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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4월 3일 일요일

(브라질 한인 이민역사 조명)한인 불법체류자 사면령-3 - "남미복음신문" 복음선교 인류구원 신앙보수

(브라질 한인 이민역사 조명)

한인 불법체류자 사면령-3 - "남미복음신문" 복음선교 인류구원 신앙보수

(브라질 한인 이민역사 조명)한인 불법체류자 사면령-3
2018/1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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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우선목사1.jpg
김우선 목사(베데스다교회 원로)
 
그런데 채 대사님이 2013년 11월 25일 세상을 떠나셨다. 그래서 필자는 병중에 있는 김성민 변호사를 병원으로 찾아가 만나서 이 역사적인 사면 사건의 글을 기록해야 할 것 같다고 했더니, 나는 병중에 있으니 김 목사님이 부디 기록을 하여 알려달라고 부탁을 하였다. 그리고 김성민 변호사는 세상을 떠나 고인이 되었다. 그래서 이 한인 불법체류자 사면사역에 직접 참여했던 한 사람으로서 책임을 느끼고 늦게나마 이 사면작업을 시작하게 된 동기와 진행과정을 상세하게 기록하려고 한다. 

이에 앞서 브라질에 어떻게 이렇게 많은 불법체류자들이 살게 되었는가를 이해하려면 그동안 브라질에 6만 여명의 이민자들이 입국하여 살게 된 이민 역사를 조명해 보는 것이 좋을 것 같아서 참고 문헌들을 재료로 삼어 기록하려고 한다. 여기에는 남미크리스챤신문을 운영하시던 고 임춘하 목사님의 기록이 많이 참고되었음을 알려드린다. 사건의 자세한 내용을 기록하려고 브라질 한국대사관에 그 당시의 일을 문의를 해 보아도 오래 전 사건이므로 기록을 찾을 수 없다는 연락을 받고, 그동안 준비한 것을 중심으로 알려드리려고 하오니 혹시 미흡한 점이 있더라도 이해하여 주시기를 부탁을 드린다.

 한백 문화협회 회장 정인규 대령과 이종욱 중령은 1961년 8월 8일 브라질 대통령 Janio Quadros(쟈니오 꽈드로스)로부터 시험케이스로 500세대의 한국인 이민을 브라질에 받아들이겠다는 승인을 받았다. 박정희 소장이 군사혁명을 일으키고 정권을 수립한 후에 한국인들을 외국으로 분산시켜 좁고 가난한 한국 땅을 벗어나서 마음과 뜻을 넓히면서 살게하고 이스라엘 민족들과 같이 외국에서 벌어드린 딸라를 조국 대한민국에 송금하여 조국 발전에도 도움을 줄 수 있는 이민정책을 권장하는 정책을 수립하여 최대한으로 돕겠다고 하였다. 그래서 1962년 7월 11일에 당시 브라질의 수도인 리오 데 자네이로(Rio de Janeiro)에 주 브라질 대한민국 대사관을 개설하였다. 그리고 초대 대사로 박동진 대사가 브라질 정부에 신임장을 제출했다. 그리고 전 보사부 이민과장이었던 변훈씨를 대사관 참사로 발령을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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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동의 현대사-교회와 세상]- 9 브라질 한인 가톨릭 이민

가톨릭평화방송



[격동의 현대사-교회와 세상]- 9 브라질 한인 가톨릭 이민

1965년 상파울루에 공동체 형성

2008.12.28발행 [1000호]
1965년 상파울루에 공동체 형성




▲ 한인 신자들과 함영상 신부가 한인 본당 설정 이듬해인 1976년 본당을 찾은 상파울루대교구장 동 에바리스토 안스 추기경을 영접하고 있다.



▲ 1965년 5월 9일 한인 가톨릭공동체가 첫 미사를 봉헌한 후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두 번째 줄 오른쪽에서 다섯 번째가 당시 미사를 집전한 요시우라 신부다.
[유진, 옥경, 은명]



▲ 1966년 산타마리아 농장에 세운 학교건물은 회오리바람에 붕괴되고 말았다. 거의 다 지은 건물을 다시 지어야 했지만, 가톨릭 이민단은 이에 좌절하지 않고 농삿일과 양계 사업을 통해 정착에 힘썼다.



▲ 1960년대 말 브라질 한인 가톨릭 이민단을 위해 물심양면으로 지원을 아끼지 않은 당시 폰타그로사교구장 펠란다(가운데) 주교.


1963년 2월 12일. 브라질 상파울루 주 남동부 산토스 항. 세계적 커피 수출항이자 브라질 전체 수출입 화물의 60%를 소화하는 항구도시 산토스 항에 배 한 척이 입항한다. 이 배엔 당시 한국 정부가 추진한 제1차 한인 영농이민단 17가구 92명이 타고 있었다. 인구 430만 명의 도시는 이들을 말없이 품에 안았다. 이들 중 신자는 고계순(카밀로)ㆍ장상기(스테파노)ㆍ유재선(베네딕토)ㆍ안계승(요셉)씨 가족 등 네 가구였다. 이들은 훗날 탄생하는 '브라질 한인 가톨릭 공동체'의 뿌리가 된다.

 17가구로 시작한 한인 브라질 이민은 올해로 45주년을 맞는다. 브라질 한인은 체류자를 포함해 현재 5만여 명으로, 대부분 브라질 최대 경제도시 상파울루에 뿌리를 내렸다. 처음엔 농업 이민이었지만, 지금은 상파울루 옛 중심가 봉헤치로와 브라스 지역에서 '의류' 관련 사업에 주력하고 있다. 두 지역에만 한인들이 운영하는 매장은 1500여 개로, 여기에 원단 및 액세서리 업체까지 합치면 2000여 개에 이를 정도다. 한인 가톨릭 공동체는 2007년 12월 말 현재 본당 1곳에 공소 5곳, 신자 3885명, 사제 3명에 이르러 브라질 한인사회의 당당한 주역으로 자리매김했다.


