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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회갑 맞은 한국-브라질 동반자 관계
2019-1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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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갑 맞은 한국-브라질 동반자 관계
남아메리카 최대 도시이자 브라질의 경제수도인 상파울루의 봉헤치로에는 한국의 장승을 모티브로 한 대형 조형물 "우리"(Uri)가 서 있다. 두 사람이 함께 걷는 모습을 형상화한 것으로 얼굴 부위에는 각각 "ㄷㅎㅁㄱ"과 "ㅂㄹㅈㅇ"라는 한글 자음이 새겨졌다. "대한민국"과 "브라지우"(브라질의 현지 발음)의 초성을 뜻하는 것으로 동반자 관계인 한국인과 브라질인이 공동체를 이루고 있음을 상징한다.
봉헤치로는 섬유와 패션 산업의 중심지다. 타고난 손재주에 눈썰미까지 갖춘 한인들은 이곳 상권을 장악해 밀집 거주 지역을 이뤘다. 거리에는 한국식 이름의 의류상점이 즐비하고 골목마다 한식당이 자리 잡고 있다. 교육부 한국교육원과 동포들이 설립한 한류문화센터도 있다.
2010년 상파울루시는 봉헤치로를 코리아타운으로 지정한 데 이어 지난해 8월 브라질한인회는 기념 조형물 "우리"를 준공했다.
봉헤치로 코리아타운은 요즘 축제 분위기에 들떠 있다. 31일이 한국과 브라질 수교 60주년 기념일이어서 상파울루를 비롯한 브라질 전역에서 관련 행사가 줄을 잇고 있기 때문이다.
상파울루의 브라질 한국문화원은 4일과 5일 상파울루시립 대공연장에서 국립현대무용단의 초청공연 "검은 돌:모래의 기억"을 선보인 것을 비롯해 영화, 클래식, 미술, 무용, 문학 등 다양한 문화 잔치를 마련하고 있다.
9월 3일 수도 브라질리아에서는 브라질 주재 한국대사관이 브라질 외교부 등과 함께 "교육, 혁신, 우리의 미래"란 주제로 기념 세미나를 열었다. 31일에는 브라질 하원에서 기념 세션이 개최된다.
한국은 1959년 10월 31일 중남미 국가로는 처음으로 영토와 인구 대국이자 자원 부국인 브라질과 국교를 맺었다. 이후 무역·이민·문화 등의 분야에서 차례로 협약을 체결하고 동반자 관계를 이어오고 있다.
한국에서도 브라질 수교 60주년을 맞아 사진전, 미술전, 무용 공연 등이 열려 관람객을 불러모으고 있다.
우리나라가 지구 대척점 인근의 브라질과 처음 인연을 한 것은 일본 어선 선원 박학기 씨가 브라질에 이주한 1918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953년 한국전 정전협정이 끝나자 전쟁포로 76명은 최인훈 소설 "광장"의 주인공처럼 남과 북도 아닌 제3국을 택했고, 이 가운데 50명이 인도를 거쳐 브라질에 정착했다. 1993년 MBC TV 다큐멘터리 "76인의 포로들"에서 이들의 존재가 대중에 알려진 뒤 일부가 모국을 찾았고 영구귀국한 사례도 있었다.
브라질은 축구의 나라답게 한국과의 본격적인 교류도 축구로 시작했다. 프로축구팀 마두레이라가 1961년 4월 방한해 서울선발팀과 친선경기를 벌인 것이다. 이를 계기로 이종욱 육군 중령은 한백(韓伯)문화협회를 결성해 브라질 이민사업을 추진했다. 당시에는 브라질을 한자로 백랄서이(伯剌西爾), 또는 파서(巴西)라고 불렀다. 2대 한백문화협회장 정인규 대령은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에게 브라질에 영농 이민을 보내자고 건의해 재가를 얻어냈다.
