인적자원을 확보하기 위한 방편으로 바뀌게 된 것이다.

‘사면령 이민자’들과는 달리 이들 대부분은 호주에 정착하여 사업을 계속 할 것인지 돌아갈 것인지 여유로운 선택이 있었고 호주는 삶의 질을 향상시키기 위한 그리고 자녀들의 교육을 위한 한 방편이었다. 호주에 정착하기로 결정하면 곧 집을 사고 호주의 자연과 레져를 즐기며 살 수 있었는데 이전 이민자들과는 전혀 다른 종류의 이민이었다.
한길수 교수는 Asian Migrant라는 학술지에 다른 단면을 지적하고 있는데 이들 한인 사업이민자들중 많은 사람들이 본인이 원하는 사업을 호주에서 할 수 없어 정신적인 불만족으로 고통을 받고 있었다고 한다. 그 주된 이유로는 영어의 어려움과 호주사회 이해부족에서 오고 있다고 지적한다 (한길수, 1996: 85).

그러므로 1980년대 사업비자로 들어 온 사람들의 시행착오를 보고 1990년대 들어 온 사업이민자들은 임금을 높이 주어야 하는 호주에서의 사업에 곧장 뛰어 들기보다 재산을 그대로 가지고 있거나, 아니면 한국의 사업체를 계속 유지하거나 혹은 아시아쪽의 시장으로 눈을 돌리게 하였다고 적고 있다. 사업이민자들 중 많은 사람이 본인이 원하는 사업을 호주에서 할 수 없어 심리적으로는 만족치 못한 생활이지만, 좋은 기후와 한국에서처럼의 과로나 술자리가 없어 육체적인 건강은 증진되었다고 분석하고 있다 (한길수, 1996: 82-85).

이 당시 교민사회에 재미있는 용어가 있었는데 ‘구포(old timer)’와 ‘신포(new comer)’이다. 구포는 이전에 이민 온 교포들을 지칭하고 신포는 사업이민이나 투자이민으로 갓 이민 온 교포들을 말하였다. 구포는 신포를 향하여 ‘이민자로 산다는 것이 무었인지도 모르고 돈만 있는’ 사람들로 이야기하고, 신포는 구포들을 볼때 ‘남의 나라에서 고생고생하며 사는 가난한’ 사람들로 서로 조롱하는 단어였다 (한길수, 2001: 547). 시간의 흐름에 따라 여러종류의 이민자들이 들어오고 또 구포들도 많이 성공하여 좋은 지역에 살면서 지금은 이런 구별이 없어 졌는데 이민의 서로 다른성격을 보여주는 한 단면이었다.

한편 ‘해외 이민의 명암: 호주내 한인들의 이민동기와 실제생활’이란 글을 쓴 설병수는 대다수의 한인들은 경제적인 동기보다 ‘양질의 삶’을 위해 호주로 이민 왔다고 주장하고 있는데 ‘아메리칸 드림’이 경제적인 성공을 의미한다면, ‘오스트라리안 드림’은 보다 나은 ‘인간적인 삶의 추구’를 의미한다고 해석하고 있다 (설병수, 2001: 59).

이 시기 이웃나라인 뉴질랜드에서 호주로 이민오는 숫자가 크게 증가하였는데 이것은 영국인 이민자가 계속 감소하므로 같은 영국계 뉴질랜드 정부와는 쌍방 시민들의 입국절차를 간소화한 결과이고, 적지 않은 한인들도 이 경로를 통해 호주에 입국하였다. 한인이 9,285명이라는 1986년 인구조사는 1991년 가서 20,580명이 되어 배가 증가되었다. 이것은 이 당시 많은 한인들이 사업과 기술이민 등으로 들어 온 이유인데 이민성은 이 당시 매해 1,400명 정도가 입국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이 숫자는 1996년 인구조사에서 30,091명으로 나타나 조금 둔화되고 있다.


7) 한국 유학생과 교민사회 (1990년대부터 현재)


1990년에 들어서면서 호주는 한국인들에게 가장 인기있는 여행국가중의 하나로 떠오르고 있었다. 호주와 한국을 이어주는 비행기가 매일 뜨고 많은 사람들이 관광으로 또 공부를 위해 호주를 방문하고 있다. 한국 유학생들이 여러모양의 교육과 미래의 발전을 위해 호주의 주요 도시로 들어 오고 있고 그의 부모들 중에도 함께 동행하여 호주에서 삶의 영역을 확장하고 있다. 따라서 많은 여행업체와 더불어 유학원들이 번성하고 있으며 식당업, 숙박업, 광고업들이 교민사회의 경제에 활력을 주고 있다. 이민성의 자료는 2002-2003년에 11,270명의 한인학생들이, 2003-2004년에는 14,375명으로 27.5퍼센트의 증가율을 기록하고 있다. 이것은 중국 다음으로 가장 큰 유학생 숫자이다. 폭발적으로 성장해 오던 호주 유학산업이 후에 잇단 악재로 인하여 신장세가 크게 둔화되는데 2009년에는 한인 유학생의 신규등록이 2%정도 감소되어 중국과 인도 다음으로 35,708명이다.

유학의 내용을 분야별로 보면 대학교와 대학원등의 고등고육기관, 전문대 직업 전문기술과정, 초중고등학교, 어학연수, 그리고 교환학생등인데 이중에 언어연수가 가장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지역별로는 시드니를 중심으로 한 뉴싸우스웰스 주, 브리즈번을 중심으로 한 퀸스랜드 주, 그리고 멜본을 중심으로 한 빅토리아 주 등의 순서로 한국 유학생들이 들어 오고 있는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2006년 주간 코리아타운에서 유학생 276명을 대상으로한 설문조사에서 유학 후 호주에 정착하고 싶다고 대답한 한국학생이 33%나 되었다 (2006년 3월24일).

2001년 7월 한국의KBS에서는 추적 60분을 통해 호주 한국유학생들의 문제점을 방송하기도 했는데 당시 한국이 3등급으로 하향조정되어 유학의 절차가 어려워지게된 이유는 소수 유학생들의 불법취업, 비자기간 경과 체류, 조기 유학생들의 탈선행위등이 그 내용이었다고 하였다. 2년 후에 가서 한국은 다시 2등급으로 상향분류 되었는데, 호주의 각 대학마다 유학생 유치를 통하여 정부의 보조금 삭감으로 인한 부족한 재원을 충당하므로 연간 총35억불 이상의 호주 외화수입원이 되고 있다.

워킹 홀리데이 비자를 통해 호주에 입국하는 청년들도 점차 늘고 있는데 이것은 30세 이하의 청년들이 호주여행을 하면서 단기간의 노동을 통해 여행자금을 충당할 수 있는 제도로, 주로 과일따기나 포장등 추수철 호주의 부족한 인력을 충당하고 그래서 불법체류자들이 일을 못하도록 막는 목적을 가지고 있다.

유학생과 관광객 등으로 인하여 교민 경제사회도 크게 활성화 되었고 그중 유학업 및 교육 사업, 이민 상담업 그리고 관광업등의 발전이 두드러졌다. 동포 주간신문 Top지는 2005년 8월 4일자에 한인경제에 관해 논하면서 “14년 전 10개에 불과했던 유학원의 숫자가 이제는 시드니에서만 70여개 이상으로 파악되고 있고, 14년전 5개 업소에 불과했던 이민 대행업체가 현재는 이민 법무사라는 이름 아래 최소 12배 이상의 양적 팽창을 한것으로 파악된다”라고 말하고 있다 (Top, 2005년 8월 4일). 관광관련 업체도 91년 당시 1만 4천명에 그쳤던 한국 관광객이 2004년 무려 21만명으로 집계됬다는 통계는 인바운드 여행사뿐만 아니라 관광객 전용 선물쎈터 역시 파죽지세로 양적성장을 거듭하고 있다고 같은 신문은 전한다. 이것은 비단 한국 관광객뿐만 아니라 아시아와 유럽등에서 오는 관광객이 연평균 4백만명, 워킹 홀리데이로 오는 청년들이 6만여명, 그리고 학생비자로 10만명 이상이 매해 호주에 입국하므로 지역적으로 소외되 있었던 호주도 글로벌시대의 한 주역이 되어 있다.

8) 젊은 한인 이민사회 (2000년 대 이후)


최근 호주인들이 한국의 언어와 문화에 더 관심을 가지고 실제로 몇 대학에서는 한국학과가 개설되는가 하면, 일부 고등학교에서도 한국어를 가르쳐 대학입시 시험과목의 하나로 인정하고 있다. 이것은 물론 한국이 호주 경제에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기때문이기도 한데. 2004년-2005년에는 한국이 호주의 네번째로 큰 무역 상대국이었고, 더 중요하게는 한국이 호주의 세번째로 큰 수출국이었다.

1991년 정부 인구조사 통계에 호주의 한국태생 이민공동체는 84.8%가 가정에서 한국어를 사용하며, 영어만 사용하는 가정은 12.8%로 나타났는데 호주의 한인들은 한국의 문화와 생활 패턴을 비교적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는 한 단면이다. 한인들이 얼마나 호주사회에 적응하여 소외된 게토집단이 아니라 주류사회의 한 부분이 되는 가는 더 두고 보아야 하겠지만 이민 1세들과 2세들, 그리고 1.5세들의 정체성과 문화에 대해 다각적인 연구가 요청되고 있다.

2001년 호주 인구 통계를 보면 38,840명이 한국에서 태어난 이민자로 기록되어 있다. 평균 나이는 30.8세이고 이것은 전체 이민자 평균 나이의 46세와 비교되며, 또한 호주 전체 평균 나이인 35.6세 보다도 젊은 나이이다.

호주에서의 한인사회는 주로 1세 사회로 크게 드러나지는 않치만 한편으로는 일반사회와 잘 공존하면서 기여하고 있는 ‘모델 소수민족’으로,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영어사용을 포함해 일반 호주문화에 잘 동화되지 못하는 또는 않는 민족으로 비추어지고 있다. 계 파동이나 각종 사기사건 그리고 폭력등의 범죄 이미지가 존재하는것도 사실이지만, 한 두 호주언론에 과장되고 또 왜곡되어 비쳐진 결과이기도 하다. 2004-2005회계연도에는 각종 불법이민 항목에 한인들이 일제히 상위에 기록되 한국과 한인들의 이미지에 손상이 가기도 하였다 (한국신문, 2006년 1월 19일: 14).

한인에 관한 호주 인구조사에는 호주에서 태어난 2세들의 생활이나 문화가 반영되지 않으므로 이들에 관한 통계나 학문적인 연구가 현재 전무한 현실이다. 이들에 관한 학문적 고찰은 아직 이를 수 있지만 2세들의 존재와 그들의 공헌은 한인사회와 호주사회 전반에 점차로 부각되고 있는 현실이다. 1.5세와 2세들 중에 전문화된 직업을 가진 지도자들이 많이 나와 있는데 사업가, 언론인, 의사, 변호사, 회계사, 종교지도자, 정치인, 교육가, 노동운동가, 복지사등이다. 이들의 전문직 분야 진출은 일세대가 할 수 없었던 직종으로 일세대들의 희생과 희망으로 그 자리에까지 와 있는것은 물론이다. 특히 1.5세로는 처음으로 호주의 주요 정당으로 진출해 2004년 스트라스필드 시의원이 되고 후에 시장까지 지냈던 권기범 후원회 모임에서 한 관계자는 “한 정치인 개인을 후원하는것도 중요하지만 동포사회 정치적 향상을 위한 차원에서 이런 행사가 중요하다”고 말하는데 한인들의 의사와 필요가 지방정부에 반영되기 위해서는 더 많은 정치 참여가 절실하다고 말하고 있다 (한국신문, 2005년 11월 25일). 또한 시드니의 한 총영사는 어떤 공식모임에서 한인사회의 정치적 신장에 대해 언급하며 동포사회의 위상을 위해 주류정치권을 향한 보다 효율적인 연대모임의 필요성을 역설하고 있다 (한국신문, 2005년 8월 26일).

이것은 비단 한인사회뿐 아니라 다른 주요 이민자 그룹들의 정치사회적 영향력도 호주사회에 전반적으로 미약한것이 현실이고, 이민자이기 때문에 지도자가 되기 보다는 이민자임에도 불구하고 개인능력으로 정치사회적 신분상승을 하는 호주 주류사회의 지금까지 분위기이다. 그러므로 한인사회의 발전과 정치사회적 영향력은 일반 다문화정책의 확장, 타 이민자 그룹의 발전, 그리고 호주정부의 우호적인 이민정책과 그 궤를 같이 하고 있다.


5. 나가는 말


호주 다문화 사회에서 비교적 소수민족 집단인 한인들의 이민역사나 삶의 형태, 그리고 그 공헌이 거의 알려져 있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호주의 문화와 경제 발전에 한인을 포함한 여러 아시아 종족들의 공헌은 호주 정규학교의 역사와 사회 교과서에 대부분 언급되지 않고 있다. 중국인 노동자들은 오래 전 호주 오지지역의 금광에 취업을 해 왔었고, 그 이후 여러 도시에서 식당이나 서비스업, 그리고 호주인들이 저급하게 생각하는 일에 종사해 오면서 호주 사회에 기여해 왔고, 일본인들은 호주 북부에서 진주산업에 참여하여 왔고, 필리핀 사업가들은 호주와 아시아의 무역에 활발히 앞장서 왔고, 그리고 월남 난민들이 호주까지 어떻게 오게 되었는지 등 이런 정도의 피상적인 내용만 호주학생들이 학교에서 배워왔다. 호주에 이민 온 아시아 인들이 현대 호주의 문화적, 경제적, 예술적인 발전에 공헌을 해 온 많은 이야기들이 근래에 와서야 비로소 조금씩 알려지고 있는 형편이다. 최근에 와서 사회교과서에 호주의 문화와 인종의 다양성을 가르치고 있으며 소수민족 공동체들의 이민역사과 그 공헌도 소개되고 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호주의 한인사회는 호주 정규교과서에 거의 언급이 안되고 있어 그들이 어떤 이유로 호주에 와 공동체를 이루었는지, 어떤 내용의 공헌을 하고 있는지, 또한 어떤 다문화 관계를 이루며 호주사회에 살고 있는지 등에 대한 정보가 거의 없는 형편이다. 호주의 사회학자 코간(Coughlan) 교수는 그 이유에 대해 크게 두가지를 언급하고 있다.