#브라질 한인 가톨릭공동체 탄생
 
 1964년 6월께, 브라질 한인 가톨릭 이주사에 '한 획'이 그어졌다.

 당시 서울대교구장 노기남 대주교가 로마에서 브라질 폰타그로사교구장 제랄도 펠란다 주교를 만난 게 계기였다. "한인들이 브라질로 이민을 갈 수 있겠느냐"는 노 대주교의 제안에 펠란다 주교가 협력하겠다는 입장을 표명하며 상황은 급진전됐다.

 노 대주교는 귀국하자마자 '한국 가톨릭 이민회'를 조직, 당시 가톨릭노동청년회(JOC)를 통해 이민자를 모집하고 윤을수(인보성체수도회 설립자) 신부를 브라질에 파견, 정착에 필요한 땅을 구입했다.

 그러나 브라질 정부 측에서 이민 허가를 미루는 바람에 교회가 곤혹스런 처지에 놓였다. 이에 교회는 장대익 신부를 가톨릭 이민회 지도신부로 임명, 이같은 어려움을 타개했다. 이민 선발대로 장상락(보나벤투라)씨가 1965년 12월 파견됐고, 이듬해 1월과 6월 장대익 신부 인솔로 김삼용(라우렌시오)씨 가족을 비롯한 69가구 500여 명이 3차에 걸쳐 브라질 남부 파라나 주 파라나과 항에 도착한다. 5차 농업 이민이 바로 가톨릭 이민단의 집단 이주다.

 한인 신자들은 해발 893m 고원지대 폰타그로사 시 교외 산타마리아농장에 정착한다. 4차에 걸친 농업이민이 이미 실패한 터였기에 제5차 농업이주는 국제가톨릭이주협회와 연계, 파라나 주 1547.11㎢(468만 평) 규모 농장을 구입해 이주하는 방식으로 이뤄졌다. 그래서 가톨릭 이민단은 1~4차 이주 때와 달리 '영농이민'에 성공한다. 농장 내 목조건물을 개축, 성당을 만든 가톨릭 이주민들 39가구 230여 명은 여기서 미사를 봉헌하며 공동체를 이뤘다. 하지만 정착 이후 농장 토지소유권 문제가 불거지고 입주 시설 및 자녀들 교육여건이 미비해 신자들이 점차 흩어지기에 이른다.

 상파울루에 한인 가톨릭공동체가 형성된 것은 1965년 5월 9일의 일이다. 1차 입국자인 고계순씨 가족을 비롯해 신자 44명은 이날 상파울루 조앙 멘데스 광장 뒤쪽 썽 곤잘로스 성당에 모여 일본계 사제 요시우라 신부 주례로 첫 미사를 봉헌하고 공동체를 이룬다.



#'하느님 부르심'에 응답한 이주 여정 

 "네 고향과 친족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너에게 보여 줄 땅으로 가거라"(창세 12,1).

 한인들의 브라질 이주는 1960년대로 접어들며 이뤄진다.

 전쟁의 충격에서 어느 정도 벗어난 한국 정부는 1962년 2월 해외이주에 관한 법률이 제정되자 해외진출을 꿈꾸며 지구 반대편 남미 여러 나라로 이주를 계획한다. 브라질 이주도 그 일환이었다.

 '하란을 떠나는 아브람의 이주'를 떠올리며 브라질로 향한 한인 가톨릭신자들은 하느님 부르심에 '의탁하는 삶'을 살고자 공동체를 이룬다. 썽 곤잘로스 성당(1963~68), 노싸 세뇨라 다 빠스 성당(1968~71년), 보아 모르찌 성당(1971~72년) 등 일본ㆍ이탈리아계 성당 곁방살이를 거쳐 공동체 설립 10년만인 1973년 7월 13일 함영상 신부를 영입, 고계순씨를 초대 총회장으로 한인 가톨릭 공동체를 본격 출범하기에 이르른다.

 본당 설정은 2년 뒤인 1975년 5월 6일에 이뤄졌다. 공식 명칭은 '여왕이신 마리아 한인 본당'.

 당시 상황을 함 신부는 「브라질 한인천주교회 35년사」에서 이렇게 보고한다. "지금까지 한인 공동체는 교회법 상 본당 자격을 갖추지 못해 소수민족 교회단체로만 취급돼 왔습니다.… 이제 우리는 정식 본당으로 승격돼 독립하게 됐음을 명심하고 모두 본당 발전에 분발해 주시기를 간곡하게 부탁드립니다. 처음 먹었던 초지를 굽히지 말고 나가야 하겠습니다.…"

 비록 영농이민은 10년도 안 돼 무산되고 말았지만 한인 이주민들은 가톨릭 공동체로서 새롭게 태어난다. 1979년 말 신자 수가 322가구에 1587명에 이르렀을 정도였다.



#'사랑으로 하나되어' 뿌린 복음의 씨앗
 
 1982년 4월 18일, 상파울루 이삐랑가 구역 아고스칭뇨 고메스 313. 대지 980㎡(296.45평) 공간에 건평 965㎡(291.91평) 규모 성전이 세워진다. 비록 공장 겸 창고로 쓰던 건물을 개축한 성전이지만, 외국 성당에서 곁방살이를 해오던 한인 공동체로서는 경사 중 경사였다. 당시 상파울루대교구장 동 에바리스토 안스 추기경 주례로 봉헌된 축복식은 그래서 '눈물의 봉헌식'이 됐다. 이 성당은 20년 뒤 봉헤치로에 새 성전을 짓고 이사할 때까지 한인 복음화의 핵심으로 자리했다.

