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년 전 ‘남미 이민루트’ 연 JP … “한국엔 우수한 인력 얼마든지 있다 파라과이가 기회의 땅 돼달라” | 중앙일보
50년 전 ‘남미 이민루트’ 연 JP … “한국엔 우수한 인력 얼마든지 있다 파라과이가 기회의 땅 돼달라”
중앙일보
입력 2015.05.27 01:52
업데이트 2015.05.27 13: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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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준호 기자
1999년 12월 7일 김종필 국무총리(오른쪽에서 둘째)는 13박14일 일정으로 아르헨티나와 브라질을 방문하는 남미 순방길에 올랐다. 9일에는 아르헨티나에서 경축특사 자격으로 데라루아 신임 대통령 취임식에 참석했고 11일부터는 브라질을 공식방문했다. 김 총리가 브라질 일정 도중 부인 박영옥 여사와 함께 상파울루 한인타운에 들러 한인 봉제공장을 둘러보고 있다. [사진 김종필 전 총리 비서실]
청와대는 최근 박근혜 대통령의 남미 순방에 대해 외교의 지평(地平)을 지구 반대편 중남미까지 확장했다고 표현했다. 한국인의 남미 지평은 이미 50여 년 전 이민외교 형태로 열렸다. 남미 이민의 베이스캠프는 파라과이였다. 김종필 전 총리가 루트를 뚫었다. 한국인은 이곳을 딛고 브라질·아르헨티나를 넘어 미국으로 달려갔다.
1963년 9월 ‘1차 외유’(63년 2월 25일~10월 23일) 중 미국 뉴욕을 방문했을 때다. 맨해튼 5번가의 호텔로 김정렬 주미대사가 찾아왔다. 유엔 주재 파라과이 대사를 만났는데 알프레도 스트로에스네르(Alfredo Stroessner:1912~2006) 대통령이 나를 초대하고 싶어한다는 것이었다. 스트로에스네르 대통령은 육군총사령관이던 54년 군사혁명을 일으키고 대통령 선거에 단독 출마해 당선된 인물이었다. 그는 철저한 반공주의자였다. 한국에서 군사혁명이 일어났다는 이야기를 들었던 모양이다. 나는 마침 아르투로 일리아(Arturo Umberto Illia:1900~1983) 아르헨티나 대통령 취임식에 초대를 받아서 남미 여행 일정을 잡아두고 있던 참이었다. 10월 7일 김정렬 대사와 함께 파라과이의 수도 아순시온을 방문했다. 스트로에스네르 대통령은 나를 보더니 옛 친구를 만나기나 한 듯 막 껴안고는 “당신이 바로 그 사람이냐. 오늘 처음 만나지만 평소 당신을 존경했다. 만나고 싶었다”고 말했다. 그러곤 가슴팍에 주먹만 한 대십자훈장을 달아줬다. 그때 난 스트로에스네르 대통령이 왜 그리 환대를 했는지 진의를 잘 몰랐다. 나중에 알아보니 그는 언론에 코리아에서 굉장한 반공지사가 와서 훈장을 줬다고 대대적으로 홍보를 해댔다. 결국 비슷한 입장에 있는 나를 통해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강화하려는 전략이었던 것 같다. 나는 그때 스트로에스네르 대통령에게 미리 구상한 한국인 이민을 제안했다. “우리 민족이 해외로 나가는 발판을 만들고 싶다. 일본을 통해서 태평양과 인도양으로 나가는 방법도 있지만, 이렇게 파라과이에 근거지를 만들어 브라질과 아르헨티나 등 여러 중남미 나라로 이민 가는 길을 열어야겠다. 당신의 나라는 땅은 굉장히 넓은데 인구가 400만 명에 불과하지 않으냐. 한국에 우수한 노동력이 얼마든지 있으니 이민을 받아들여라.” 파라과이는 국토 면적이 40만7000㎢로, 남한(9만9313㎢)의 네 배가 넘는 데다 국토의 70%가 산지인 우리와 달리 대부분이 평지다. 스트로에스네르 대통령은 내 제안을 흔쾌히 받아들였다. 