첫째로는 한인공동체가 비교적 숫적으로 작다는 현실이다. 2006년 통계에 보면 한국출생 한인은 해외에서 온 이민자 중 17번째의 그룹이고 (52,761), 한국어는 13번째로 사용되고 있는 언어이고 (54,625), 한인은 29번째로 한 혈통을 가진 그룹이었다 (60,873). 두번째로 한인들에 관한 내용이 호주교과서에 없는 이유는 호주한인들에 관한 영어자료가 거의 없기 때문이다. 대부분 자료들이 오래된 내용이거나 호주 선생들이 쉽게 접할 수 없는 언어이기 때문이다. 만약 한인들이 그들의 이야기를 호주 교과서와 강의실에 알리기 원한다면 연구된 내용들이 영어로 출판되어 이용되어야 한다(Coughlan , 2008: 117).


코간 (Coughlan)은 호주에서 가장 빨리 성장하는 그룹 중의 하나가 한인공동체이고, 한인들이 호주에 정착한지 1세기가 되어 가지만 호주사회는 한인들에 대해 무지하거나 잘못된 정보에 의한 이해를 가지고 있으며, 특히 언론에 의해 보도되는 이미지가 그 무지를 부채질하고 있다고 언급하고 있다 (위의책, 116). 이것은 물론 호주 정규학교의 역사나 사회과학 학과에 호주 한인들에 관련된 연구가 거의 없다는데 기인하고 있다. 호주에서 활동하고 있는 한인 학자들 중 한국어 교육이나 한국문화에 관한 연구는 지속하고 있지만, 호주사회에 사는 한인동포와 타민족과의 다문화 관계에 관한 연구나 글을 영문은 물론 한글로도 발표하는 학자가 거의 없는 형편이다.

호주 한인들이 다문화 사회로 나아가는데 또 다른 어려움은 내부로부터 기인한다고 한길수 교수는 지적하고 있다. 한인사회의 몇 단체들과 교회들의 지나친 민족의식과 한국식 교육이 다문화 호주사회로 한인들이 진출하는데 오히려 걸림돌이 되고 있다고 주장한다 (한길수, 2004: 115). 한국인으로서의 민족성과 자긍심을 고취시키는 일은 아무리 하여도 다함이 없으나, 다문화 사회의 현실을 무시하고 자민족중심주의만 부추긴다면 호주사회에서 소외되거나 인종차별의 대상이 될 수 있다.

2005년 8.15 광복 60돌 행사가 시드니 한인회관에서 남북 공관대표등 각계인사들이 참석한 가운데 열렸었다. 남북화합의 이름으로 태극기를 한반도기로, 애국가를 아리랑으로 대신하여 행사를 진행하는 도중, 한쪽에서 돌연 애국가를 부르며 대한민국 만세 삼창을 외쳐 행사가 잠시 중단되기도 하였다. 한국인으로 다문화 호주에 산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가? 호주에 있어서 한반도의 통일은 무었인가? 1세와 또2세들에게 고국과 민족은 무었인가? 등을 생각하게 해주는 의미있는 사건이었다.

호주 각 주에서 한인사회의 존재와 문화를 알리고 공유하려는 한인회의 노력과 활동은 칭찬할 만 하다. 다문화 사회 행사에 참여하거나 다문화 행사를 주도하여 한인사회의 위상을 높이려는 다각도의 노력이 그나마 한인사회를 주류사회에 알리고 있는 공헌을 하고 있다. 다문화 정책의 실행과 인종관계에 관한 것은 호주 지방정부의 역할이 중요한데 지방정부가 시행하고 있는 하모니 데이(Harmony Day) 행사, 소수민족 사업체지원, 이민자 정착지원, 통번역 언어 서비스, 성인이민자 영어프로그램, SBS (특별방송서비스공사) 라디오와 텔레비젼 다언어 방송등과 꾸준히 접촉하며 참여의 길을 모색할 때 다문화 사회에 관한 꿈과 이상이 현실의 상호존중과 생산적 다양성의 혜택을 공유할 수 있는 방법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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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pyright 양명득



작성자: 양명득 박사 Dr Myong Duk Yang myongyang007@gmail.com 시간: 오후 10:2

2019년 10월 6일 일요일

시드니 내 한인 공동체:크리스찬리뷰 ㅣ한길수 The Christian Review



시드니 내 한인 공동체:크리스찬리뷰 ㅣ The Christian Review



시드니 내 한인 공동체

정착, 경제적 적응, 그리고 한국어와 한국 문화의 진흥



한길수/크리스찬리뷰








▲ © 한길수




이 글은 지난 3월 출간된 고려대학교 윤인진 교수가 편집한 단행본 「세계의 코리아타운과 한인 커뮤니티」중 한길수 교수(멜번 모나쉬대)의 논문(제4장 시드니 내 한인 공동체)을 저자의 허락을 받아 본지에 3-4회로 나누어 연재한다.<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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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서론


호주는 다문화주의의 성공으로 잘 알려진 바 있다. 한인들은 1970년대에 처음 호주에 도착하기 시작했으며 그 이후 상당히 중요한 소수자 공동체로 확립되었는데 이는 부분적으로 한국 경제 발전의 궤적을 반영하는 것이었다.

최근 몇 년간 사회적 통합은 호주와 그밖의 다른 지역에서의 에스닉 연구에 있어서 다시 논쟁을 일으키는 주제가 되었다. 다양성이 호주와 같은 다문화적인 사회에서 본질적인 특성으로 장려되는 반면에, 얼마나 다양한 에스닉 집단들이 자신의 국가적인 정체성으로서 ‘호주인임’을 표방하는가는 중요한 질문인 것으로 판단되고 있다.


한인 이주민들은 어떻게 이 문제를 해결했는가를 이해하기 위해서 이 연구는 특히 이민자들의 사회경제적 특성과 관련하여 호주로의 한인 이민 역사를 재검토한다. 이러한 특성들은 호주 사회에서 한인 이민자들의 정착 패턴과 경제적 적응에 명백하게 영향을 끼쳤다.

이에 따라 한인 이민자들은, 다문화적 호주의 다양한 사회적 풍토에 정착하게 되면서, 젊은 세대가 한국어 능력을 유지할 수 있도록 장려하기 위해 혼신의 노력을 다하였다.

호주 내 대다수의 한인 이민자들은 New South Wales 주와 그리고 특히 Sydney 내 메트로폴리탄 지역에 정착하였다. 지난 국가 인구 조사에서 나타난 호주에서 살고 있는 한국 태생 74,538명 중, 41,819(56.1%)가 New South Wales에 살고 있었다 (ABS, 2011).


2.시드니로의 한국 이민 역사


1920년대에, 소수의 아이들이 호주에 정착하였는데 이들은 한국에서 온 호주 선교사들에게 입양된 아이들이었다. 1921년과 1941년 사이에 몇몇의 학생들이 학업을 위해 호주로 오게 되었다 (ADIC, 2011: 1).

호주 시민권을 획득하는 것과 관련하여, 곽묘임 씨는 호주 군인과 결혼하여 1957년에 호주 시민권을 부여받은 첫 번째 한국인이 되었다. 1960년대 후반에 이민 규제가 약간 완화된 이후에 상당수의 한국인 전문직 종사자들이 1969년에 도착하였다. 그렇다 하더라도, 1971년의 인구 조사에 따르면, 호주에 살고 있는 한국 태생의 사람들은 468명에 불과했다(ADIC, 2011: 1).

대략적으로, 1970년대와 2000년대 사이에 한국으로부터 호주로의 이민은 세 가지 유형으로 분류될 수 있다. 1970년대에서 1980년대 중반까지의 ‘사면’, 가족상봉 이민, 1980년대 중반에서 1990년대 초반까지의 숙련되고 독립적인 이민, 그리고 1980년대 후반에서 1990년대까지의 사업 이민이 있다.

본국의 경제 그리고 사회 발전의 주요 단계들과 한인들을 해외로 송출하는데 있어서의 변화들은 이주민들이 한국을 떠나는 시기와 그들 각각의 사회 경제적 특성들에 반영되어 있다.

호주 정부가 이민자들의 수용을 그들의 구체적인 자격과 요구조건들에 따라 달리하는 것 역시 호주의 경제 그리고 사회 발전의 다른 단계들에 상응한다.

1960년대에 한국인들 중 자본을 소유했으나 미국이나 캐나다로 이민을 갈 수 없었던 이들은 최종적으로는 차후에 아메리카의 북부로 이주할 수 있기를 바라면서 남미로 향하였다.


물론 많은 한인들이 미국에서 영주권을 획득하였다(Kim, 1981). 자원과 직업이 없었던 한인들은 고등교육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일자리를 찾아 전쟁 중인 베트남이나 서독으로 떠났다.

1960년대에 한국의 높은 실업률과 1962년에 정부의 이민정책은 농촌 지역에서 대도시로 이주한 이들을 포함하여, 많은 도시 빈민들로 하여금 해외에서 일을 하거나 이주하는 것을 고려하도록 부추겼다.

해외 취업은 특히 대학 교육을 받지 못한 이들에게 매력적이었다. 일정 기간의 직업 훈련 기간은 그러한 사람들로 하여금 해외에서 일을 할 수 있도록 자격을 부여 하곤 하였다(Han, 2000b; 2003; Yoon, 1993).

약 25,000명의 군인들과 민간 노동자들이 베트남 전쟁 중에 미국인, 영국인, 그리고 호주인과 연합하여 일을 수행하기 위해 남베트남으로 떠났으며(Kim, 1981: 54; Vogel, 1991: 62), 이는 한국으로 하여금 상당한 자본을 획득하도록 하였다(Cole and Lyman, 1971: 135).

미국인과 한국인은 1973년에 남베트남에서 철수하기 시작했다. 1975년 4월의 전쟁 바로 직전과 직후에 몇몇의 한국인들은 미국으로 떠났고, 500명의 한국 민간 노동자들은 진보적인 Whitlam 노동 정부 계획의 일환이었던 1개월짜리 ‘Easy Visas’를 통해 호주로 여행을 떠나게 되었다(김형식, 2000b; Han, 2003: 40; 이재형, 2011).

다른 나라에서 온 이들뿐만 아니라 486명의 한국인들 역시 비자 기간보다 더 오래 머물렀으나 이후 1976년 1월에 Whitlam 정부에 의해 호주 내에서 합법적인 상태로 머무를 수 있도록 사면을 받았다(이재형, 2011: 143; 백시현, 1990: 24; 양명득, 2010: 120).

1976년의 사면이라는 좋은 소식은 중동, 서독, 그리고 우루과이와 브라질과 같은 남미 국가에 있는 한인들에게도 전해졌다. 그 소식은 심지어 한국 내 미군 부대의 군사 기지인 동두천시에까지 전해졌는데, 이곳은 베트남에서 일하기로 선택했던 수많은 한국인들이 거주하는 곳이었다.

이로 인해 수많은 한국인 관광객들이 호주로 오게 되었다. 호주 정부의 통계에 의하면 1970년대 중반에 비자 기간 초과 체류자들의 수는 2,500명에 달하였다(김정엽 and 원종인, 1991: 129에서 재인용).

1980년 6월에 있었던 두 번째 사면은 188명의 한국인들에게 영주권을 제공하였다(백시현, 1990: 24). 그 이후 수년간, 한국인들, 주로 남성들은 호주의 이주민 가족 재회 계획을 통해 가족 구성원들과 함께 지낼 수 있게 되었다(김방이, 1986: 21; 김정심, 1992: 431).


<표 4-1>



▲ <표 4-1>




한국에 있는 노동력 수출 중개 업체들이 라틴 아메리카로 이주하는 첫 번째 집단을 꾸린 것은 일제강점기 시대였다. 중개 업체는 John Meryers라는 영국 중개인과 협력하였는데, 그는 멕시코 농장으로 이주할 일본인과 중국인 노동자들을 모집하는데 성공하지 못하였다.

극심한 빈곤에 시달리고 일본 정권 하에서 고통을 받고 있었던 많은 한국인들은 그러한 제안을 받아들였다(현규환, 1976).

총 1,033명이었던 첫 번째 집단은 1905년 5월 15일에 멕시코, Salina Cruz의 항만에 도착하였다. 22개의 다른 농장에서 노동자로 일하면서 그들은 강제 수용소에서 일하는 것처럼 느꼈고 많은 이들이 무단이탈을 시도하였다(탁나현, 1987).

1960년대 초반에 브라질 정부는 자국 농장의 발전을 위해 농업 이주민을 찾고 있었다. 17개의 가구 내 91명의 사람들이 1962년 브라질에 도착하였고, 브라질, 아르헨티나, 파라과이, 멕시코 그리고 볼리비아와 같은 남미 국가로의 한국인 이주가 재개되는 시점이었다(Kim, 1981: 49; KDI, 1979: 37).

그러나 농부가 되기 위한 선별 기준과는 달리, 그들 중 절반은 농부가 아니었고 농사에 관심이 있는 것조차 아니었다. 이에 따라 농장에 정착하기 훨씬 이전에 그들은 브라질 내의 도시들이나 쿠바, 미국 그리고 캐나다와 같은 다른 목적지로 떠나갔다.

남미에서 대다수의 한국인들은 상파울루, 부에노스아이레스, 그리고 리우 데 자네이루와 같은 대도시에서 정착하였고 농업을 그만두었다(동아일보, 1974, Kim, 1981: 55에서 재인용; 현규환, 1976: 1036; KDI, 1979: 124).

이주와 해외 공동체에 대해서 다루는 한국 학술지 『해외 동포』(1992)에 의하면, 잠재적 한국 이주민에게 멕시코가 매력적인 목적지가 된 이유는 미국으로 입국하기에 좋은 전환지점이었기 때문이다. 멕시코는 또한 호주로 입국하기에 좋은 전환지점이기도 하였다. 남미에 있는 많은 한국인들은 호주에서 사면을 받은 이들에 대해 전해 듣고 호주로 이주해 왔다(Coughlan, 1995: 384).



<표 4-2>





▲ <표 4-2>





1972년에서 1978년까지 대략 50,000명의 한국인들이 중동지역에 있는 아랍 국가들의 건설 현장에서 일을 하였다(New York Times, 1978). Kim(1981)은 100,000명 이상의 많은 한국인들이 당시에 해당 지역에서 일하고 있었다고 언급한 바 있다. 1979년에는 사우디아라비아 지역에만 68개의 한국 건설 기업과 93,000명의 한국인들이 진출하였다(Vogel, 1991: 62). 중동지역에서 계약 기간이 만료된 이후, 많은 이들이 미국(문광환, 1989: 32)이나 호주와 같은 다른 목적지로 이주하였다.