 성전 봉헌 이후 브라질 한인본당은 활기를 띤다. 1983년에는 레지오 마리애를 도입하고, '대건한글학교'를 개설해 신자, 미신자를 가리지 않고 한글을 가르친다. 또 1984년에는 한국 천주교 200주년 행사에 박명순(스테파노)씨 등 대표단 60여 명을 파견해 순교 성인들의 얼을 이어받는다. 아울러 포르투갈어 교육에도 눈을 돌려 한인 이주민들이 언어 장벽을 넘는데도 기여한다.

 1990년에 접어들며 브라질 한인본당은 또 대건장학회를 설립, 매달 12명에게 미화 100달러를 지원했고, 1991년에는 성당 옆 고물상 부지를 6만 달러에 매입해 청소년전용축구장으로 개방하기도 한다. 또 본당 교우들은 물론 교포들의 어려움을 덜어주기 위해 쌀을 400포 가량 구입, 누구든지 원하는 이들은 필요한 만큼 가져가도록 함으로써 지역사회와 함께하는 교회 공동체로서 위상을 세웠다.

 지난 5월 선종한 장대익 신부는 2001년에 펴낸 자신의 회고록 「남은 것은 당신뿐입니다」에서 "농삿일도 힘겨운데다 모기와 독충에 시달려 앓는 사람이 한둘이 아니었다"면서 "특히 상파울루 시에 살던 한인 신자들과 함께 주일학교도 만들고 신심단체도 조직해 한인 가톨릭공동체 활성화에 힘을 기울인 게 기억에 남는다"고 회고한 바 있다.

오세택 기자
sebastiano@pbc.co.kr

:::: 한중남미협회 ::::회갑 맞은 한국-브라질 동반자 관계 2019

:::: 한중남미협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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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회갑 맞은 한국-브라질 동반자 관계

2019-10-25
조회수 5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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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갑 맞은 한국-브라질 동반자 관계

남아메리카 최대 도시이자 브라질의 경제수도인 상파울루의 봉헤치로에는 한국의 장승을 모티브로 한 대형 조형물 "우리"(Uri)가 서 있다. 두 사람이 함께 걷는 모습을 형상화한 것으로 얼굴 부위에는 각각 "ㄷㅎㅁㄱ"과 "ㅂㄹㅈㅇ"라는 한글 자음이 새겨졌다. "대한민국"과 "브라지우"(브라질의 현지 발음)의 초성을 뜻하는 것으로 동반자 관계인 한국인과 브라질인이 공동체를 이루고 있음을 상징한다.

봉헤치로는 섬유와 패션 산업의 중심지다. 타고난 손재주에 눈썰미까지 갖춘 한인들은 이곳 상권을 장악해 밀집 거주 지역을 이뤘다. 거리에는 한국식 이름의 의류상점이 즐비하고 골목마다 한식당이 자리 잡고 있다. 교육부 한국교육원과 동포들이 설립한 한류문화센터도 있다.

2010년 상파울루시는 봉헤치로를 코리아타운으로 지정한 데 이어 지난해 8월 브라질한인회는 기념 조형물 "우리"를 준공했다.

봉헤치로 코리아타운은 요즘 축제 분위기에 들떠 있다. 31일이 한국과 브라질 수교 60주년 기념일이어서 상파울루를 비롯한 브라질 전역에서 관련 행사가 줄을 잇고 있기 때문이다.

상파울루의 브라질 한국문화원은 4일과 5일 상파울루시립 대공연장에서 국립현대무용단의 초청공연 "검은 돌:모래의 기억"을 선보인 것을 비롯해 영화, 클래식, 미술, 무용, 문학 등 다양한 문화 잔치를 마련하고 있다.

9월 3일 수도 브라질리아에서는 브라질 주재 한국대사관이 브라질 외교부 등과 함께 "교육, 혁신, 우리의 미래"란 주제로 기념 세미나를 열었다. 31일에는 브라질 하원에서 기념 세션이 개최된다.

한국은 1959년 10월 31일 중남미 국가로는 처음으로 영토와 인구 대국이자 자원 부국인 브라질과 국교를 맺었다. 이후 무역·이민·문화 등의 분야에서 차례로 협약을 체결하고 동반자 관계를 이어오고 있다.

한국에서도 브라질 수교 60주년을 맞아 사진전, 미술전, 무용 공연 등이 열려 관람객을 불러모으고 있다.

우리나라가 지구 대척점 인근의 브라질과 처음 인연을 한 것은 일본 어선 선원 박학기 씨가 브라질에 이주한 1918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953년 한국전 정전협정이 끝나자 전쟁포로 76명은 최인훈 소설 "광장"의 주인공처럼 남과 북도 아닌 제3국을 택했고, 이 가운데 50명이 인도를 거쳐 브라질에 정착했다. 1993년 MBC TV 다큐멘터리 "76인의 포로들"에서 이들의 존재가 대중에 알려진 뒤 일부가 모국을 찾았고 영구귀국한 사례도 있었다.

브라질은 축구의 나라답게 한국과의 본격적인 교류도 축구로 시작했다. 프로축구팀 마두레이라가 1961년 4월 방한해 서울선발팀과 친선경기를 벌인 것이다. 이를 계기로 이종욱 육군 중령은 한백(韓伯)문화협회를 결성해 브라질 이민사업을 추진했다. 당시에는 브라질을 한자로 백랄서이(伯剌西爾), 또는 파서(巴西)라고 불렀다. 2대 한백문화협회장 정인규 대령은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에게 브라질에 영농 이민을 보내자고 건의해 재가를 얻어냈다.

