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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교통상부의 2011년 재외한인 현황에 따르면 중남미 국가 중에서 한인들이 가장 많이 사는 나라들은 브라질(50,773명), 아르헨티나(22,354명), 멕시코(11,800명), 과테말라(12,918명), 파라과이(5,205명)이다. 중남미로의 한인 이민은 1905년 멕시코 이민을 시작으로 1921년 쿠바로 재이주한 제1기 (1903-1921), 1920년대 소수의 일본국적 조선인(장승호와 김수조 등)들이 일본인 이민자들에 섞여서 이민 온 것과 1956년에 57명의 반공 포로들이 브라질과 아르헨티나로 이민 온 제2기(1922-1956), 1963년 브라질로의 농업이민을 시작으로 아르헨티나, 파라과이, 볼리비아 등으로 집단 이민이 시작된 제3기(1963-1971), 1972년 브라질 정부가 한인 이민 억제 정책을 시작하게 되어 공식이민이 중단되고 대신 서독에서 광부 또는 간호원으로 일했거나 베트남에서 계약 노동자로 일했던 사람들이 계약이 만료된 후 한국으로 귀국하지 않고 남미 국가로 불법 입국하여 체류한 제4기(1972-1980), 그리고 1980년 이후 가족초청, 투자이민 등으로 중남미 한인사회가 새로운 성장 단계를 맞게 된 제5기(1981-현재)로 구분할 수 있다.
제1기의 이민은 1905년 4월 4일에 1,033명의 한인들이 인천항을 떠나 멕시코 유카탄 반도의 에네켄 농장의 계약노동자로 가게 된 것에서 시작했다. 이들은 멕시코의 메리다 지역에서 20여 개의 에네켄 농장에 분산되어 계약노동자로 일을 했다. 그런데 말이 계약노동자이지 실제로는 노예와 같은 생활을 4년 동안 해야 했다. 계약 기간이 끝났을 때 이들은 기대했던 돈을 모으지 못했고 대부분 실업자가 되고 말았다. 기록에 따르면 140명이 농장을 탈출했고 49명이 사망했다. 소수의 탈출자들은 미국으로 건너가기도 했고, 그 중 일부는 조선으로 귀국했다. 하지만 대부분은 멕시코 각 지역으로 흩어져서 어려운 생활을 꾸려나갔다.
생활고에 시달리던 멕시코 한인들은 1921년 3월에 290여 명이 쿠바로 재이주를 시도했다. 이들을 쿠바로 끌어들인 것은 외국인 노동력에 대한 수요였다. 1910년부터 1920년 사이에 쿠바에서는 미국인들이 사탕수수 농장을 개척하며 사탕수수 산업이 활성화됐다. 이로 인해 노동력이 부족하게 되자 외국인 노동자들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쿠바 농업의 전성기였던 1902년과 1920년 사이에 중국, 유럽, 남미 국가들로부터 받아들인 외국인 노동자의 수는 100만 명에 달한다고 한다. 1921년 멕시코로부터 쿠바로 이주한 한인들도 이런 외국인 노동자의 일부였다. 288명의 한인들이 1921년 3월 멕시코 유카탄 반도를 떠나 쿠바 라스 뚜나스 지방의 마나티 항에 도착하였다. 그러나 쿠바에 도착했을 때는 국제설탕가격이 폭락하여 사탕수수 농장에서는 일자리가 줄고 임금도 크게 하락했다. 결국 한인들은 처음에 의도했던 농장에서 일하지 못하고 주변 지역에서 잡역 노동자로 생계를 꾸려 나갔다. 그러다가 마딴사스 지방의 에네켄 농장에서 일자리를 찾아 이동하게 되었다. 이곳의 엘 볼로 농장에서 한인들은 집성촌을 이루면서 쿠바에서의 생활을 시작했다.
이후에도 쿠바 한인들의 생활은 더욱 어려워갔다. 1933년에 집권한 바티스타의 혁명 정부는 1930년대의 경제공황을 극복하고자 자국의 중산층과 노동자들에게 유리한 보호정책을 펼쳤다. 그리하여 외국인 노동자들의 노동을 금지하는 노동 정지 조치를 취했다. 1946년 그라우 산 마르틴 정부가 국수주의 정책을 취하자 노동 정치 상황을 더욱 심해졌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으로 한인들은 쿠바 국적을 취득했다. 1940년에 헌법이 개정되어 쿠바 태생이 아닌 외국인도 국적 취득을 할 수 있게 되어 1946년부터 많은 한인들이 쿠바 국적을 취득하였다. 더 이상 모국으로부터 이민자들이 들어오지 않고 쿠바에 남아 있는 한인들은 쿠바 국적을 취득하면서 현지 사회문화에 빠르게 동화가 진행됐다. 1951년 당시 쿠바의 한인 인구는 400여명이었는데, 이 중 쿠바 태생이 250여 명이었다. 이민 2, 3세가 증가하고 이들은 한인으로서 정체성을 강하게 갖지 않았기 때문에 한인 조직들은 약화되었다. 더욱이 1959년 쿠바 혁명 이후 남한과 미국 한인회와의 교류가 단절되면서 쿠바 한인들은 한민족으로서의 의식과 생활문화를 유지하기 어렵게 되었다.
제2기의 이민은 정작 이민이라고 보기에는 규모가 작아서 본격적으로 이민이 시작된 제3기의 디딤돌이라고 볼 수 있다. 1920년대에 일본 국적으로 8명의 한인들이 브라질에 이민 왔다. 이 중에서 김수조는 1920년대 후반에 일본의 ‘모범 케이스’ 이민으로 온 4명의 독신자 중의 한 명인데 1963년 브라질로의 집단 농업이민을 중계하는 역할을 하였다. 1956년에는 한국전쟁 중 유엔군 포로로 인도에서 수용되었던 반공 포로들이 중립국으로 브라질(50명)과 아르헨티나(7명)을 선택하여 이민을 오게 되었다. 이 시기에 이주한 한인들은 서로 교류하지 않고 현지 사회에 묻혀 생활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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