동아연감(Kim, 1981: 54에서 재인용)에 따르면, 1963년과 1974년 사이에 약 17,000명의 한국 광부와 간호사가 서독에서 일했다고 한다. 한국 광부들은 유고슬라비아, 이탈리아, 터키와 같은 다른 국가들에서 온 광부들에 비해 높은 수치의 사상자를 기록했다(현규환, 1976: 1050).

서독에 파견된 한국 간호사 중 20%는 자격이 있는 간호사로 고용되었고, 80%는 간호 보조 업무를 담당하게 되었다. 나중에 대부분은 간호사로 등록되는 자격을 충족하였다(현규환, 1976). 1970년대 후반의 경제 침체 기간 동안, 서독은 이주노동자를 추방하였다.

이들 중 많은 사람들이 배우자와 함께 숙련 간호 이주민으로서 미국에 입국하였고(Kim, 1981: 54), 다른 이들은 캐나다로 떠났으며(현규환, 1976; 엄인호, 1987: 45), 약 20-30개 가구가 호주로 떠났다(김만석, 1988).

요약하자면, 해외에서 계약을 맺은 한국인들 중에서 몇 천 명은 계약이 만료되고 나면 관광 비자를 통해 호주로 입국하여 그 이후에 사면으로 영주권자가 되었다는 것이다. 1970년대와 1980년대 초반에 적은 수의 숙련/독립 이주민들만이 호주 내 한인 공동체를 구성하고 있었을 때 베트남, 중동, 남미, 그리고 서독에서 온 한국인들이 호주 한인 이민자의 대다수를 차지하였다(Han, 2003: 46).

서독에서 온 이들은 유일하게 호주에 도착하기 이전에 이민 신청을 제출하고 그들의 기술이나 간호직 자격 조건에 의해서 숙련 이주민으로 호주에 입국하였다. 마지막으로 처음에 관광객으로 입국하여 나중에 1970년대에 이르러 영주권자로 정착하게 된 한국인 집단은 동두천시에서 온 80가구였다.

그들은 이전에 동료였던 사람들이 호주에 정착했다는 소식을 듣고 나서 호주에 이주해 왔다(Han, 2003: 46). 1970년대에 이주해온 거의 대부분의 초기 이주민들은 시드니 지역에 정착하였다.

1976년도와 1980년도 사면은 호주의 성장하는 경제에 노동력을 공급할 뿐만 아니라, 이웃 아시아 국가들과의 협력 관계를 전략적으로 구축하는데 기여했다. 더 나아가, 이러한 발전은 1973년 소위 말하는 백호주의 정책의 공식적인 폐지 이후로 진행되었다.

건강한 신체적 노동을 수행할 수 있는 역량은 두 차례의 사면에 대한 자격을 충족하는데 중요한 기준인 것으로 드러났다. 1979년에 호주 정부는 다면적 수치 평가를 시행했는데, 이는 잠재적 이주자들이 이수 교육, 영어 구사 능력, 연령 기준에 반하는지 그리고 호주 사회 및 경제 발전에 기여할 수 있는 잠재성에 대한 평가였다. 이러한 새로운 이민 계획 하에서, 숙련/독립 그리고 비즈니스 이주가 1980년부터 이루어졌다.

사면 이주자들과는 달리 숙련 이주자들은 한국에서 비교적 더 잘 교육받고 사회 경제적으로 부유했었다. 그들은 신체적으로 건강했을 뿐만 아니라 전문적인 기술을 갖추고 있었다. ‘비즈니스 이주민’이라는 범주는 고용을 창출하고 호주 경제를 다시 활성화하기 위해 설계되었다.

비즈니스 이주민들은 건강하고 숙련된 사람일 것으로 기대되었을 뿐만 아니라 사업을 시작할 자본을 갖추고 있을 것으로 기대되었다. 1987년과 1993년 사이에 3,490명의 한국인이 비즈니스 이주민 범주로 호주에 입국하였다(김영성, 1998: 51).

1988년 서울 하계 올림픽은 한국 경제에 있어서 전환점이었는데, 한국은 국제적으로 좋은 경제성과를 보이기 시작했고 상당히 많은 수의 한국인들이 해외 교육과 해외여행을 추구하기 시작했다.

1990년대부터 호주는 한국인들에게 가장 인기가 많은 여행/이민 목적지 중 하나였다. 2002/3년에는 호주에서 공부하고 있는 한국인 학생이 11,270명이었고, 2003/4에는 14,735명, 그리고 2009년에는 35,708명이었다.

마지막 수치는 세 번째로 높은 숫자였는데, 중국인 학생이 첫 번째 그리고 인도인 학생이 두 번째로 많았다. 또한 많은 수의 워킹 홀리데이 비자 소지자들이 호주에서 12개월 혹은 더 오랫동안 머무르고 있었다. 이러한 학생들은 시드니, 브리즈번, 멜번에 있는 한인 공동체 내 활발한 경제의 중요한 요소였다.


3.정착 패턴


소수의 전문가들과 단기 직업 훈련생이 시드니에서 성장하는 한인 공동체의 주요 구성원을 이루었다. 그러나 시드니 내에서 한국인들이 적었기 때문에 그들의 정착이 1970년대 중반까지도 가시적으로 드러나지 않았다(김영성, 1998: 42, 46). 논의한 것처럼, 호주에서 한인들의 수가 상당히 증가한 것은 1976년과 1980년의 사면을 통해서였다.

1976년에는 1,460명의 한국인이 그리고 1981년에는 4,514명의 한국인이 있었다(양명득, 2010: 121). 이에 따라 1980년 즈음에 한인 공동체의 형성이 분명해졌다.


<표 4-3>



▲ <표 4-3>






해당 년도 기준으로 호주에서의 한국인(한국 태생) 수
·출처: ADIC, 2011; Coughlan, 2008.


1970년대와 1980년대에는, 거의 모든 한국인이 시드니를 통해 호주로 입국한 듯했고 이들의 대부분이 시드니에 정착하였다. 1973년 기준으로 그들 중 73.4%가 시드니에 거주하고 있었다. 1977년에는 66.7%, 1979년에는 65.9%, 1984년에는 79.0%, 그리고 1991년에는 73.5%가 거주하고 있었다.

이미 언급한 것처럼 호주에 사는 한국 태생의 사람들이 74,538명이었고 그중 53.9% 혹은 40,175명은 시드니 메트로폴리탄 지역에서 거주하고 있었다(ABS, 2011). 시드니 지역에 거주하는 한인들의 비율이 이처럼 상당히 감소한 것은 New South Wales 이외의 다른 주로 새로운 이주자들을 분산시키고자 한 정부 정책 때문이었다.

두 번째로, 시드니에 사는 한국인은 호주의 다른 지역에 사는 한국인보다 상대적으로 나이가 많고 시드니 지역에서는 사망률이 더 높게 나타났다. 또한 2001년 ABS 통계는 비교적 나이가 어린 아이들보다 나이가 많은 아이들의 수가 많았으며 이는 출산율의 감소를 의미했다(이경숙, 2008: 174).

김영성(1998: 45-6)은 왜 한국인이 시드니 지역에 집중되어 살게 되었는지에 관한 몇 가지의 원인들을 제시했다. 첫 번째로, 도시생활에 익숙한 한국인은 호주에서 가장 대도시인 시드니에서 규모의 경제와 더 나은 고용 기회를 누릴 수 있었다.

두 번째로, 시드니 지역에는 이미 많은 한국인이 거주하고 있었으며 더 많은 한국인을 끌어들였는데 이는 연쇄 이주 현상에 해당된다.

세 번째로, 많은 수의 한국인으로 인해 존재했던 식당과 같은 에스닉 사업들 그리고 현지 에스닉/언어에 기반한 관광 산업이 성장하면서 더 많은 한국인을 끌어들이기도 했다.

네 번째로, 시드니와 서울 간의 직항이 도입되어 두 도시 간의 항공 여정이 용이하게 되었다. 더 나아가, 시드니에는 많은 한인 사회 네트워크와 우수한 교육 기관이 있다.

시드니에 거주하는 한국인의 공간적 정착은 그들이 호주로 이주해왔을 때 지녔던 그들의 사회 경제적 특징을 반영했다. 사면 이주민들은 Redfern과 같이 낮은 사회경제적 인구가 거주하고 있는 도심지역에서 그들의 삶을 시작하였다. 그들은 점차 자신의 경제적 지위를 개선함에 따라 도심지역으로부터 옮겨 가고자 했다.

중요한 점은 잠재적 한국인 이민자들이 이민 이전에 경험했던 ‘사회경제적 괴리감’의 지속은 시드니에서의 공간적 정착에 있어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는 것이다. 1960년대 후반에 직장에 다닐 뿐만 아니라 시드니 대학교나 시드니 공과대학교, 혹은 전문대학에 다니고 있던 소수의 학생들은 Glebe와 같은 캠퍼스 근처에 살고 있었는데 이는 직장으로의 출퇴근과 학업을 위한 선택이었다.

소수의 학생들은 동남아시아에서 온 새로운 한국인들을 시드니 공항에서 맞이해 주었고 새로 온 이들은 Glebe와 근처의 Redfern에 정착하게 되었다.

사실, ‘260 Charlmers Street, Redfern’은 베트남과 캄보디아에 있는 미군 기지에서 일하다가 1973년에 관광객으로서 호주에 입국한 김동삼의 유명한 거주지였다. 동남아시아에서 이주해 온 이들은 취업 기회, 아파트 구하기, 영주권 신청서 제출 방법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는 시설을 통해 입국하였다(이경숙, 2008: 175).

Redfern 주변에 초기 한국 이주자들의 잠재적 고용주가 될 수 있는 곳으로는 봉제 공장, 신발 제조 공장, 그리고 타이어 공장이 있었다.〠 <계속>


한길수|멜번 모나쉬 대학교, 커뮤니케이션 미디어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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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드니 내 한인 공동체(끝) 새창보기 ㅣ 한길수/크리스찬리뷰2019/06/26
시드니 내 한인 공동체(3) 새창보기 ㅣ 한길수/크리스찬리뷰2019/05/27
시드니 내 한인 공동체(2) 새창보기 ㅣ 한길수/크리스찬리뷰2019/04/29
시드니 내 한인 공동체 새창보기 ㅣ 한길수/크리스찬리뷰2019/0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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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드니 내 한인 공동체(2)

정착, 경제적 적응, 그리고 한국어와 한국 문화의 진흥


한길수/크리스찬리뷰





시드니 내 중심 상업 지역이나 산업 공장들과 가깝거나 혹은 철도역 근처라 접근성이 좋은 도심 지역으로는 Surry Hills, Redfern, Darling-hurst, Marrickville, Summer Hills 그리고 Newtown이 있었다. 이 지역에서의 임대료는 비교적 지불 가능한 수준이었다(김영성, 1998: 46-47).

1976년과 1980년의 사면 이후에, 사면 받은 한국인은 그들의 가족들과 재회하게 되었다. 그들은 임대할 수 있는 저렴한 주택과 상점 그리고 교통이 편리한 장소를 찾아 다녔다. 자녀들의 교육은 거주지의 선택에 있어서 또 하나의 중요한 요인이었다. 많은 한인들이 Campsie, Ashfield 그리고 Canterbury에 정착하기 시작하자 더 많은 한인들을 이 지역으로 끌어들이게 되었다. 이는 원심 주거 이동성에 관한 실례의 시초였다(김영성, 1998: 47-48).

1986년에 Canterbury시에는 Campsie, Belmore, Canterbury 그리고 Lakemba를 아울러 1,000명이 조금 넘는 한국인이 살고 있었다. 새로이 이주해온 한인들은 이미 정착한 친척이나 새로운 지인들 근처 지역에 정착하고자 하였다. 2001년의 경우, Canterbury에 사는 한인들의 수는 3,131명에 도달했고, 이 지역은 시드니 메트로폴리탄 지역 내에서 한인 이주민들이 가장 집중되어 있는 곳이 되었다(이경숙, 2008: 176).

그러나 2006년에는 2,998명으로 감소하였고 이로 인해 Canterbury는 네 번째로 한인들이 가장 많이 살고 있는 지역이 되었다. 이러한 감소의 일부는 호주에 사는 한국인 중 적은 비율이 시드니 지역에 사는 것을 선택했을 뿐만 아니라, Canterbury에 초기에 정착했던 이들이 노령으로 인해 더 높은 사망률을 기록했기 때문에 나타난 것이다.

점차 더 적은 한인들이 Canterbury에 거주하고자 하면서, Canterbury 지역은 신생아의 수가 상대적으로 낮게 나타났다. 덧붙여, 젊은이들이 Canterbury 지역을 떠나 Strathfield, Eastwood 그리고 Chatswood와 같은 지역으로 새로이 옮겨가면서 Canterbury는 인구가 적고 상대적으로 상업 활동이 부진하게 되었다.

2006년 인구조사 자료에 따르면 Hornsby(3,271명)가 한인들이 가장 많은 지역이고 그 뒤로 Parramatta, Ryde, Strathfield, Sydney, Auburn, Baulkham Hills의 순서로 뒤이었다. 지역 내 쇼핑센터 주변에 세워진 고층 아파트들 또한 한인들을 그 지역으로 끌어들이는데 한 몫을 했다(이경숙, 2008: 178).

북 시드니의 한국인 인구가 눈에 띄게 증가한 한 가지 중요한 이유는 Auckland에 살던 많은 한국인 이주자들이 Hornsby, Carlingford, Eastwood 그리고 Deewhy 같은 시드니 북부 지역으로 이동하였기 때문이다. 그들은 지불할 수 있는 가격의 주택, 교통 접근성이 좋고 자녀들을 위해 평판 좋은 고등학교가 있는 장소를 찾아 다녔다(김지환, 2008c: 107).

Parramatta가 현재 주거 지역으로 인기가 많은 이유는 비교적 저렴한 임대료, 평판이 좋은 학교, 그리고 교통수단에 대한 쉬운 접근 때문이다. Parramatta에서 시드니 중앙역까지는 기차로 40분, 급행으로 20-25분이 소요된다.

Ryde는 한국인에게 인기가 많은 또 하나의 지역인데, 특히 학생들과 어린 아이를 둔 가정에게 유독 인기가 많았다. 2001년에는 2,018명의 한국인이, 2006년에는 3,028명의 한국인이 살고 있었다.