17가구 92명과 독신자 11명을 포함해 103명의 한인을 태운 네덜란드 선박 치차렌카호는 1962년 12월 18일 부산항을 떠나 이듬해 2월 12일 브라질 산투스항에 도착했다. 대한민국의 첫 공식 이민이자 최초의 인력 수출이었다. 이들은 브라질 내륙의 농장으로 분산 수용됐다. 이어 1963년부터 1966년까지 5차례에 걸쳐 1천300여 명의 농업 이민자가 브라질 땅을 밟았다.

이들 중 상당수는 북한 출신이었다. 남녘에 살아도 실향민이긴 마찬가지라는 생각에서 이민을 택했으나 풍토가 다른 만리타국에서 손에 익지 않은 농사가 쉬울 리 없었다. 대부분 농사를 접고 대도시에 나가 먹고 살려고 이민할 때 갖고 온 옷을 내다 팔았는데, 이것이 한인 의류업의 시초가 됐다고 한다.

이들이 상파울루 봉헤치로에 모여들 무렵인 1971년, 1천400여 명의 기술 이민자가 브라질로 이주해 상파울루에 자리를 잡았다. 1972∼1980년에는 미국에 이민하려고 파라과이와 볼리비아를 경유지로 삼았던 한인이 브라질로 대거 옮겨왔다. 1980년부터는 초청 이민이 늘어났다.

브라질 한인사회는 1970년 이전 "배 타고 온 세대"와 이후 "비행기 타고 온 세대"로 나뉜다.

앞세대가 농업 이민에서 시작했다가 봉제업으로 정착의 기틀을 닦았다면 뒷세대는 기술과 소자본을 토대로 의류 산업의 성장사를 썼다. 한인이 운영하는 의류업체는 약 3천 개를 헤아리는데, 브라질 여성 의류 시장의 절반을 차지하고 직간접 고용 인력은 20만 명에 이르는 것으로 추정된다.

브라질 한인들은 다른 지역 동포와 마찬가지로 자녀 교육에도 힘을 쏟았다. 한인 1.5세와 2세들은 법조계, 경제계, 의료계, 학계, 군경 등 다양한 전문 분야에 진출했으며 최근에는 문학, 음악, 미술, 영화, 패션 등 문화예술 분야로도 영역을 넓히며 코리안의 위상을 높이고 있다.

2018년 말 기준 외교부 집계에 따르면 전 세계 749만3천587명의 재외동포 가운데 브라질 동포는 4만8천281명(0.6%)이다. 나라별로는 11위에 해당하며, 중남미 동포 전체(10만3천617명)의 46.6%에 이른다. 브라질 국적자는 2만9천696명(61.5%)이고, 나머지는 영주권자 1만8천52명, 일반체류자 475명, 유학생 58명이다. 동포의 93.3%가 상파울루주에 거주한다.

법무부 출입국외국인정책본부의 9월 통계월보에 따르면 국내 체류 외국인 245만4천515명 가운데 브라질 국적자는 2천38명이다. 중남미 국가 가운데 가장 많긴 하나 전체의 0.1%에도 미치지 못한다. 그래도 이들은 무역, 스포츠, 학계, 문화예술 등의 분야에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

한국은 브라질 등 5개국이 참여하는 메르코수르(Mercosur·남미공동시장)와 막바지 무역협정(TA) 협상을 벌이고 있다. 예정대로 내년에 협상이 성공적으로 타결된다면 한국경제의 새로운 돌파구가 열리는 동시에 각 분야의 교류 협력이 크게 늘어날 전망이다. 양국 우호의 상징이자 가교 구실을 해온 브라질 동포와 재한 브라질인에 거는 기대도 훨씬 커졌다. 

heeyong@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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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백문화사절단(韓伯文化使節團)

현대사단체

 브라질 이민을 추진하였던 한백협회의 실무단.   

분야
현대사
유형
단체
성격
해외한인, 단체
설립시기
1961년 10월
설립자
정인규
시대
현대
성격
해외한인, 단체
설립시기
1961년 10월
설립자
정인규
 정의
브라질 이민을 추진하였던 한백협회의 실무단.
설립목적
브라질 정부와 한인 이민 문제를 협의하기 위해서 설립된한백협회(韓伯協會)가 브라질에 파견한 실무 협의단이다.

연원 및 변천
1961년 10월 경에 한백협회가 주축이 되어 결성되었다. 한백협회는 남미 이민 분위기가 크게 일어나던 1960년 10월에 정인규(鄭麟圭)에 의해서 설립되었다. 당시의 남미 이민은 1960년 이후에 사회 혼란이 일어나 북한의 재남침 우려가 크게 높아졌고, 일본인의 브라질 이민 성공 이야기가 알려져, 남미에 대한 호기심이 갑자기 일어났기 때문이었다. 한백협회는 1926년에 브라질 한인인 김수조(金壽祚)가 창립한 한백문화협회와 교류하면서 이민 사업을 추진하였는데, 특히 김수조가 자기 소유의 땅을 한인 이민자에게 제공하기로 하면서 이민이 성사되었다.
1961년에 5·16군사쿠데타가 일어나면서 브라질 이민 사업은 잠시 중단되었지만, 1961년 10월 18일에 국가재건최고회의가 이민 정책을 적극 추진하여 관련 행정 부서를 신설하면서활기를 되찾았다. 브라질 정부와 이민 문제를 협의하기 위해서 한백문화사절단이 조직되었고, 사절단은 1961년 12월 25일에 오후 3시 40분 출발 항공편으로 브라질로 향하였다. 당시단장은 한백협회 회장 정인규가 맡았고, 박종식·한춘교·고광순·이성희·심준열·홍관순·최준덕·김상진·이종만·정수남·목진태·김용·윤훈선 등 14명이 단원으로 참여하였다.