17가구 92명과 독신자 11명을 포함해 103명의 한인을 태운 네덜란드 선박 치차렌카호는 1962년 12월 18일 부산항을 떠나 이듬해 2월 12일 브라질 산투스항에 도착했다. 대한민국의 첫 공식 이민이자 최초의 인력 수출이었다. 이들은 브라질 내륙의 농장으로 분산 수용됐다. 이어 1963년부터 1966년까지 5차례에 걸쳐 1천300여 명의 농업 이민자가 브라질 땅을 밟았다.
이들 중 상당수는 북한 출신이었다. 남녘에 살아도 실향민이긴 마찬가지라는 생각에서 이민을 택했으나 풍토가 다른 만리타국에서 손에 익지 않은 농사가 쉬울 리 없었다. 대부분 농사를 접고 대도시에 나가 먹고 살려고 이민할 때 갖고 온 옷을 내다 팔았는데, 이것이 한인 의류업의 시초가 됐다고 한다.
이들이 상파울루 봉헤치로에 모여들 무렵인 1971년, 1천400여 명의 기술 이민자가 브라질로 이주해 상파울루에 자리를 잡았다. 1972∼1980년에는 미국에 이민하려고 파라과이와 볼리비아를 경유지로 삼았던 한인이 브라질로 대거 옮겨왔다. 1980년부터는 초청 이민이 늘어났다.
브라질 한인사회는 1970년 이전 "배 타고 온 세대"와 이후 "비행기 타고 온 세대"로 나뉜다.
앞세대가 농업 이민에서 시작했다가 봉제업으로 정착의 기틀을 닦았다면 뒷세대는 기술과 소자본을 토대로 의류 산업의 성장사를 썼다. 한인이 운영하는 의류업체는 약 3천 개를 헤아리는데, 브라질 여성 의류 시장의 절반을 차지하고 직간접 고용 인력은 20만 명에 이르는 것으로 추정된다.
브라질 한인들은 다른 지역 동포와 마찬가지로 자녀 교육에도 힘을 쏟았다. 한인 1.5세와 2세들은 법조계, 경제계, 의료계, 학계, 군경 등 다양한 전문 분야에 진출했으며 최근에는 문학, 음악, 미술, 영화, 패션 등 문화예술 분야로도 영역을 넓히며 코리안의 위상을 높이고 있다.
2018년 말 기준 외교부 집계에 따르면 전 세계 749만3천587명의 재외동포 가운데 브라질 동포는 4만8천281명(0.6%)이다. 나라별로는 11위에 해당하며, 중남미 동포 전체(10만3천617명)의 46.6%에 이른다. 브라질 국적자는 2만9천696명(61.5%)이고, 나머지는 영주권자 1만8천52명, 일반체류자 475명, 유학생 58명이다. 동포의 93.3%가 상파울루주에 거주한다.
법무부 출입국외국인정책본부의 9월 통계월보에 따르면 국내 체류 외국인 245만4천515명 가운데 브라질 국적자는 2천38명이다. 중남미 국가 가운데 가장 많긴 하나 전체의 0.1%에도 미치지 못한다. 그래도 이들은 무역, 스포츠, 학계, 문화예술 등의 분야에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
한국은 브라질 등 5개국이 참여하는 메르코수르(Mercosur·남미공동시장)와 막바지 무역협정(TA) 협상을 벌이고 있다. 예정대로 내년에 협상이 성공적으로 타결된다면 한국경제의 새로운 돌파구가 열리는 동시에 각 분야의 교류 협력이 크게 늘어날 전망이다. 양국 우호의 상징이자 가교 구실을 해온 브라질 동포와 재한 브라질인에 거는 기대도 훨씬 커졌다.
heeyong@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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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백문화사절단(韓伯文化使節團)
현대사단체
브라질 이민을 추진하였던 한백협회의 실무단.
분야
- 현대사
- 유형
- 단체
- 시대
- 현대
- 성격
- 해외한인, 단체
- 설립시기
- 1961년 10월
- 설립자
- 정인규
정의
브라질 이민을 추진하였던 한백협회의 실무단.