이 지역은 기차와 버스를 통해 도시와 편리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아파트의 많은 공급으로 인해 시드니에 있는 대학에 다니고 있는 학생들의 수가 증가하였다.

더 나아가, 이 지역은 Eastwood와 가까웠는데, 여기에는 꽤 규모가 크고 이미 자리를 잡은 한인 소유의 사업체들이 있었다(이경숙, 2008). 2006년 당시에 시드니 시내의 인기와 비슷한 정도로, 2011년 Ryde에 사는 한국인들은 3,035명에 달하였다.





▲ © 한길수





이경숙은 이러한 인기가 다음과 같은 요인들로 인해 나타났다고 제시한다. 한국 출신 유학생들은 도시 중심이나 자신이 다니는 전문대학교 근처에 거주한다. 학업을 마치고 영주권자가 되면, 그들은 자신이 학생이었을 때 지내던 곳에서 계속 머무른다.


나아가, 워킹 홀리데이 비자 소유자, 관광객, 그리고 여타 단기 방문자들 또한 시드니 시내에 머무르고자 한다. 인구조사가 8월 9일에 실시되었다는 점을 고려하자면, 한국 여름 방학 기간 동안 영어를 공부하고자 온 학생들의 수가 상당수 포함되었을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원심 주거 이동의 일환으로, Willoughby, Baulkham Hill, Strathfield 그리고 Canada Bay와 같이 상대적으로 풍요한 시드니 메트로폴리탄 지역에 정착하는 한국인이 증가하였다. 이는 1.5세와 2세대 한인들의 사회경제적 상향 이동의 결과라고 할 수 있다.

Chatswood를 아우르는 Willoughby 지역은 특히나 한인 사업 대표, 어린 자녀를 둔 ‘기러기 엄마’, 그리고 최근에 이주해온 젊은 숙련 이민자들 가정에게 인기가 많았다(이경숙, 2008: 178-9).

시드니 메트로폴리탄 지역에 사는 305명의 한인들을 상대로 지리 조사를 수행한 김영성은 한인 이주자들이 자신들의 경제적 부를 모을수록 더 좋은 거주 환경으로 옮겨가고자함을 발견하였다. 좀 더 비싼 지역으로 이주한 사람들과 덜 비싼 지역으로 이주한 사람들의 비율은 1: 0.83이었다.

더 좋은 생활환경으로 옮겨가는 것은 현재의 거주 지역보다 주택가격의 중간 값이 더 높은 지역에서 주택을 구매하는 것을 의미할 수 있다. 43.3%가 더 비싼 지역으로 옮겨갔고, 27.8%가 비슷한 가격의 지역으로, 그리고 39.8%가 더 저렴한 지역으로 옮겨갔다(김영성, 2006: 509).

요약하자면, 1세대 이민자들, 즉 사면, 숙련/독립 그리고 비즈니스 이민자들은 원심 거주 이동성에 상대적으로 거의 기여한 바가 없는 것처럼 보인다. 1.5세대와 2세대들은 사회적 상향 이동을 성취했고 그들의 부모가 있는 곳에서 더 좋은 생활환경으로 이동하였다.

덧붙여, 최근에 이주해 온 한인 이민자들, 단기 학생 그리고 단기 거주민들은 상대적으로 풍요로운 지역에 정착하였는데 이는 한국에서 자본을 가져왔기 때문이거나 혹은 호주로 이민을 오기 이전에 그곳에서 학생으로서 거주한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이는 1세대가 80년대 후반과 90년대에 한국인 공동체 내에서 한국인들 사이의 ‘사회 경제적 거리감’을 지속하였다는 것을 암시한다. 즉 사면 이주자와 같은 ‘구포(구교포)’와 숙련/독립 그리고 비즈니스 이주민 등과 같은 ‘신포(신교포)’가 있다는 것이다.

이 두 집단은 서로를 향해 비우호적인 발언을 했고 이는 한인 공동체에서 광범위한 집단이 형성되는 것을 반영하고는 했다(Han, 2001: 547).


4.아시아 금융 위기와‘IMF 방랑자’


호주는 80년대와 90년대 동안 점차 경기 침체를 겪게 되었다. 그 기간 동안 호주 정부는 국제 시장의 맥락에서 자국의 경제 활성화를 위해 몇 가지의 경제 개혁을 시행하였다. 그런데 호주 국내 경제는 1997년 아시아 태평양 지역을 강타했던 아시아 금융 위기로부터 거의 영향을 받지 않은 것으로 보였다.

그러나 자국 내 경제적 역경은 시드니 내 한인 공동체에 눈에 띄는 영향을 미쳤다(Seol, 1999). 국제통화기금은 한국 통화가치의 붕괴 이후에 한국 경제를 개혁하기 위한 여러 조치들을 도입했다.

한국인들은 이 같은 과정을 ‘IMF(개입) 위기’라고 부른다(Han and Han, 2010). 한국 경제의 회복을 위해 경제 개혁이 이루어지면서 시드니에 있던 한인 공동체는 심각한 사회 경제적 어려움에 직면하게 되었다. 시드니로 오는 관광객의 유입이 멈추었고 워킹 홀리데이 비자 소유자와 ‘정상적인’ 방문자들이 1997년 이후에 상당히 줄어들었다.

대신에 한인 공동체는 한국에서 새로운 실직자 혹은 파산자 혹은 사회경제적으로 소외된 시민들로 이루어진 임시 이주자들의 강한 존재감을 알아차리게 되었다. 시드니의 한인 이주민들은 이러한 새로운 임시 이주민들을 ‘IMF 방랑자’라고 이름을 붙였다(Han and Han, 2010: 28).

호주로 이주하는 이민자의 수가 급격히 감소한 이후에 그 숫자가 회복되기까지는 10년이 걸렸다. 이 같은 감소는 한인 공동체의 사업 활동에 심각하게 부정적인 영향을 미쳤는데, 이는 상대적으로 규모가 작은 공동체 내에서 비슷한 사업장들 사이에 극심한 경쟁을 유발하였다. 결과적으로 한인 공동체 내에는 많은 사업들의 폐업과 임금 수준의 하락이 관찰되었다.

기존 주민들과 임시 이주자들 사이에 갈등이 일었던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Han and Han, 2010: 28). 지금까지 호주로 이주한 한국인 중 가장 많은 수인 4,255명이 영주권자로 호주에 정착한 것은 2006-7년 회계 연도 중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최근 들어 영구 정착민의 수가 증가하고 있다고 한다. 2009-10년도에는 4,350명, 20100-11년에는 4,326명, 2011-12년에는 4,874명, 그리고 2012-13년에는 5,258명이었다. 반면에, 한국 사회가 점차 풍요로워지면서 최근 몇 년간 해외에 있는 한인들의 귀환 이주를 상당히 촉진하였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2011년에는 그 수가 4,257명에 달하였다. 2,122명은 미국으로부터 귀환했고, 693명은 캐나다, 629명은 중앙 그리고 남부 아메리카, 115명은 뉴질랜드로부터, 67명은 호주로부터 그리고 631명은 여타 다른 국가들로부터 귀환하였다.


5.경제적 적응


1) 사면 이주자

영어를 사용하지 않는 다른 이주민들과 마찬가지로, 한국인 이주민들 또한 이주 이전에 가지고 있던 자격 조건들을 활용할 수 없었는데, 이는 종종 이주민의 부족한 영어 실력으로 인해 고용주들이 자격 조건들을 인정하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한국인들은 일반적으로 자신들의 자격 조건과 상응하는 직업에 종사하지 않았다(Castles and Miller, 1993: 109). 한국 남성들이 과거 그리고 현재에 종사했던 유형의 직업은 호주에 입국한 방식 그리고 호주에 입국한 시기와 밀접한 연관이 있다.

호주 경제가 상대적으로 건실했던 1970년대에 도착한 후 사면된 이주 노동자들은 공장 작업, 용접, 세차, 식기 세척, 청소, 트럭 운전, 배달 및 광업과 같은 일반적으로 육체노동에 종사하였다.

필자의 다른 연구(Han and Chesters, 2001)에 참여했던 응답자들에 따르면 한인 사면 이주자들은 배터리 생산, 타이어 제조, 철 정제 및 플라스틱 용기 생산 공장에서 일자리를 구하는데 문제가 없었다고 한다. 모든 사면 이주자들은 그들의 교육 수준과 영어 실력과 무관하게 가능한 어떤 일이든 할 준비가 되어있었다(Han, 1999b: 11).

마취 기술, 법학 학위, 그리고 전기 공학 기술 등과 같은 전문적 훈련을 받은 한인들은 자신들의 전문적 훈련을 호주에서의 직업에 전혀 사용하지 못했다(Iredale, 1988). ‘곧 사면을 받고자 하는 이주자’들이 호주에 ‘관광객’으로 도착하자마자 호주 기업들은 이들을 ‘낚아채’듯이 고용했다.

사면 이주자들은 일반적으로 기술을 상대적으로 빨리 습득할 수 있고 그들이 ‘좋은’ 급여를 받을 수 있는 직종에 집중되었다. 번영하는 경제 환경 하에서, 1970년대에 한인들은 급여를 더 많이 받을 수 있는 직종으로 전직하였다. 인기가 많은 직종은 장시간 동안 일할 수 있거나 두 개 이상의 상근직을 가질 수 있었던 용접, 청소 그리고 여타 공사 관련 직업이었다. 용접공들에 대한 수요가 높았을 때 기업들은 잠재적 노동자들에게 기술을 배우도록 돈을 지불했다(Han, 1999b: 12).

많은 한국인들은 때로 용접을 위해 함께 이동하기도 했다. Newcastle에 있는 캐나다 정제 회사는 한 때 70명의 한인 용접공들을 고용하였고, B.H.P. [Broken Hill Proprietary, Ltd.]는 180명의 한인 용접공들을 고용하였다. 나는 하루에 12시간을 일했고 매주 일요일에는 쉬었다. (심무호, Paraguay에서 온 사면 이주자)

1970년대 한인들이 입국하기 전에 이탈리아인과 독일인과 같은 비 영국인 이민자들은 보통 ‘더럽고, 어렵고, 굴욕적인’ 직업을 가졌다. 1970년대 이후, 그러한 일자리는 한인들에게 ‘이양’ 되었으며, 이는 에스닉 집단과 그들이 도착한 시기에 따른 노동 시장에서의 분업을 반영한다.

대부분의 사면 이주자들과 동두천에서 온 사람들은 호주에 도착했을 당시 40대였다. 그들은 청소나 기타 육체 노동을 통해 임금노동자로서의 일을 시작하여 작은 자본을 축적하였고 이후에는 청소사업 계약을 따내어 소 자본가로 변신하였다. 그리고 더 많은 돈을 저축하자 더 많은 청소 계약을 따내기 위해 재투자하였다. 한인 청소부들이 청소업계에서 명성을 얻게 되면서 이들은 청소 ‘권리’를 획득했다. 새롭게 획득한 권리가 시간이 지나면서, 자리를 잡아가면서 새롭게 이주해온 한인들이나 청소 산업에 진출하기를 원하는 사람들에게 팔 준비가 되었다.

전문직의 자격을 충족하지 않거나 자격을 인정받지 못한 사람들이 보상받을 수 있는 방법은 그들이 장시간 근무하여 고소득을 버는 것으로 이런 방식으로 한인들은 호주인 평균 소득의 두 배 이상을 벌기도 했다.

이들 중 상당수는 용접공이나 목수 등과 같은 노동자 혹은 반숙련 노동자로 남아있었으나 또 다른 상당수는 영세 사업을 운영하는 것으로 바꾸기도 하였는데 이는 상당한 성취인 것으로 여겨졌다(이경숙, 2008: 188; Collins and Shin, 2012).

계층 이동 사다리를 오르기 위한 다른 특별한 방법은 없는 것처럼 보였다. 사면 이주자들이 수년간의 노동 경험과 수년간 습득해온 기술을 지닌 채 호주에 입국했다는 사실에 주목해야할 필요가 있는데(Han, 2000b), 이는 숙련 이주민 그리고 비즈니스 이주민과는 구별되는 지점이기도 하다.

호주에서 일하는 초기 기간 동안 그들은 전반적으로 호주 사회에 대한 이해가 깊어졌고, 또 어느 정도 호주에서 사업 활동이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를 더 많이 알게 되었다. 그들은 또한 호주에서 사업을 시작할 수 있는 약간의 자금을 지니고 있었는데, 당시는 1980년대 후반과 90년대에 비해 경제적으로 유리한 시기였다.

몇몇의 사면 이주자들은 한국 식료품 가게, 식당, 관광 대행사 그리고 건설 회사를 시작하였다. 건설 회사들은 종종 한인이 아닌 이들이 소유한 기업의 하청업체였다.

1970년대 말까지 시드니에는 한인이 소유한 사업이 20개 미만이었다. 그러나 1986년에는 등록된 한인 소유 사업이 250개로 증가했다(백시현, 1990: 25). 시드니에 있는 한인 소유 사업들은 주로 한인들을 자신들의 주요 고객으로 다루어왔다.

Inglis와 Wu(1992: 207)는 취업 중인 이주민들의 대다수는 고용주라기보다는 피고용인이라는 점을 발견했다. 그러나 매우 예외적으로 한인 이주민 중 상당히 높은 비율이 자영업자이다. Inglis와 Wu(1992: 207)에 따르면, ‘그들 중 몇몇은 의심할 여지없이 비즈니스 이주 프로그램의 초기에 이주해왔으나, 많은 다른 이들은 명백히 기타 진입 범주 하에 입국하였고, 그리고 이후에 자영업에 종사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Inglis와 Wu(1992: 207)의 이러한 연구결과는 비즈니스 이민으로 호주에 온 한인이 전체적으로 약 40명에 불과했던 1986년 인구 총 조사에 기초한 것이다. 따라서 ‘기타 입국 범주’들은 사면 이주민에 해당할 것이다(Kim, 1995: 55).

작은 사업을 위한 종자돈을 마련하기 위해 빈번히 사용했던 방식은 계(契)였다. 자조집단 회원들은 계주를 중심으로 모이고 회원들은 매달 일정 액수의 금액을 납부한다. 집단의 회원 한 명이 다른 회원들로부터 모든 돈을 받고 이후에 다른 사람들이 그들의 몫을 돌려받을 때까지 이 돈을 갚는다.

계는 특별한 목적을 위해 ‘뭉치’돈을 모으고자 할 때 사용되는 전통적인 방식이며 계의 성공은 구성원들 간의 완전한 믿음이 있어야만 가능하다. 사면 이주자들과 같이 삶의 경험을 공유한 사람들은 기꺼이 서로를 신뢰하고자 하고 계에 참여하고자 했었을 것이다.