기능과 역할
1961년 6월 29일에 브라질 정부는 한인 500가구의 단체 이민을 약속하였는데, 1962년 9월 28일에 브라질 이민국이 정식으로 이주를 허가하였다. 한백문화사절단은 1962년 1월 5일에 브라질의수도인 상파울루(São Paulo)에 도착한 뒤, 귀국 기한인 6월 20일까지 각각 반을 나누어 활동하였다. 사절단 가운데 6명은 실습을 위해서 주립 농사시험장에 들어갔고, 일부 단원은 자료를 수집하였으며, 나머지 단원은 여러 사람들을 만나면서 민간 외교에 주력하였다. 특히 한인들이 이주할 만한 장소를 물색하여 상파울루 평원을 직접 답사하였고, 한인 가옥을 짓기 위해서 여러 건물을 조사하기도 하였다. 또한 도로 건설, 상수도와 전기 시설 등에 대한 계획도 세워나갔다. 한편 한국 정부도 1962년 3월에 ‘해외이민법’을 제정하는 등 브라질 이민을 위한 절차를 꾸준히 진행하면서 한국진(韓國鎭) 보건사회부 차관을 단장으로 이민교섭단을 파견하기도 하였다.

의의와 평가
이 실무단은브라질 한인 이민에 결정적인 도움을 준 단체이다. 그 노력의 결과, 1963년 2월 12일에 17세대 103명의 첫 한인 이민자들이 ‘농지 사전 준비대’라는 이름으로 브라질 땅에 첫 발을 내딛었다.

참고문헌
  • 『브라질 속의 한국인』(대한민국역사박물관 전시도록,2014)

  • 『브라질한인이민50년사(1962-2011)』(브라질한인이민사편찬위원회,교문사,2011)

  • 「「브라질」에의 단꿈·선꿈」(『경향신문』,1962.12.5.)

  • 「교섭간『분쟁이민』」(『동아일보』,1962.5.12.)

  • 「브라질 정부와 이민문제협의」(『동아일보』,1961.12.26.)

  • 브라질한인회  (www.haninbrasil.org)

집필자
집필 (2015년)
이계형(국민대학교 국사학과)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한백문화사절단(韓伯文化使節團))]

2022년 3월 16일 수요일

17 브라질 한국인의 아마존 개척사 - 매일경제

브라질 한국인의 아마존 개척사 - 매일경제
브라질 한국인의 아마존 개척사

입력 : 2017.03.24

브라질 한국인이 아마존을 개척하려던 시도가 있었다. 1962년부터 한국인들은 브라질에 농업이민을 가기 시작했는데 브라질에 이민 온 오응서 씨 등이 주도하여 혼도니아(Rondônia) 주정부에 아마존 개발 계획을 제출했다. 당시 브라질은 아마존 지역을 국내 노동력으로 개발할 수 없어 방치하고 있었다. 1966년 3월에 주 정부는 “귀하가 제출한 계획서의 11개 항복을 그대로 수리하고 이에 허가한다. 즉시 대표자로 하여금 현지답사와 지역선정을 하라. 리우데자네이루 공군기지에 전용기를 대기시켰으니 이 전문을 갖고 출발하라” 라고 개발 계획을 승인했다.



혼도니아 주정부의 한국 농장 허가 공문1966년 5월 26일 ‘아마존 개척단’의 선발대가 구성되었다. 교민단체였던 한백문화협회를 통해 대원을 모집했다. 서독에 광부로 갔다가 본국으로 돌아가지 않고 브라질로 온 청년들도 신청했다. 오응서씨를 단장으로 하여 한국 청년 12명, 농사지도원 즈다 (일본 농대 출신, 농업기사), 법률지도원 Milleno (브라질 변호사, 상파울루주 고문 변호사), 행정지도원 Waldmil (전 혼도니아주 농림국장) 등으로 선발대가 구성되었다. 개발대상지역은 연방직할주 혼도니아주 수도 Porto Velho시에서 16킬로미터 지점에서부터 아그레주로 향하고 볼리비아의 관문인 Guajaramilim 근처까지의 마데이라 강변이었다.



한국인의 개척지역 위치현장에 도착한 선발대는 밀림의 나무를 베어 농지를 확보하는 작업을 했다. 낫, 장도, 도끼 등으로 잡초와 넝쿨을 자르고 통로를 만들며 밀림의 목표지에 도달해서 도끼로 큰 나무들을 찍어냈다. 수개월의 작업으로 6000평방미터의 농지를 확보했다.



개척대원들이 만든 본부 막사

밀림에서 잡초 제거하는 모습농지에서 재배할 작물은 후추로 선정했다. 원시림은 큰 나무들이 양분을 모두 흡수하여 토질이 사토에 가깝다. 썩은 나뭇가지와 낙엽이 쌓인 지표 30센티미터 정도만이 비옥하다. 사토에서는 열대성 덩굴 종류의 작물만이 가능하여 국립농업시험소에 조사를 의뢰한 결과 후추를 선정한 것이다. 묘목을 본격 이식하기에 앞서 후추를 시범적으로 재배했고, 자가 수요용으로 만지오까 (고구마 일종), 야채, 옥수수 등도 심었다.