설립목적
브라질 정부와 한인 이민 문제를 협의하기 위해서 설립된한백협회(韓伯協會)가 브라질에 파견한 실무 협의단이다.
연원 및 변천
1961년 10월 경에 한백협회가 주축이 되어 결성되었다. 한백협회는 남미 이민 분위기가 크게 일어나던 1960년 10월에 정인규(鄭麟圭)에 의해서 설립되었다. 당시의 남미 이민은 1960년 이후에 사회 혼란이 일어나 북한의 재남침 우려가 크게 높아졌고, 일본인의 브라질 이민 성공 이야기가 알려져, 남미에 대한 호기심이 갑자기 일어났기 때문이었다. 한백협회는 1926년에 브라질 한인인 김수조(金壽祚)가 창립한 한백문화협회와 교류하면서 이민 사업을 추진하였는데, 특히 김수조가 자기 소유의 땅을 한인 이민자에게 제공하기로 하면서 이민이 성사되었다.
1961년에 5·16군사쿠데타가 일어나면서 브라질 이민 사업은 잠시 중단되었지만, 1961년 10월 18일에 국가재건최고회의가 이민 정책을 적극 추진하여 관련 행정 부서를 신설하면서활기를 되찾았다. 브라질 정부와 이민 문제를 협의하기 위해서 한백문화사절단이 조직되었고, 사절단은 1961년 12월 25일에 오후 3시 40분 출발 항공편으로 브라질로 향하였다. 당시단장은 한백협회 회장 정인규가 맡았고, 박종식·한춘교·고광순·이성희·심준열·홍관순·최준덕·김상진·이종만·정수남·목진태·김용·윤훈선 등 14명이 단원으로 참여하였다.
기능과 역할
1961년 6월 29일에 브라질 정부는 한인 500가구의 단체 이민을 약속하였는데, 1962년 9월 28일에 브라질 이민국이 정식으로 이주를 허가하였다. 한백문화사절단은 1962년 1월 5일에 브라질의수도인 상파울루(São Paulo)에 도착한 뒤, 귀국 기한인 6월 20일까지 각각 반을 나누어 활동하였다. 사절단 가운데 6명은 실습을 위해서 주립 농사시험장에 들어갔고, 일부 단원은 자료를 수집하였으며, 나머지 단원은 여러 사람들을 만나면서 민간 외교에 주력하였다. 특히 한인들이 이주할 만한 장소를 물색하여 상파울루 평원을 직접 답사하였고, 한인 가옥을 짓기 위해서 여러 건물을 조사하기도 하였다. 또한 도로 건설, 상수도와 전기 시설 등에 대한 계획도 세워나갔다. 한편 한국 정부도 1962년 3월에 ‘해외이민법’을 제정하는 등 브라질 이민을 위한 절차를 꾸준히 진행하면서 한국진(韓國鎭) 보건사회부 차관을 단장으로 이민교섭단을 파견하기도 하였다.
의의와 평가
이 실무단은브라질 한인 이민에 결정적인 도움을 준 단체이다. 그 노력의 결과, 1963년 2월 12일에 17세대 103명의 첫 한인 이민자들이 ‘농지 사전 준비대’라는 이름으로 브라질 땅에 첫 발을 내딛었다.
참고문헌
『브라질 속의 한국인』(대한민국역사박물관 전시도록,2014)
『브라질한인이민50년사(1962-2011)』(브라질한인이민사편찬위원회,교문사,2011)
「「브라질」에의 단꿈·선꿈」(『경향신문』,1962.12.5.)
「교섭간『분쟁이민』」(『동아일보』,1962.5.12.)
「브라질 정부와 이민문제협의」(『동아일보』,1961.12.26.)
브라질한인회 (www.haninbrasil.org)
집필자
- 집필 (2015년)
- 이계형(국민대학교 국사학과)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한백문화사절단(韓伯文化使節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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