시드니의 한국인 공동체는 1980년대 중반부터 숙련 이주민의 이주, 가족 재회, 그리고 비즈니스 이주자들의 등장과 함께 그 규모가 커지기 시작했다. 더욱이 호주를 방문하는 한국인 관광객의 수가 크게 증가했다.

1970년부터 현재까지 가장 인기가 많은 사업은 식당, 식료품, 건강 식품 가게, 관광 대행사, 기념품점, 그리고 미용실이다(Han, 1999b: 14). 이경숙(2008: 180)은 한국 경제의 성장에 따른 한국인 여행자의 증가로 인해 이러한 사업 종목이 주로 증가하였다고 밝혔다. 한국 경제가 침체할 때는 그러한 사업들이 부진했다.

시드니에 있는 한인 공동체 내에서는 잘 알려진 사업가들의 성공담이 존재한다. 청소부로 시작한 사면 이주자 중의 하나는 한 때 600명의 사람들이 고용된 청소 업체를 운영했다. 또 다른 사면 이주자는 용접공으로 시작하였으나 이후에 꽤 큰 철강 회사를 운영하였다.

또한 정병률 씨는 고등학교 졸업 이후 이란에서 트레일러 운전수로 일을 하기 위해 이주하였다. 그는 1976년에 호주에 입국하였고 이민부처로부터 호주를 떠나라는 통지를 받았으나 1980년 사면 이후에 정착하게 되었다. 그는 용접 기술을 배워 장시간을 일하면서 7년 동안 주당 1,000달러를 벌었다.

그는 시드니에서 2에이커의 땅을 샀고 용접 작업을 계속하면서 다양한 한국산 야채를 심었다. 2년 만에 그는 16에이커의 땅을 매입하였고 더 다양한 한국 채소들을 기르기 위해 땅을 개발하였다.

그의 농장은 1992년에 32에이커에 달하였는데, NSW주에서 가장 큰 아시안 야채 생산 농장이었다. 그의 소득은 호주달러로 연간 10만 달러를 넘는 수준이었다(김정심, 1992: 435).〠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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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드니 내 한인 공동체(3)

정착, 경제적 적응, 그리고 한국어와 한국 문화의 진흥


한길수/크리스찬리뷰





의심의 여지없이 정 씨의 근면한 노동과 신중한 전력이 기여 요인이 되었으나, 비교적으로 호황이었던 호주의 경제상황이 아니었다면 어려웠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성공담들은 물론 한인 공동체뿐만 아니라 호주 전체에서도 매우 예외적이고 드문 사례라고 할 수 있다.



2) 숙련 기술 이주민
독립이민과 숙련 기술이민을 통해 입국한 한인 이주자들은 한국에서 혹은 호주로 이주하기 이전에 교육을 잘 받았으며 전문적인 직업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호주에서 이들 중 대다수는 전문직에 종사하지 않았고 호주 이주의 선발에 기준이 되었던 기술을 활용하지 않았다.

한인 숙련 기술 이주자 중 10-20% 미만이 전문적인 직업을 가지고 있었다(Han, 1999b: 15). 이러한 연구 결과와 일치하는 것으로 Inglis와 Wu(1992: 207)는 자신들의 연구 시기에 한인 공동체 내에서 숙련 기술/독립 이주민의 비율이 높게 나타남에도 불구하고 한인을 제외한 여타 남성 이주자들이 전체 신규 이주민들보다 관리직, 전문직, 그리고 준 전문직에 종사하는 비율이 높다고 보고하였다.

Inglis와 Wu(1992)는 또한 다른 에스닉 집단과 비교해봤을 때, 한인 남성과 여성들이 공장 기계공/노동자로 고용되는 경향이 더 크다고 보고하였다. 필자는 이들 중 높은 비율이 숙련 기술/독립/가족 재회 이주자들로 구성되어 있다고 본다(Han, 1999a; Han and Han, 2010; Min, 1984).

필자는 숙련 기술 이주자의 노동 참여율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친 몇 가지 요인을 제시하고자 한다. 사면 이주자들이 육체적 노동을 수행하도록 준비되어 있던 반면에, 숙련 노동자들은 그렇지 않았다. 그 이유는 그들은 교육을 잘 받았고 전문적 직업을 가지고 있었으며 호주 이민 담당 공무원에 의해 ‘선별’되었기 때문이었다. 구조적으로 깊이 뿌리내려져 있는 차별적 문화와 숙련/기술 이민자들의 높은 열망은 사면 이주자들보다 숙련 이주자들의 노동 참여에 부정적으로 영향을 미쳤다(Han, 1999b: 15).

더 나아가, 1980년대의 경제 불황이 심화되면서 이들의 부족한 영어 능력은 직업을 찾거나 해외에서 취득한 자격을 호주에서 인정받는 과정에 있어서 불리하게 작용하였다(Laurence, 1986; Inglis and Philps, 1995). Birrell과 Hawthorne(1997)은 1980년대 중반부터 이주해온 숙련 이주민들이 그 전에 이주해온 이주민들, 예컨대 사면 이주자들보다도 적절한 일자리를 찾는데 덜 성공적이었다고 보고한 바 있다. 이는 한국에서 온 숙련 이주민의 대부분에게도 해당되는 일이었다(Han, 2000b: 94).

필자의 선행 연구에서 밝혔듯이 대부분의 숙련 이주자들은 성인을 위한 영어 수업을 6개월 혹은 그 이상 수강하는 것이 그들로 하여금 실용 영어를 습득하거나 직장에서 동료들과 어울릴 수 있도록 하지 못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는데, 이는 그리 놀랍지 않은 일이었다(Han, 1999a). 사실상 숙련 이주자들이 적절한 직업을 찾을 수 있게 하는 다른 지원은 없다(Duivenvoorden, 1997). 적은 수의 숙련 이주자들만이 그들의 전문지식에 관련한 직업을 찾는 기쁨을 누렸지만 그 기쁨은 오래 가지 않았다.

그러한 이유 중의 하나는 영어 능력의 부족이었다. 자신의 전문 분야에서 일자리를 찾은 숙련된 이주자들 사이에서는 성공의 정도가 다양하다. 혼자서 일하기를 거부하고 주어진 과제가 무엇인지에 대해 기꺼이 질문하는 사람들은 잘 어울리는 편이다.

반면 고립되어 있고 질문을 ‘잘 묻지 않는’ 사람들은 업무 수행 성과가 좋기 어렵고 그들은 한 조직에서 일하는데 있어 어려움에 처하게 된다. 직장에서 중요한 것은 효율성과 생산성이기 때문에 이러한 해석은 납득할 만하다(Han, 1999b: 16).

1990년대 초반에 이주해온 컴퓨터 기술 숙련 이주자 130명 중에서 약 30%가 90년대 중반에 컴퓨터 관련 전문직에서 근로하고 있었다. 나머지는 청소와 같은 ‘단순’ 노동에 관여하고 있었고 적은 수는 배관 작업, 한국 식료품 가게, 한국 식당 등과 같은 영세사업을 운영하고 있었다.

이러한 관찰 결과는 Birrell과 Hawthorne(1997)의 연구 결과와 놀라울 만큼 차이가 났는데, 이들은 비영어권 출신 컴퓨터 전문가들이 중국이나 필리핀과 같이 불리한 송출국에서 이주해왔음에도 불구하고 이주 후 곧 짧은 기간 내에 성공할 수 있었다고 밝혔다(Han, 1999b: 18). 언어와 문화를 제외하고 한국 숙련 이주자들에게는 효율적으로 일을 수행하고 조직 내에서 구성원으로 인정받기 위해 극복해야 할 장애물이 많았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어려움은 결코 극복하기 쉽지 않으며 한국 이주민에 국한되는 것도 아니다. 예컨대, 많은 수의 교사들이 호주로 이주해왔으나, 비영어권 출신의 교사들이 교직에서 일하는 숫자는 매우 적은 숫자로 나타나고 있다. 교사로 일을 하고 있는 이민자들은 ‘호주인’ 경쟁자들보다 훨씬 더 자격을 갖춘 사람들임에도 불구하고 교직을 구하는데 어려움을 겪는다(Inglis and Philps, 1995).

필자는 한인 숙련 이주자들이 직면하고 있는 많은 어려움 가운데에서도 특히 제한된 영어 실력이 작업 능력을 약화했다고 제시한 바 있다(Laurence, 1986). 이주자로서의 삶을 위해 소득을 벌어야한다는 압박감은 그들로 하여금 영어 실력을 더 향상시킬 수 있는 기회를 박탈한다. 그러는 동안, 그들의 실력은 시대를 따라가지 못하여 구식이 되고, 이는 그들의 자존감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며 그들이 전문직으로 돌아갈 수 있는 기회로부터 더 멀어지게 만든다.

이는 한국에서 비교적 재정적으로 부유하고 호주에서 전문직업을 통해 경제적인 풍요 이상의 것을 얻을 것이라고 기대한 숙련 이주자들에게는 실망스러운 일이다. 대신에 그들은 육체적으로 힘들고 긴 근무 시간을 요하는 ‘단순’ 노동이나 영세 사업에 의존하고 있다. 이민 생활 초기에는 품위 있고 질 좋은 생활이 중요했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경제적 필요를 충족하는 것이 더욱 중요하게 느껴졌다(Han, 2000b: 100-1).

시드니 한인 공동체의 두 명의 한인 저널리스트들에 따르면, 90년대 중반에, 한인 노동 인구의 50%가 육체노동, 청소, 건설현장 일용직, 혹은 상거래에 관여했었을 것이라고 한다.

또한 한국인들은 그러한 ‘단순 노동’에 관여하는 것에 대하여 문화적으로 부끄러워하는 경향이 있었다고 한다. 1991년 인구조사에 의하면(BIMPR, 1995: 22), ‘한국 출생 남성들은 육체노동자와 이와 관련된 노동자(24.9%), 그리고 상인(21.9%)으로 고용될 가능성이 더 높았다’고 한다.

1996년 인구조사에 따르면 호주에서 한국 출생 인구의 실업률은 12.7%를 기록했다고 하는데, 이는 호주의 국가적 평균수치인 9.1%보다도 훨씬 높은 수준이었다(Coughlan, 2008: 55). 1990년대의 인구 총 조사의 시점과 사면 이주자의 상당 부분이 영세사업 소유주, 무역업자 또는 은퇴자인 점을 고려할 때 위의 통계 수치에는 상당수의 숙련 이주자가 포함되었을 수 있다.

숙련 이주자들은 육체노동 혹은 영세 사업에 관여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았는데 그런 직업들은 상대적으로 적은 초기 자본금이 요구되었을 것이다. 김용호(Kim, 1995)의 조사 역시 사면 이주자가 숙련 이주자 그리고 비즈니스 이주자에 비해 영세 사업에 관여했을 가능성이 더 높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3) 비즈니스 이주자: 사업자에서 ‘스포츠 장기 휴가객’으로



시드니 한인회의 이배근 전 회장은 1995년까지 약 400명의 이주자들이 호주에 도착했으며 그들 중 어느 누구도 ‘상당한 규모의 사업’을 운영하지 않았다고 본인에게 말해준 바 있다(Han, 1996: 83). 이민 자문관, 필자의 연구 정보원, 그리고 비즈니스 이주민 응답자들에 의하면, 대략 한인 비즈니스 이주민의 10%가 한국으로 귀국하였고, 다른 10%가 사업을 운영하고 가족이 호주에 머무르는 동안 한국과 호주를 오갔으며, 30%가 호주에서 사업을 운영하고, 50%가 골프나 낚시와 같은 스포츠를 하거나, 혹은 엄밀히 말하자면 무직 상태에 있었다.

그들이 사업에 관여하지 못했던 일반적인 이유로는 영어 실력의 부족함, 호주 사회에 대한 이해의 부족, 그리고 높은 임금을 들 수 있다.

특히 마지막으로 더욱 까다로운 조건으로 작용한 것이 있는데, 한국에서는 값싸고 훈련된 노동력에 쉽게 접근할 수 있었지만 호주에서의 사정은 전혀 다르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사업을 설립하고 운영하는데 필요한 신뢰할 만한 정보 자원을 찾을 수 없었다. 한국에서 자산의 일부를 처분한 후에 1980년대 후반에 이주해온 비즈니스 이주자들은 약 35만 불을, 1990년대의 비즈니스 이주자들은 최소 65만 불을 기본 요건으로 구비하여야 했다(Han, 1996: 82).

따라서 사업 설립에 필요한 금액의 하한에 거의 가까운 금액을 가져온 이들에게는 사업을 시작하는데 충분한 자본을 갖추고 있지 않았을 것이다.

비즈니스 이주자들은 사업과 이민자 삶 전반에 관한 정보를 자유로이 공유할 수 있는 그들만의 동호회를 유지하곤 했었다. 사업 실패와 상당한 자본 손실에 대한 실제 경험은 그들로 하여금 새로운 사회 경제적인 맥락에서 새로운 사업을 시작하는 것을 꺼리게 했다.

한인 비즈니스 이주자들은 보통 50대 후반이거나 혹은 그보다 나이가 더 많았기 때문에 호주에서 소득을 벌어들일 수 있다는 보장이 없는 이상 ‘돈 없이 외국에서 사는 것은 비참할 것이기 때문에 그냥 가지고 있는 것을 고수하는 것이 더 나을 것’이라고 생각했다(Han, 1999b: 24). 필자의 연구에 참여한 비즈니스 이주자 응답자들은 새로운 사업을 시작하기까지는 적어도 5년이 걸릴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결국 그들이 사업을 시작하지 않는 경우가 더 많았다. 그들의 관점에서는 몇 가지의 정당한 이유가 있었다. 한국에서 ‘큰’ 사업을 운영하는 이들은 호주에서 ‘작은’ 사업을 운영하는 것이 그럴만한 가치가 없었다고 생각했다.

또한 그들의 자존감과 은행 잔고에 의존하는 생활은 그들로 하여금 육체 노동을 찾는 것을 가로막았다. 다른 사람들은 그들이 충분히 나이가 들었고 ‘은퇴’할 만하다고 생각했다(Han, 1999b: 24).

호주에서 사업을 운영했거나 노동일과 같은 다른 직업에 종사했던 비즈니스 이주자들은 1989년 이후에 이주해 왔기보다 1987년이나 1988년에 이주해온 사람들일 가능성이 높다. 그들은 대개 연령대가 낮았고 자녀들이 학교에 가거나 대학교를 다니고 있는 경우가 많았다.