그러나 3년간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시범단지에 이은 2단계의 농지개척 사업은 실패했다. 밀림에서 중장비 없이 시작한 작업은 역부족이었다. 말라리아, 독충, 과로 등으로 대원들이 쓰러져 갔다. 브라질 정부의 2단계 지원 계획도 중단되었는데 초기에는 식량, 의료, 농업지도, 교통편 등의 지원이 있었고, 개간영농자금의 융자알선까지도 준비 중에 있었다. 그러나 1969년에 혼도니아주 의회는 한국인 농장에 브라질이 국고를 부담하는 것은 중단되어야 하며 국고는 브라질인 노동력을 투입하는 형태로 집행되어야 한다고 의결했다. 배경에는 외국인들인 아마존을 소유하는 것에 대한 우려가 있었다. 곧 브라질 정부는 1969년 외국인의 브라질 토지 취득을 금지하는 ‘국유지 관리법’을 제정했다. 당시 아마존 하구의 파라(Para)주의 국유지 300만 헥타르을 분양받고󰡐챠리 프로젝트󰡑를 착수했던 미국업체도 철수했다.

아마존 개척단에 참여했던 단원들 이후 뿔뿔이 흩어졌다. 지금은 대부분 세상을 떠났다. 그러나 오지를 개척하려는 한국인의 정신은 이어지고 있다. 1995년 아마존의 수도인 마나우스(Manaus)에 우리나라 삼성전자, LG전자, 서울전자통신이 공장을 설치하여 가동 중이다. 1995년부터는 한국교회의 선교 사업이 시작되었고, 지금은 교민이 마나우스를 중심으로 100여명 살고 있다. 한국의 의료시스템을 실은 병원선으로 아마존 섬마을 사람들을 찾아다니며 진료하는 구체적인 계획도 2016년부터 추진 중이다. 아마존은 아니지만 1990년에는 마뚜그로소두술 판타나우 지역에 통일교가 8만 헥타르의 ‘새소망 농장’을 건설해 만지오까, 오렌지, 사탕수수, 가축 등을 키우고 있다.



아마존의 한 마을참고로, 아마존은 550만km2로 8개국과 국경을 접하고 있다. 아마존은 많은 자원과 생물학적 다양성을 갖고 있어서 개발가치가 높다. 브라질 사람들은 인프라가 없는 아마존에 접근하기가 어려워 먼 미지의 세계라고 생각한다. 아마존을 찾는 관광객 대부분은 외국인이다. 미국이 아마존을 인류에 자산이라면서 영향력을 가지려는 것도 브라질이 신경 쓰는 대목이다.



아마존

*참고자료: 브라질 한인 이민 50년사 (브라질 한인이민사편찬위원회)

[KOTRA 상파울루 무역관 이영선 관장]

브라질 한국이민 50주년을 맞이하며 - 트랜스라틴 23호(2013년 3월)

브라질 한국이민 50주년을 맞이하며 - 트랜스라틴 23호(2013년 3월)
브라질 한국이민 50주년을 맞이하며 최금좌 11 페지


2013년 이민 50주년을 맞이한 재브라질 한인사회의 현황과 문제점 - 중남미연구 - 한국외국어대학교 중남미연구소 : 논문 - DBpia

2013년 이민 50주년을 맞이한 재브라질 한인사회의 현황과 문제점 - 중남미연구 - 한국외국어대학교 중남미연구소 : 논문 - DBpia



2013년 이민 50주년을 맞이한 재브라질 한인사회의 현황과 문제점

The Current Situation and Problems of the Korean Community in Brazil, which commemorated the 50th anniversary of immigration in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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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금좌 (한국외국어대학교)
한국외국어대학교 중남미연구소
중남미연구
중남미연구 제33권 제2호
2014.06
49 - 87 (39 pages)

DOI : 10.17855/jlas.2014.06.33.2.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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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브라질 한인사회는 2013년 2월 12일 이민 50주년을 맞이했다. 대한민국 최초의 공식이민인 브라질 이민은 집단농업이민으로 브라질에 도착했지만, 농촌이 아닌, 라틴아메리카 최대 도시인 상파울루에 정착했다. 그리고 여성의류 제품 생산에 종사하며 그동안 브라질 의류시장에 중저가 여성의류의 60%를 공급할 정도로 성장했다. 그런데 그들이 브라질 사회에서 주목받기 시작한 것은 2002년 한-일 월드컵의 위성중계방송 이후였다. 2004년 언론이 가장 먼저 재브라질 한인사회를 “모범적인 소수민족집단”으로 정의했고, 2006년에는 상파울루 주(州)정부가 한국문화를 알리는 행사 “한인의 날”를 요청했으며, 2010년에는 상파울루 시(市)정부가 한인들의 생활터전이자 주거지인 봉헤치루(Bom Retiro)를 코리아타운(Korea Town)으로 지정하기에 이르렀다.
그런데 이민 50주년을 맞은 2013년 재브라질 한인사회는 1년 내내 두 가지 커다란 사건으로 고통 받았다. 첫째는 한인사회의 과거 지도자들이 만장일치로 제32대 한인회장의 그의 임기가 끝날 때까지 탄핵운동을 일곱 달 동안 지속한 것이고, 둘째는 그동안 한인사회의 자부심이었던 브라질 한국학교 폴리로고스(Polilogos)가 상파울루시정부에 세금 미납으로 폐교위기에 처했기 때문이다.
이런 혼란한 상황 속에서 필자는 재브라질 한인사회의 구성원들의 의견을 듣기 위해서 설문조사에 착수했다. 200장을 돌렸으나 수건된 것은 61장이었다. 따라서 필자는 본 설문지 결과를 바탕으로 관련 인물과의 인터뷰를 통해 오늘날 브라질 한인사회의 가장 근본적인 문제는 2008년 미국의 리만 브라더스(American Company Lehman Brothers) 사건으로 촉발된 세계경제위기와 브라질 한인사회의 경제위기에 있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리고 이 두 사건의 또 다른 공통점을 발견했는데, 그것은 한국 정부의 거액의 보조금과 그것의 투명하지 못한 운영이었다.
따라서 오늘날 한인사회는 과거 - 첫 번째(1963-1989) 브라질 도착과 적응시기와 두 번째(1990-2009) 정착과 동화시기 - 와 달리, 2010년 이후 새로운 시기 - 필자는 그것을 본 논문에서 “위기와 분열의 시기”로 정의했음 - 에 돌입했다고 주장하는 바이다.#브라질 한국이민 50주년#브라질 한인사회의 현황과 문제점#설문조사#경제위기#단합부재#브라질 사회에 적응 및 동화 정도#빈부격차#50th anniversary of Korean immigration community in Brazil#Current Situations and problems#Surveys, Economic Crisis#Absence of unity#Degree of adaptation and assimilation#The gapbetween rich and poor



참고문헌 (21)참고문헌 신청




1. [학술지(정기간행물)] - Choi, Keum Joa / 2000 / The History of the Korean Community in Brazil / Journal of Foreign Relations 24 



10. [단행본] - Choi, Keum Joa / 2011 / The Association of Korean Community in Brazil & The Compilation Committee of Korean Immigration History in Brazil, The 50 years' history of Korean Immigrants in Brazil : 272 ~ 367 



11. [학술지(정기간행물)] - 최금좌 / 2012 / 재브라질 한인사회와 문화정체성 / 디아스포라연구 6 (1) : 123 ~ 153



12. [기타자료] - Gusmão, Marcos Buarque de / 2004 / Muito além do Bom Retiro, Veja São Paulo Especial 



13. [인터넷자원] - / / Hanaro.com 

PBC-TV [특집다큐] 반세기의 항해 - 브라질 가톨릭이민 50년

브라질 한인 이민 역사

브라질한인이민오십년사(브라질韓人移民五十年史)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브라질한인이민오십년사(브라질韓人移民五十年史)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브라질한인이민오십년사(브라질韓人移民五十年史)

현대사문헌

 브라질 한인이민 5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2011년에 출판된 역사서.   해외한인문헌.

분야
현대사
유형
문헌
성격
역사서, 해외한인문헌
편저자
정하원, 안경자, 최금좌
제작시기
2011년 11월 1일
권수
3,000권
간행자
브라질 한인 이민사 편찬위원회
시대
현대
성격
역사서, 해외한인문헌
편저자
정하원, 안경자, 최금좌
제작시기
2011년 11월 1일
권수
3,000권
간행자
브라질 한인 이민사 편찬위원회
영역닫기영역열기 정의
브라질 한인이민 5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2011년에 출판된 역사서.해외한인문헌.

영역닫기영역열기개설
브라질 한인 이민 오십년사는 「브라질 한인회」가 브라질 한인이민 5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만들어낸 책자이다. 2005년 제29대 한인회장 후보로 나온 박동수가 선거공약으로 내세워 2011년 출판해 내었다. 박동수는 이 일을 적극적으로 추진하여 제29대(2006-2008)와 제30대(2009-2010) 한인회장을 역임했다.
대한민국 최초의 공식이민으로 형성된 브라질 한인이민사회는 이민 20주년, 25주년, 30주년, 40주년을 맞이할 때마다, 자신들의 이민역사를 기록으로 남겨야 한다는 목소리를 끊임없이 높였었다. 하지만 이민사회의 특성상 브라질 사회로의 적응과 생존 - 의류제조업 분야에서 한인사회는 세계 이민 역사상 가장 짧은 시간에 가장 성공적으로 경제적 터전을 닦음 - 에 바빴던 그들은 이 일에 투자할 시간적 여유가 없었다. 이에 박동수는 2005년 브라질 한인회 회장에 출사표를 내며 2013년 이민 5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어떠한 결과물을 내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그것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있던 한인사회는 그의 주장에 절대적으로 동의하며 그를 제29대 한인회장으로 뽑았다. 그리고 2008년에는 본 사업의 영속성을 위해 그를 재선시켰다.

영역닫기영역열기편찬/발간 경위
2006년 한인회장으로 취임한 그는 우선 「브라질 한인이민사 편찬위원회」를 조직하고, 자신을 브라질한인이민 50년사 편찬위원회 운영위원장으로, 정하원을 편찬위원회 위원장으로 임명하고 그것을 한인신문에 공포했다. 사무실은 한인회관이 있는 아끌리마썽(Aclimação)이 아니라, 한인들의 생활터전이자 거주지로 변모한 봉헤찌로(Bom Retiro)에 열었다. 그리고 여러 한인언론의 광고를 통해 자료를 모으기 시작했다. 그리고 2008년 안경자(전한국학교 교장)와 최금좌(한국외대 겸임교수)를 필진으로 초대하였다.

영역닫기영역열기서지사항
브라질 한인이민사 편찬위원회(2011)가 도서출판 교음사에서 발간한 『브라질한인이민 50년사(1962-2011)』는 총 858쪽으로 내용상 일곱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제1부는 이민태동과 재브라질 한인 농촌적응기, 
제2부는 단체 이민전사와 반공포로, 
제3부는 농장 입주현황과 영농, 
제4부는 지방이민사(정하원, 54-269쪽), 
제5부는 도시 상파울루에서의 생활(최금좌, 272-365쪽), 
제6부는 한인 교육·문화사(안경자, 367-773쪽), 
제7부는 종교, 단체, 교포사회의 초기와 현재를 여러 사람이 다루고 있다. 
예를 들면 한인교회와 기관 그리고 자비량 선교활동(임춘하), 천주교(정하원), 불교(안경자), 각종단체 현황(정하원), 초기 한인사회에 대한 회고(김정한), 한인이민사회와 계의 상관관계(정하원), 한인회관과 유원지 구입(31대 한인회), 한국과 브라질의 경제관계(코트라), 초기 한인이민자들을 도운 일본계 브라질 변호사 떼쭈오(Tetsuo) (정하원)가 포함되어 있다(727-834쪽).