이는 비즈니스 이주에 필요한 공식적 금액이 1987-88년에 35만 불에서 1989년과 그 이후에는 65만 불로 증가했기 때문이다. 1987-88년에 이주해온 이들은 더 적은 자본을 가지고 있었고 이는 새로운 장소에 빠르게 적응하는 촉매제로 작용하게 되었다. 비즈니스 이주자들은 한국에서 가져온 자본 덕분에 사업을 시작할 수 있는 유리한 점을 좀 더 갖추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전반적인 생활 방식과 직장에서 정착하게 된 방식은 숙련 이주자들과 비슷한 것처럼 보였다(Han, 1999b: 24).

몇몇 비즈니스 이주자들은 한국에서 자본을 좀 남겨두고 사업을 운영하고 있었는데 이는 그들에게 중요한 소득 원천이 되었다(Han, 1999b: 26). 마지막으로 상당한 비율의 비즈니스 이주자들은 무직 상태였고 비즈니스 이주자만의 독점적인 협회를 통해 ‘호주는 돈을 벌기 위한 장소가 아니라 소비하기 위한 장소’라는 생각을 고취시켰다. 이들은 주로 서로와 함께 골프를 치며 지내곤 한다.



4) 시드니에 있는 한인 공동체 내 영세 사업

한국인 이주자의 수가 증가하면서 한인 사업 활동이 한인 공동체 내에서 활발해지기 시작했다. 한인 공동체 내 사업 활동은 많은 한인 이민자들에게 중요한 소득 원천이 되어왔다.

1970년대 말에는 한인 소유의 사업체가 20개 미만이었지만 1986년에는 250개로 증가하였다(백시현, 1990: 25). 그 수치는 1990년에는 400으로, 1997년에는 1,300으로 증가하였다. 사업체 수와 더불어 사업 종류도 1992년에는 62개에서 1997년에 101개로 증가하였다(이경숙, 2008: 180).

시드니 CBD, Parramatta, 그리고 Chatswood에 있는 한인 소유 사업체들은 한인 고객들뿐만 아니라 한인이 아닌 고객들 또한 확보하였다. 그러나 Campsie, Strathfield, 그리고 Eastwood에 있는 한인 소유 사업체들은 주로 한인 고객들을 대상으로 하며 사업들 간의 경쟁 또한 위에서 언급한 세 지역들에서 보다 치열하다.

호주동아의 2004년 공동체 조사(이경숙, 2008: 180에서 재인용)에 따르면 가장 인기가 많은 사업 10개 종류는 식당(87), 미용실(56), 식료품 가게(55), 건강식품(51), 이주 대행사41), 의류(39), 약초(35), 해외유학 대행사(34), 회계사(34), 그리고 여행 대행사(31)였다. 이 중 몇몇의 사업체들은 한국인 여행객 혹은 한국에 있는 잠재적 이주민 혹은 학생들에 크게 의존하였다.

이경숙(2008)은 그러한 종류의 사업이 번영하기 시작하면 비슷한 업종들이 짧은 시간 안에 우후죽순처럼 늘어나며 이 같은 치열한 경쟁은 특히 공동체의 경제적 상황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치게 된다고 지적한 바 있다.

Campsie지역에 있는 한인 소유의 사업체들은 베트남을 통해 이주한 사면 이민자들과 1970년대 중후반 이들과 결합하기 위해 이주한 가족들에 의해 설립되기 시작하였다. Campsie 지역은 다양한 종류의 많은 수의 사업체들로 ‘코리아타운’의 이미지를 유지하고 있는데 Strathfield와 Eastwood는 한인 소유의 사업체들을 지속적으로 끌어모으고 있다.

Eastwood는 1984년부터 한인 소유 사업체들을 끌어들이기 시작했는데 신발 수선 가게가 가장 처음 설립되었고, 그 이후 1987년에 식료품 가게가 들어섰다. 경제적으로 부유한 한인 이주자들은 특히 자녀들의 교육을 목적으로 Eastwood에 정착하기 시작했다.

2008년에 당시에는 8개의 사립 코칭 스쿨이 있었다 (이경숙, 2008: 180). 한인 유학생들과 그들의 가족은 Strathfield에 있는 한인 사업체의 주 고객을 이룬다. 이들 고객들은 한국적 생활방식, 헤어스타일, 패션을 유지하고자 하며 이는 특히 미용실, 의류점, 식당 그리고 식료품 가게의 설립으로 이어지게 한다.

또 중요했던 사업은 비디오 대여점이었는데 이는 1990년대에 한국 TV 시리즈와 영화를 공급하던 곳이었다. Kings Cross와 Bondi Junction 또한 중요한 한인 사업 지역으로 발전하였다. 1980년대 후반에 한인 소유의 Capital Hotel 개업 이래로 식당과 기념품점과 같은 사업들이 뒤따라 생겨났다. 영어를 배우는 많은 학생들이 Bondi Junction에 있는 한인 소유 사업체의 주 고객을 이루었다.

2011년 ABS 조사에 따르면, 교외 지역에는 1,666명의 한국 태생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고 한다. Chatswood에 있는 한인 사업들은 특히 숙련/비즈니스 이주자, 외교관, 한국 기업에 의해 파견된 노동자들을 유인하였다. 마지막으로 Parramatta는 최근 들어 한인 이주자들에게 가장 인기가 많은 거주 지역이 되었고 이 지역에서의 사업체들이 지속적으로 번영하고 있다(이경숙, 2008: 184-6).


6. 한국어, 한국 예술과 한국 문화의 보전


한국 문화와 전통을 유지하는 것은 한인 이민자가 자신의 에스닉 정체성을 지키기 위한 노력의 일환이라고 할 수 있다. 자신의 정체성을 유지하는 것은 자신이 한인 공동체 내에서 모국의 문화를 공유하는 내집단의 구성원임을 확인시켜준다.

이는 또한 나머지 호주 인구와 상호작용하면서 그들이 외집단의 구성원들과 자신을 구분하는 방식이기도 하다. 이 장에서는 한인 이민자가 젊은 세대에게 한국어를 가르치고 한국 예술과 문화를 진흥시키는 방식에 대하여 논의하고자 한다.

대체로 시드니에서는 한국어를 가르치고 홍보하는 다섯 가지 방법이 있다.

(1) 대학교 학과를 통한 방법, (2) 정부가 운영하는 고등학교 졸업증서를 위해 학생들을 준비시키는 토요일 한국어 학교를 통한 방법, (3) 초등학교에서 한국어를 제 2언어로 배우는 방법, (4) 교회나 절 같은 종교 조직 내에서 한국어를 가르치는 방법, 그리고 (5) Linfield 한국 학교 혹은 호주한국 학교와 같은 독립 학교를 통한 방법이다.

한글, 한국 문화 그리고 역사를 가르치는 것은 한인 공동체 내에서부터 시작되었는데, 이는 한인 이민자들이 다음 세대에 이를 가르치는 것이 중요하다고 여겼기 때문이다(김인기, 2008b: 234). 김인기는 한국 정부 지원의 교육 센터가 한국어 교육과 학습이 효율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도록 시드니에 있는 한국 영사관 내에 설립되었다고 언급하였다.

그러나 센터는 어떤 종류의 조직적인 지원도 거의 받지 못했다. 한인 공동체 내에서의 이런 교육에 대한 노력은 다양한 교육 프로그램에 참여하는 아이들을 둔 한국 이민자들에 의해 재정적으로 지원 받고 있다. 다음은 몇 가지 성공적인 한국어 교육 노력에 대한 소개이다.

첫 번째로, 시드니 한인 학교는 176 Redfern Street, Redfern에서 1978년 11월 13일에 시작하였다. 개교식에 참석한 하객들로는 시드니 한국 영사관, 서울에서 온 두 명의 교회 목사, 그리고 시드니 한인 연합교회의 김상우 목사가 있었다. 처음에 학생들은 화요일과 목요일마다 학교에 참석하였고 이후에는 학생들의 일상적인 학업 부담으로 인해 주말로 변경되었다.

시드니한인학교와 시드니 내 한인사회는 1979년 Sydney Town Hall에서 삼일절 기념식을 공동 주최하였다. 기념식은 ‘한국인의 밤’을 포함했는데 이중창, 독창, 춤, 그리고 시 낭송 등의 공연이 진행되었다. Town Hall의 좌석들은 만석이었다. 시드니한인학교는 계속 성장하였고 가장 많은 학생 수는 120명에 달하였다.

학교는 84 Redfern Street, Redfern에 있는 더 넓은 부지로 옮겼고 1985년에는 또 다시 141 Lawson Street, Redfern에 있는 부지로 이동하였다. 후자는 박상규에 의해 기부되었는데 그는 학교의 교감 선생님이자 청소 용역업체를 운영하고 건물을 매입하기 위해 소득을 벌었다고 한다. 부모들은 카풀을 통해 학생들의 통학을 제공했고, 학교 운영비는 한국 정부와 학교 간부들이 부담했다(김인기, 2008b: 235).

시드니한인학교는 또한 한국어 말하기 대회를 주최하였는데, 이는 한국어와 ‘한국의 민족정신’을 홍보하기 위한 목적에서 이루어졌다. 학교는 한인 이주민, 외교관 그리고 한국 기업의 임시 거주민의 자녀들이자 1.5 및 2세대 한인들에게 한국어를 가르치는데 유일하게 적절한 장소였다.

그러나 학생 수가 급격하게 감소하면서 학교의 역할 역시 줄어들었는데 결국 2004년 12월에 폐교하였다. 이는 많은 한인 교회들이 그들만의 한글학교를 운영하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사실, 한인 교회는 호주 내 한인 공동체에서 한국어와 한국 문화를 유지하는데 가장 중요한 영향을 끼쳐왔다(Han, 1994).

두 번째로, Linfield ‘한국 학교’와 ‘호주 한국 학교’는 독립적 학교들이었다. 한인 이주민들과 대한 상공 회의소는 1993년 5월 1일에 Linfield 학교를 처음 설립하였다. 처음에는 Linfield 초등학교에서 매주 토요일마다 교육이 이루어졌다. 그러다가 이후 1997년 4월에 Turramurra 초등학교로 장소를 옮겼다.

이 학교는 한국에서 사용하는 교육과정, 교과서, 그리고 보충 자료를 각 학년마다 사용한다. 이는 미래에 한국으로 귀국했을 때 학교에서의 적응을 촉진시키기 위함이었다. 이 교육 과정은 또한 한인 이민자 자녀들로 하여금 한국어와 한국 문화를 높은 수준으로 학습하게끔 만든다.

이들이 토요일 하루에 학습하는 분량은 한국에 있는 학교에서 학생들이 일 주일 동안 배우는 학습량의 수준이다. 2008년을 기준으로 25명의 교사와 280명의 학생들이 있었으며 유치원에서 12살까지 13개의 다른 학년으로 이루어져있다. 학습 과목은 한국어, 수학, 사회, 한국사, 지리학, 음악 그리고 중국어였다.

그러나 신기현 박사(UNSW 한국어학과 교수)는 이 학교 교장으로서 교육 과정을 조정했고 임시 거주 학생들과 영주권 취득 학생들의 교육 과정을 구별하였다. 학생들의 과외 활동은 한국 문화와 긴밀한 연관이 있는 춤, 음악 밴드 그리고 오케스트라를 포함한다. 학교 교사들은 대부분 한국에서 몇 년간 가르친 경험이 있었다. 학부모 협의회는 학교 근처에 매점을 운영하기도 하였다(김인기, 2008b: 240).

1991년에 NSW 교육부가 한국어를 중학교와 고등학교 교육과정에 포함할 중요한 외국어 중의 하나로 채택하면서 호주 한국학교는 1992년 9월에 설립되었다. 시드니 한국 영사관, 한국 교육 센터, 그리고 시드니 한인 사회는 이 학교 설립을 지원하였다. 학교는 본래 Belmore에서 개교하였고 현재는 Pennant Hills High School에서 교육이 이루어지고 있다.

학교의 핵심 목표는 한국어, 한국사, 한국 문화 그리고 중국어를 가르침으로써 ‘자랑스러운 한국계 호주인’을 양산하는 것이다. 학생은 유치원에서 고등학교, 그리고 대학교 학생까지 다양하며, 학생의 한국어 능력 수준에 따라 8개의 다른 분반에서 공부를 하게 된다.

또한 여러 가지의 교외활동도 존재하는데 창의적 글쓰기, 전통 스포츠, 한국 전통 노래 부르기, 그리고 전통 악기 연주 등이 있다(김인기, 2008b: 242).

세 번째로 Saturday School of Community Languages는 특히 중요한데 학생들(9학년에서 12학년)로 하여금 대학교 입학시험인 HSC(High School Certificate)를 준비할 수 있도록 하기 때문이다.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한국어는 1992년에 HSC 과목 중 하나로 채택되었고 첫 코호트(cohort)가 한국어 시험을 1994년에 치렀으며 대학 공부를 1995년에 시작하였다.〠 <계속>


한길수|멜번 모나쉬 대학교, 커뮤니케이션 미디어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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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드니 내 한인 공동체(끝)

정착, 경제적 적응, 그리고 한국어와 한국 문화의 진흥


한길수/크리스찬리뷰





대학교 입학시험의 일환으로 한국어를 선정한 것은 한반도 이외의 지역에서는 처음 있는 일이었다.

시드니 지역에서는 4개의 다른 학교에서 학습이 이루어진다.

Chatswood High School(12개 수업), Rand- wick North High (2개 수업), Dulwich High (5개 수업), & Grantham High (4개 수업) (김인기, 2008b: 242-3). NSW의 교육 과정의 일환으로 한국어 교육을 포함시킨 이후, 많은 초등학교와 중학교 역시 한국어를 교육 과정 일환으로 채택하였다.

2013년 12월에는 14개의 초등학교와 15개의 고등학교가 한국어를 가르쳤다. 몇몇의 학생들은 대학 공부를 하는 동안에도 한국어와 문화에 대한 관심을 지속하기도 하였다.

호주 정부는 한국어를 중국어, 일본어, 인도네시아어, 힌디어와 함께 5대 아시아 언어 중 하나로 지명했다. 시드니에서 한국어를 가르치는 데 있어서는 성공적인 결과를 내기 위한 공동의 노력이 있었다.