그리고 책의 맨 앞부분은「사진으로 보는 이민 50년사」를(3-38쪽), 그리고 맨 마지막 부분은 부록으로 「브라질 한인동포 정착 약사」를 다루고 있다(836-857쪽)

영역닫기영역열기내용
본서는 내용상으로 크게 네 부분으로 나누어진다. 

첫 번째 부분은 일제 강점기 브라질로 이민한 김수조와 정인규 대령의 개인적인 만남이 대한민국 최초의 공식이민인 브라질 한국이민으로 태동하게 되는 과정, 
초기 한인 집단농업이민자들의 브라질 생활 적응에 적극적으로 도왔던 반공포로들의 활동, 한인들의 농촌에서의 삶과 지방이민사를 다루고 있고(정하원, 54-269쪽), 

두 번째 부분은 집단농업이민으로 브라질에 도착한 한인들이 농촌을 버리고 브라질 최고의 상공업 도시 상파울루로 이주하게 된 배경과 도시에서 생존하기 위한 적응과정, 
유대인 지역이었던 봉헤찌로로 진출하게 된 배경과 의류제조업을 한인사회의 경제적 터전으로 만들어 가는 과정, 미국으로의 재이주, 
1980년대 중반 본격적으로 시작된 세계화와 신자유주의 경제정책 속에서 1990년 브라질의 시장개방정책과 1994년 헤알플랜(Plano Real) 
- 군정을 끝내고 들어선 민정의 최대과제는 년 1,000-5,000%를 출렁이던 인플레이션을 억제시키는 것으로 이 경제정책은 민정의 일곱 번째 정책 - 의 성공이 한인사회에 끼친 영향과 변화들을 다루고 있다(최금좌, 272-365쪽). 

세 번째 부분은 한인이민사를 교육적인 측면과 문화사적 측면 그리고 여성사적 측면에서 다루며, 각계각층에서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는 인물들을 찾아내서 기술하고 있다. 따라서 브라질에서 50년 동안 생활하면서, 한인들의 의식주를 비롯한 일상생활과 언어의 변화 그리고 문화 활동 및 예술 활동을 다루는 모든 기록을 시대별고 정리하고 있다(안경자, 367-773쪽). 

그리고 마지막 부분은 그동안 스스로가 이민의 증인이라는 여러 사람으로부터 얻은 자료와 원고들을 마지막 부분에 총집합한 것으로, 종교, 단체, 교포사회의 초기와 현재를 여러 사람이 다루고 있다. 예를 들면 한인교회와 기관 그리고 자비량 선교활동(임춘하), 천주교(정하원), 불교(안경자), 각종단체 현황(정하원), 초기 한인사회에 대한 회고(김정한), 한인이민사회와 계의 상관관계(정하원), 한인회관과 유원지 구입(31대 한인회), 
한국과 브라질의 경제관계(코트라), 
초기 한인이민자들을 도운 일본계 브라질 변호사 떼쭈오(Tetsuo) (정하원)을 다루고 있다(727-834쪽).

영역닫기영역열기의의와 평가
대한민국 최초의 공식 이민인 브라질 제1차 농업이민 103명이 브라질에 도착한 날이 1963년 2월 12일임으로, 이민 50주년이라 하면 2013년 2월 12일까지 다루어야 하나, 제30대 박동수 한인회장의 임기가 2010년 만료되고, 또한 「브라질 한인이민사 편찬위원회」의 가장 큰 후원사였던 「브라질 LG 법인」의 회계연도를 맞추어 결과물을 내야 했기 때문에, 본서는 1962-2011년을 다루는데 그치고 있다. 따라서 아쉬운 점도 있으나, 그것보다 더 큰 문제는 출판사의 선택이 제대로 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세 필자들의 글을 하나의 책으로 통일시켜 만들어 내려는 편집자의 통찰력이나 노력이 전혀 없었을 뿐만 아니라, 시간에 쫓겨 세 필자들이 서로 교차 수정할 시간을 전혀 주지 않았다. 그 결과 브라질 한인이민을 최초로 연구한 서울대학교 인류학과 소속의 「전경수 교수의 회고록」은 마지막 네 번째 부분에 삽입되어 있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교육·문화사를 다루었던 세 번째 부분(714-724쪽)의 마지막에 위치하고 있다. 그것의 가장 큰 이유는 원고를 청탁한 사람과 그 원고를 출판사에 넘긴 사람이 안경자였기 때문에, 출판사의 편집부는 그 원고가 그녀의 것이라고 생각하고 그녀의 원고 맨 마지막에 넣었던 것이다.

영역닫기영역열기 참고문헌
  • 『브라질한인이민 50년사(1962~2011)』(브라질한인이민사편찬위원회,도서출판 교음사,2011)

  • 「이야기 브라질 한국이민사 : 전 보사부 차관 한국진과 초기 이민자 고광순을 중심으로」(최금좌,『포르투갈-브라질 연구』5-2,한국 포르투갈-브라질학회,2008)

  • 「브라질의 한국이민과 그 전개과정」(전경수,『재외한인연구』창간호,재외한인학회,1990)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브라질한인이민오십년사(브라질韓人移民五十年史))]