첫 번째로 한인 학교 협의회는 위에서 언급한 ‘한인 학교’의 연합회이다. 이 연합회는 한국 정부의 지원을 받는 시드니 내 한국어 교육 센터와 긴밀히 협력하는데 한국 정부로부터 학교의 연구 교과서와 적당한 재정적 지원을 받는 측면에서 그러하다.

두 번째로, 시드니 한국 영사관과 교육 센터는 한국어와 한국 문화를 진흥하는데 중요한 지원을 제공하였는데, 한국계가 아닌 한국어 교사들로 하여금 일정 기간 동안 한국을 방문하여 한국 문화와 역사를 경험하고 배울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데 재정적으로 지원하였다. 교육 센터는 또한 60여 명의 한국어 교사들과 함께 ‘Go Korea! 워크샵’을 일 년에 네 번씩 주최하기도 하였다(김인기, 2008b: 246-247).

문학, 시, 동양화, 그리고 봉산 탈춤과 같은 한국 예술과 문화 분야에서 전문적으로 훈련을 받은 사람들이 많다. 특히 1985년부터 민속 무용 학원을 운영해 온 송민선 선생은 주목할 만하다.

그녀는 시드니 오페라 하우스에서 매년 개최되는 이주민 축제와 에스닉 소수자 축제에 정기적으로 초대받아왔다. 그리고 시드니에서 50개의 춤 공연을 담당하기도 하였다. 그녀는 7년 동안 그녀와 함께 지낸 학생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학생들의 대부분은 3년에서 4년 동안 춤을 배우고 그만둔다고 아쉬워했다(송홍자, 2008a: 261). 한국 문화 진흥을 위한 다른 활동으로는 Maek(한국 연극 기업), 음악 밴드 그리고 필하모닉 합창단이 있다.



호주한인문화재단은 한국 스포츠, 문화를 홍보하고 지원하고자 하는 풀뿌리 조직이며 한국 문화와 전통에 대한 지식을 다음 세대에 전승하고자 하는 촉매제 역할을 한다(송홍자, 2008b: 566). 한국문화원은 전 세계에 한국 문화와 언어를 홍보하기 위한 한국 정부의 계획에 의해 설립되었으며 사무실은 시드니에 있다.


7. 시드니 내 한국 에스닉 동호회 및 조직


시드니에는 한인들에게 개인적, 문화적, 종교적 욕구를 충족하는 수많은 사회 및 공동체 조직이 있다. 우리는 많은 한인 동호회와 협회들이 한국 정부와 한국에 있는 다른 조직들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는 방식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들은 또한 한국 에스닉 정체성을 계승하는데 깊이 연관되어 있다.


1) 호주한인복지협회

이 협회는 1979년에 한인 호주 이민자로서의 삶이 의미 있고 만족스러운 것이 되기 위해 한인 이주민들에게 복지를 제공하고 호주 사회에 성공적으로 정착할 수 있도록 지원하기 위해서 설립되었다.

동료 한인들이 새로운 삶에 정착하는 과정에 있어서 영어 능력의 부족함과 문화적 차이로 인해 어려움과 불리한 점을 경험하는 것을 몇몇의 한인 이주민이 목격하게 된 것은 1976년이었다. 이 협회는 동료 한인들의 그러한 부정적 경험들을 최소화하고자 하였다.

1980년에 New South Wales 정부에 자선단체로 공식 등록한 이후로 협회는 1983년부터 한정된 정도의 재정적 지원을 정부로부터 제공받을 수 있었고, 이 덕분에 당시에는 몇몇 비정규 노동자를 고용할 수 있었다.

2008년 이후로 협회는 Campsie, Eastwood, 그리고 Parramatta 교외 지역에 사무실을 열고 시드니 메트로폴리탄 지역에 거주하는 한인들의 필요를 충족하였다(조양훈, 2008c: 445).

협회 설립 초창기에 제공하는 일반 서비스는 새로이 이주해온 이들이 정부의 복지 지원과 여러 프로그램의 수혜를 받을 수 있도록 돕는 것이었고, 그들이 새로운 곳에서 정착할 수 있도록 관련 지방 공무원들과 그들을 연결해주는 것이었다.

어떤 경우에는 노년 부부들이 정부가 제공하는 주택에 입주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고 다른 경우에는 한인들의 초기 정착을 위해 서류를 적절히 준비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었다.

기타 지원 분야로는 아파트 임대와 관련된 문제, 가정 폭력, 임금 체불, 노동 착취, 불공정 해고, 바람직한 지역 사회에의 정착, 아이들에게 알맞는 학교 찾기 등이 있었다. 가정 폭력 혹은 이혼과 같은 구체적인 분야의 경우 전문적 지원과 상담을 필요로 함에도 불구하고, 협회 초창기에는 제공될 수 없었다.


2000년대에 들어, 그러한 전문 서비스와 상담이 여성의 공간, 그리고 정신 심리 상담소라는 개별적인 조직을 통해 제공이 가능해졌고 협회와 협력하기 시작했다(조양훈, 2008c: 446).

새로이 이주해온 이들의 지속적인 정착으로 인해, 그들의 초기 정착 과정과 경제적 필요는 협회가 제공하는 서비스의 중요한 일부로 남아 있다. 그러나 한인 공동체 사회의 긴 역사로 인해 결혼 안에서의 갈등과 자녀들의 교육에 대한 우려와 같이 재정적인 문제를 넘어서는 인간 관계에 대한 사례가 증가하고 있다.

적절한 전문가의 지원과 자원이 부재한 협회는 관련된 서비스를 제공하는 한인 공동체 안팎의 조직들과 협력함으로써 이러한 문제들을 해결하고자 하였다(조양훈, 2008c: 446). 2007년에, 협회는 전문적으로 훈련을 받은 세 명의 사회복지사들을 Campsie, Eastwood, Parramatta, Strathfield, 그리고 Chatswood, 이 다섯 교외 지역에 배치하였다.

또한 노년층 고객들을 위한 세 명의 직원과 협회의 일을 지원하는 여섯 명의 자원봉사자를 확보하였다(조양훈, 2008c: 447).


2) 월남전참전자회

베트남 전쟁에 참전한 한국 군인과 민간인들이 사상 처음으로 한국인들의 호주 진출을 이끌어냈기 때문에 동포사회에 대한 그들의 초기 공헌은 특별히 인정할 필요가 있다. 이들은 힘겨운 전장에서 이미 긴밀한 우정을 형성하였고 이들의 ‘상부상조’의 정신은 불굴의 의지를 지닌 삶의 원천이 되었다.

이 협회는 구성원들과 그 가족들을 위해 주기적으로 야외 파티를 주최하였고 한국의 주권을 보호하기 위한 일환으로 한국 정부에 기부금을 내기도 하였다.

그리고 시드니 한국 영사관과 한국 보건부와 긴밀히 협력하여 사면을 통해 영주권을 얻은 구성원들의 이민을 용이하게 도와주기도 하였다. 이 협회는 1989년에 정식으로 설립되었으며 설립 20주년을 캠시 오리온센타(Orion Centre, Campsie)에서 동료 한인 300명과 기념하면서 한인 공동체 내에서 이 협회의 중요성을 분명하게 보여주었다.

물론 협회의 멤버들은 한인 공동체 내에서 뿐만 아니라 외부에서도 중요한 리더십을 발휘했으며, 특히 호주에서 한인 이주민들이 잘 정착할 수 있도록 길을 마련해왔다(조양훈, 2008c: 458-9).


3)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이 자문기관은 전두환 전 대통령이 집권하던 제5공화국 기간에 한국 안팎에 있는 한인들의 통일에 대한 견해를 청취하기 위해 1980년 10월에 설립되었으며 한국 내 7,000여 명의 사람들과 해외에 있는 10,000명의 한국인들로 구성되었다. 자문회의를 설립할 당시에, 통일부는 자문회의 운영의 책임을 지고 있었고 호주에 있는 한국 대사가 두 번째 책임 담당자였다.

자문회의는 한국 대통령과 통일부를 직접적으로 자문하였다. 자문회의가 수행하는 핵심 역할 중 하나는 한국 정권에 해외/국제 지원과 관련된 정책을 제공하는 것이었다. 자문회의는 또한 해외에 있는 한인들에게 한인 에스닉 정체성을 보존하도록 장려하기도 하였다(조양훈, 2008c: 459).

4) 세계 한민족 여성 네트워크(KOWIN: Korean Women’s International Networks)

지속적인 사회경제적 그리고 문화의 발전 덕분에 한국 정부는 여성의 권리와 기회를 신장하기 위해서 여성 가족부를 1988년 2월 28일에 설립하였다. 첫 번째 장관 한명숙은 세계 곳곳에 있는 한국 여성의 능력을 기르고 발전시키기 위해 KOWIN을 설립하였다.

KOWIN은 또한 해외에 있는 한국인 여성들이 자신의 에스닉 정체성을 유지하고 미래지향적인 비전을 발전시킬 수 있도록 장려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 또한 한국 여성의 리더십을 기르고, 이를 통해 한국이 국제 공동체에서 높은 경쟁력을 지닐 수 있도록 하는 것을 목표로 하였다.

한국 정부는 매년 회담을 주최하였는데, 해외에 있는 한국 여성 100명과 한국에 있는 여성 250명이 서로 정보를 교환하고 네트워크를 확대하였다. 2004년 1월에 KOWIN 호주 지부가 만들어졌고 80명의 등록된 구성원이 있다(조양훈, 2008c: 467).


5) 경제적 및 전문직 협회

다음은 경제적 및 전문직 협회의 범주에 해당하는 동호회와 조직들에 대한 간단한 설명이다. ‘세계해외한인무역협회’는 1982년에 설립되었다. 이는 호주 내 한인 공동체의 지속적인 발전에 있어 중요한 효율적인 경제적 활동을 촉진하는데 필요한 비즈니스 정보들을 교환하는 한인 사업가들의 모임이다.

‘World-OKTA (Overseas Korean Traders Association) Sydney’는 한인 경제 네트워크 중 가장 큰 네트워크인데, 이는 세계 곳곳에 있는 해외 한인 무역인의 조화, 성공, 그리고 통합을 가능케 한 해외 한인 무역인들을 지원한다. World-OKTA는 한국 산업 통상 자원부의 지원 하에 1994년에 설립되었다. 2007년 이래로 51개국에 97개 협회 지부와 6000명의 회원들이 존재한다(김익균, 2008a: 470-3). 다른 비즈니스 및 경제 협회로는 “재호한인실업인연합회”와 “한호 경제인 연합회”가 있다.

‘호주한인과학기술협회’는 1993년 10월에 한인 과학자와 기술자에 의해 설립된 비영리 단체이다. 이 조직의 목표는 호주와 한국 간의 과학적 교환을 촉진하기 위함이다. 예컨대 협회는 젊은이들을 위한 과학 경진을 주최하여 호주 대학생들로 하여금 한국 기업과 연구 기관을 방문하도록 지원하였다. 2003년에는 협회가 국제적 IT 회담을 주최하였는데 150명의 대표단이 참석하였고 10주년 기념을 축하하였다. 교민사회의 한 신문은 다음과 같이 보도하였다.

이 회의에는 14개국에서 온 대표단이 참석했으며 북한에서 온 과학자 4명도 처음으로 호주로 초청했다. 연방과학산업연구기구(CSIRO: The Commonwealth Scientific and Industrial Research Organisation)에서 온 대표단과의 교류는 기억할만한 역사적인 순간이었다. 북한 대표자였던 리원시(Rhee Won-Si)는 한국의 민족적 정체성을 계승하는데 기여한 호주 한인 이민자들의 역할을 인정하였다(호주일보, 21 Nov 2003; 김익균, 2008: 482에서 재인용).

‘한인간호인협회’는 1988년에 119명의 회원들과 함께 설립되었으며 정보 공유를 통해 전문적 지식을 탐구하는 데에 구성원들을 지원하고자 하였다. 구성원들 간의 유대감을 증진시킴과 더불어, 협회는 한인 공동체 안팎의 공공 보건을 증진하는 데에 기여하였다.

‘한호한의학협회’(KAOMA: Korean Australian Oriental Medicine Association)는 대학 교육 수료 후 자격증이 있는 젊은 의료 전문가들이 모인 협회이며 2004년 1월에 설립되었다. 구성원들은 질병 치료에 관한 정보를 공유하고 자신의 의학적 경험을 넓히고 월간 모임을 통해 한의학에 대한 고전 저서들을 공부한다. 협회는 동료 한인들의 건강에 기여하고 호주에서 한의학의 발전에 기여하고자 하는 목표를 가진다(김익균, 2008a: 485).

다른 전문직 조직들로는 ‘한인상담협회’(2006년 10월 설립), ‘한인호주변호사협회’(2003년 10월 설립), ‘한인 호주정보통신협회’(1997년 10월 설립), ‘한인인큐베이터신용조합’(1993년 11월 설립), ‘호주한인건설협회’(1999 10월 설립), ‘한인건설기술자협회’(1999년 10월 설립), ‘한인택시운전사협회’(1983년 11월 설립) 등이 있다 (김익균, 2008a: 486-94).

한국에서는 건장한 젊은 남성이 일정 기간 동안 군 복무를 하는 것이 의무이다. 육군, 해군, 공군에서 다양한 역할로 복무하는 것은 한국 국경을 넘어서도 지속되는 네트워크를 만들어 낸다.

이러한 네트워크에는 ‘재호재향군인협회’, ‘해병대전우회’, ‘625참전유공자회’, ‘월남전참전자협회’, ‘한호 해군재향군인협회’, ‘한인기독교육군장교협회’, ‘예비역장교훈련단(ROTC) 협회’(조학수, 2008b: 495-507)가 있다.

여러 스포츠 관련 협회도 존재한다. 예컨대 ‘호주 내 한인올림픽위원회’, ‘한호태권도협회’, ‘재호주대한축구협회’, ‘한인배구협회’, ‘한인골프협회’, ‘한인시니어 골프협회’, ‘한인복싱협회’, ‘한인수영협회’, ‘한인테니스협회’ 등이 있다(조학수, 2008a: 508-28).

복지 단체들은 한인들의 행복을 위해 일하고 한국 문화를 홍보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시드니민족문화원’은 1987년에 설립되었으며, 한국 문화의 홍보 및 계승과 동료 한인 이민자들의 권리를 신장하고 보호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1.5세대가 센터의 활동을 이끌어가는 역할을 맡았으며 한국 전통 학교, 탈춤 클럽, 무료 영어 학교를 운영하였다.

센터는 한인들에게 노동자의 권리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기도 하였다. ‘한국민족자료실’과 같은 도서관을 세우고 영어 학습 프로그램을 주최하였다. 자료실은 영주권을 얻으려고 하는 미등록 한인 이주자들을 도와주었고 노동자 권리의 침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노동자의 권리에 대한 세미나를 주최하였다. 인권과 한반도의 통일에 대한 전망 역시 자료실의 관심 주제이다(강기호, 2008: 530).


‘소수민족선교원’은 방문자와 학생에게 단기적으로 숙소를 제공하는 ‘등대의 집’에서 설립되었다. 선교원은 양명득 목사의 지도하에서 인종 차별에 대한 영향력 있는 운동을 주도했고 이는 호주 매체를 통해 보고되었다. ‘여성의 공간’은 1993년 7월에 여성들이 서로를 돕기 위한 목적으로 설립되었다.

다른 복지 단체들로는 ‘한인 돌봄 및 공유’(Korean Caring and Sharing), ‘중국호주서비스사회’(Chinese Australian Service Society) ‘한인여성복지회’,‘재호장애우모임’, ‘Life Line’, ‘여성문화센터’(City Women’s Cultural Centre), ‘Spring Institute of Cancer Aid’ 등이 있다(강기호, 2008).

다른 협회들로는 문화, 예술, 학술 등에 관심을 가진 고령자들에 의해 만들어진 것들이 있다. 또한 한인들은 학교 동창회, 향우회 등을 만들기도 하였다(호주 한인 50년사 편찬 위원회, 2008).

많은 협회 중에서도 교회는 시드니에 사는 한인 이주민의 삶에 매우 큰 영향을 행사했기 때문에 특별히 주목할 만하다. 지난 수십 년 동안 한국에서 불교와 기독교는 주요 종교였으나, 불교는 호주 한인 공동체에서 영향력이 그리 크지는 않다.


시드니 지역에서 발행된 한인 신문들과 잡지들을 분석해보면 한인 불교 사원은 한인 활동의 중심지가 아니며 스님 역시 사회 지도자가 아님을 확인할 수 있다.


8. 종교, 한인 이민자 그리고 호주 공동체로의 통합


호주에 처음 세워진 사원은 홍법사로 1986년에 설립되었고 시드니 지역에는 현재 4개의 절이 존재한다. 반면 첫 한인 교회는 1974년에 설립되었고 그 이후로 그 숫자가 증가하여 오늘날에는 약 300여 개에 달한다. 불교가 호주에는 상대적으로 생소한 편이고 한국에서 불교는 승려들에 의해 제도적 확장을 크게 보이지 못한 반면 한국에서 개신교는 많은 수의 신학대학 졸업생들에 의해 빠르게 성장했다(Han, 1994: 104-5).

소수 이민자의 주변인적 지위는 새로운 현상이 아니며 시드니 내의 한인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한인교회는 한인 이민자들이 사회에서 소외되는 어려움, 영어 능력의 부족함, 사회에서 승인 받고자 하는 노력 등을 보상해주거나 해결하는 사회적 기관의 역할을 한다. 한국에서 많은 수의 신학대학 학생들이 졸업하면서 그들 중 대부분이 호주와 다른 여러 나라에서 한인 이민자들의 종교적 그리고 사회, 경제, 문화적 측면에 대해 도움을 주고자 하였다(Han, 1994, 2004).

크리스찬리뷰(August 2014)는 시드니에서 발간되는 월간지인데 시드니 메트로폴리탄 지역에 있는 170개의 교회 목록을 기록하고 있다. 각 교회는 2명 이상의 신학대 졸업생들을 고용하고 있으며 다양한 직업군에 종사하는 수 백여 명의 교인들이 있다. 교회는 호주에 있는 한인들의 에스닉 활동들의 중요한 중심지가 되어왔는데, 한인들은 자신의 에스닉 정체성을 유지하고 한국식 생활방식을 편안하게 지속하도록 독려받고 있다.

교회 내에서의 조직 활동과 운영, 그리고 의사 결정권은 대개 이민자 1세대 남성 회원들에 의해 관리된다. 1.5 혹은 2세대 혹은 여성 회원들은 소외되는 경향이 있으며 한인 교회 내에서 그들의 목소리는 제한적이다.

한국교회들이 진정으로 그들 자신의 종파 내에 있는 ‘비한인교회’들과 협력 관계를 맺고 있는지 여부는 현재 진행 중인 문제이다. 한인 교회는 일반적으로 한국사회에 널리 퍼져 있는 일반적인 조직 구조, 즉 일반적인 지도자의 선발, 그들의 교회에 대한 재정적 기여, 교회 조직체의 운영을 위해 참여하고자 하는 평신도들의 높은 열망과 관계되어 있다(Han, 2004: 119).

교회 활동에 참여함으로써, 한인들은 다른 한인들과 긴밀하게 교류하고, 그들의 에스닉 문화를 실천하고, 그들의 후손들이 한국 문화를 계승하도록 장려한다.

한인에게서 나타나는 분절 동화(segmented assimilation), 예컨대 후손들로 하여금 한국인 정체성을 유지하도록 교육하는 것이라던가에 대해 한인에게 전적으로 책임을 돌릴 수는 없다(Portes, 1993). 그러나 여성이 지도자로서의 역할을 수행하고 교회 생활에 기여할 수 있는 능력과 잠재력을 제한하는 것은 조직적으로 그리고 신학적으로도 문제이다.

한국 이민자들이 더 넓은 사회의 일원으로 살 수 있도록, 더 넓고 세계적인 문화에 통합될 수 있는 충분한 수단이 있다면 민족 정체성의 유지는 바람직하다. 만약 한인의 민족 정체성의 보존이 세계화의 보편주의에 반하는 방향에서 추구된다면 이는 재고되어야 한다. 지금껏, 유럽계-호주 교회의 영향력이 감소하면서 한인 교회의 영향력이 증대되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유의미한 움직임을 관찰하지 못하였다.

또 하나의 의도하지 않은 교회의 암시적인 역할은 다른 종족 간의 결혼을 저지하는 것이었다. 다른 한인과 결혼하는 것의 편안함과 미덕은 교회 소속뿐만 아니라 다른 동료 한인들과의 교류를 통해서 지속적으로 가치 있게 여기고 강화되었다.

오랫동안 유지되어온 한국 순혈통주의는 한인교회와 같은 디아스포라적 한인 종족 조직들 내에서 쉽게 또 무비판적으로 고취되는데 이는 모국과의 연계에 대한 의지 표명이기도 하다. 교회가 종족 간 결혼에 대해 명백하게 반대하는 것은 아니지만, 1세대 남성 지도자들이 한국적 가치를 장려하고 한국적 종족성이 자연스럽게 강화되는 공간으로써 교회는 한인들 사이의 전통적인 결혼 관행을 옹호한다.

어떤 한인들은 자신들이 대학 시절이나 전문직 관계를 통해 구축한 관계를 통해서 종족 간에 결혼을 하는 경우도 있다. 그들 모두가 한인 교회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지는 않으며 다른 이들은 한인 정서와 잘 맞지 않는 ‘혼혈’에 대한 논쟁을 피하기 위해 아이를 낳지 않는 경우도 있다.

이는 국제결혼이 장려되어야 하는가의 문제가 아니라(cf. Kim, 2000a), 문화, 언어의 차이를 받아들이고자 하는 의지와, 더욱 중요한 것은 더 넓은 사회 안으로 통합되고 호주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기여하는 것에 관한 문제이다.

유교 문화 가치는 한인의 정신에 깊게 배태되어 있으며 한인 교회에서도 실천된다. 교육 열풍, 특히 고등 교육에 대한 열의는 해외 한인 공동체에서 만연한 일이다. 서울의 명망 있는 대학의 졸업생들은 취업의 기회에 있어서 남보다 유리한 출발을 하는 경향이 있다.

유교 문화가 사회 역사적으로 강하게 뿌리 박혀 있기에 한인은 힘과 권위라는 관점에서 매우 구조화되어 있는 위계질서를 지지하는 경향이 있다. 이는 한국에서 뿐만 아니라 해외 한인 공동체에서도 발견되는데, 이곳에서는 상대적으로 낮은 비율의 한인 이민자만이 화이트칼라 직업군에 종사한다(Han, 2004: 120).


이러한 경향이 소통지향적인 한인 공동체를 구축하는데 긍정적은 요소인 것은 아니며, 또한 한인들이 한국인이 아닌 사람들 혹은 다른 호주 사람들과 교류를 할 때 잠재적인 장애물이 될 수가 있다.


점차 지식을 기반으로 하는 환경에서 교육에 대한 열풍을 비난할 이유는 없다. 다만, 필자는 교육에 대해 높은 가치를 두는 것은 사회적 능력과 여타의 개인적 발전의 측면들과 동반되어야 한다고 지적하는 바이다.


필자는 한인 이민자 교회가 무비판적으로 모국의 문화를 재생산함으로써 개인적 특성이 양육되도록 충분히 조력하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 결과로써 한인 이민자가 다른 이들과 교류하고 호주 사회에 기여할 수 있는 잠재성은 충분히 실현되지 못할 것이다.


일부 학부모들은 자녀들의 학교를 필요 이상으로 자주 방문했으며, 교사와 학부모들 사이에 오명을 남기고 많은 학교에서 한인과 다른 학생들 사이에 불필요한 긴장을 유발하는 뇌물을 통해 교사들에게 청탁을 하기도 하였다. 사실, 한인 교회의 신도들이 어떻게 한국에서의 일반적인 문화적 관습을 초월할 수 있는지 그리고 한인들이 어떻게 유능한 일원이 될 수 있는지는 호주에 있는 한인 교회들이 고려해야 할 중요한 문제이다.

호주에 있는 한인교회들이 설날, 광복절, 추석, 제헌절, 개천절, 현충일과 같은 한국 축제나 기념일을 챙기는 것은 일반적인 일이며 교회 신자뿐만 아니라 교회 신자가 아닌 한인들도 이와 같은 행사에 참석한다. 그와 같은 행사에 애국가를 부르는 것은 일반적이며 이는 눈물과 향수를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몇몇 구성원들은 한복을 입고 떡, 잡채, 불고기와 같은 한국 음식을 나눠먹기도 한다(Han, 2004: 121).

한인 이민자가 한국 민족성을 유지하고자하는 노력에 대한 의문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행위에 대해서는 타당한 많은 이유들이 있으며 필자는 그 이유들에 대하여 동조하는 부분이 많이 있다. 한인 이민자들은 정착 사회에서 사회적 혹은 구조적 배제에 직면한다.

많은 연구들은 비영어권 국가 이민자들의 삶의 기회를 제약하는 여러 가지 장벽들에 관하여 설명한 바 있다.(Han, 1999b; 1999a; 2000c; 2000a; 2000b; 2002; Min, 1996a; Light and Rosenstein, 1996).

예컨대, 호주의 고등학교 졸업생들은 의사와 치과 의사는 변호사처럼 전문적인 네트워크에의 가입이나 멤버쉽 유지 등에 대해 걱정하지 않아도 되고 개인적인 업무에 집중할 수 있으며, 높은 수입을 누릴 수 있다고 생각하여 법조계보다는 치과 또는 의료계 종사자를 더 선호하는 경우가 많다.

이는 단지 한인이 전문직 활동에 있어 네트워크를 필수적이라고 생각하는 인식에 관한 것이 아니라, 비영어권 국가에서 온 한인 이민자들이 경험할 수 있는 잠재적 장벽에 관한 것이다(Han, 2004: 121).

한인교회들은 한인 공동체에서 가장 대표적인 조직인데 이는 높은 비율의 한인들이 교회 서비스에 정기적으로 그리고 자발적으로 참여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한인 교회들은 어떻게 한인 이민자들이 사회적 장애물을 극복하고 호주 공동체에 유능한 일원이 될 수 있는 지에 관한 전망을 제시할 수 있는 조직체이다. 목표는 평판 좋은 호주의 다문화주의를 지속적으로 발전시키고 종족적으로 그리고 문화적으로 좀 더 포용적인 사회로 발전하며, 뿐만 아니라 한인들로 하여금 다양한 문화와 신념에 대한 관용을 실천할 수 있는 방법을 배울 수 있도록 돕는 것이다.

포용해야 하는 다른 가치들로는 관용, 평등, 정의, 공정, 그리고 표현의 자유를 들 수 있을 것이다(Han. 2004: 121). 필자는 한인 공동체가 이러한 제안들을 실천에 옮기는 데는 시간이 걸릴 수 있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다. 호주에 있는 한인 교회들은 일반적으로 더 넓은 지역 사회에 ‘손을 뻗기’보다는 그들 자신의 필요에 의해 몰두하면서 내부적인 일에 초점을 둔다.

한인교회들이 물질만능주의에 몰두한 모국의 교회들의 발자취를 따라가고 있다는 징후들이 보인다(Han, Han, and Kim, 2009). 교회들 자신의 ‘잔이 넘쳐흐르기’ 전까지 그들은 더 넓은 공동체에 제공할 수 있을 만한 것이 별로 없을지도 모른다.


9. 결론


특정한 사회-경제적 배경을 지닌 한인 이민자들은, 특정한 자원, 노동, 기술 또는 투자가치를 지닌 이주 인구를 찾는 호주에 정착했다. 사면, 기술/독립 그리고 비즈니스 이주민은 그들이 지니고 온 자원을 최대한으로 활용하면서 호주에서의 삶에 서로 다른 방식으로 정착하였다. 그들의 지리적 정착은 다양한 집단의 사회적인 필요와 경제적 관여에 의해 결정되었다. 한인 이주민이 시드니 메트로폴리탄 지역에 산재함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정착 패턴은 여전히 예전과 크게 다를 바 없다.

시드니의 한인 이민자들은 다음 세대들이 한국어와 한국 문화를 유지할 수 있도록 장려하는 제도적 지원을 가능하게 하는 바탕을 잘 구축하고 있다. 여전히 남아있는 질문은 그래서 한인 이민자들이 다문화 호주로부터 혜택을 받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의미있는 기여를 할 수 있도록 그들이 여타의 호주사람들과 얼마나 더 밀접하게 상호 작용할 수 있는가 하는 점일 것이다.

한인 이민자 교회는 그러한 움직임을 시작하고 목표를 성취하기 위한 과정을 촉진할 수 있는 최적의 장소이다.〠 <끝>


한길수|멜번 모나쉬 대학교, 커뮤니케이션 미디어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