이렇게 파라과이의 이민 허용을 계기로 중남미 이민시대가 본격적으로 열리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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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한국은 최고회의가 1962년 3월 해외이주법(海外移住法)을 제정하고, 12월 브라질을 시작으로 남미 이민을 시작하던 초기였다. 일본은 100년 전에 이미 하와이와 미국 본토, 브라질·아르헨티나 등지로 이민을 많이 가던 때였다. 60년대 초 한국은 6·25전쟁의 여파로 지독하게 가난했다. 1인당 국민소득(GNP 기준)이래야 82달러(1961년)에 불과했다. 변변한 일자리가 없어 대학을 나와도 노는 실직자들이 넘쳐났다. 지금이야 아이를 너무 안 낳아 사회 문제가 되고 있지만, 그때는 한 집에 자식이 평균 6명이 넘던 시절이었다. 오죽했으면 ‘덮어놓고 아이 낳다 거지꼴 못 면한다’(64년, 대한뉴스)와 같은 산아제한 구호가 나왔겠는가. 65년 시작된 파라과이 농업이민은 어려움이 많았다. 원래 배정됐던 개척지가 개간은커녕 생활조차 할 수 없는 경우가 많았다. 이들은 변변한 농기구 없이 개미떼와 독충과 싸우며 고군분투해야 했다. 이들 중 상당수는 후일 수도 아순시온이나 상파울루(브라질)·부에노스아이레스(아르헨티나)와 같은 대도시로 재이주했다. 처음엔 거리 행상을 하다 봉제업·의류업 등으로 사업영역을 넓혀갔다.
예상치 못한 문제도 있었다. 파라과이 농업이민자의 상당수가 그곳을 정착지로 여기지 않고, 미국과 같은 안정된 선진국으로 밀입국하려 했다. 인근 브라질이나 아르헨티나는 경유지로 여겼다. 영어로 말하면 프로그 점프(frog jump·개구리 뛰기)였다. 이민자들이 처음엔 브라질이나 아르헨티나로 밀항했다가 개구리가 뛰는 것처럼 미국으로 다시 한번 튀어가는 형국이다. 브라질 국경경비대에 체포된 한인들은 대부분 몇십만 달러씩 가지고 있었다. 국경경비대가 “무슨 돈을 그리 많이 가지고 있느냐”고 물으면 이들은 브라질에서 살기 위해서라고 하지 않고 미국으로 가기 위해서라는 대답들을 했다. 브라질 대통령이 화가 나서 “한국민들이 파라과이에서 들어오는 거 받지 말고 전부 내쫓으라”고 했다. 결국 내가 브라질 대통령을 만나 사과하고, 재발 방지를 약속해야 했다.
김종필 초대 중 정 부장(왼쪽)과 김재춘 3대 중정부장이 현직에서 물러나 외유하던 1963년 10월 브라질의 해변 휴양지 코파카바나에서 만났다.
10월 9일 나는 아르헨티나 대통령 취임식에 참석한 뒤 12일 브라질의 옛 수도인 해변도시 리우데자네이루에 들렀다. 그곳에서 나를 4대 의혹 사건의 주범으로 몰아 외유를 떠나게 만들었던 김재춘(육사 5기) 전 중앙정보부장을 만났다. 김재춘은 5·16 때 서울 6관구 상황실을 지키며 실병력 동원을 지휘한 혁명동지였다. 혁명이 성공하자 동지는 나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그런 김재춘도 63년 7월 권력의 자리(중정부장)에 앉은 지 다섯 달도 안 돼 김형욱(육사 8기)에게 물려주고 해외를 떠도는 신세가 되었다. 권력의 무상함과 회한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나는 코파카바나 해변의 코파카바나팰리스호텔 수영장 테라스에 앉아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출렁이는 바닷물 소리가 들렸다. 수영복 차림의 젊은 남녀가 눈앞을 지나갔다. 그때 우리 대사관 직원이 찾아왔다. 김재춘씨가 와 있다는 것이다. 잠시 뒤 김 전 부장이 풀이 죽은 모습으로 나타났다. 우린 의자 둘을 나란히 놓고 앉았다. 내가 “당신 혼자 잘하는 거 같더니 왜 여기 와 있느냐”고 물었다. 그는 “그 자리에 앉아보니 일이란 게 마음대로 되지 않고 세상을 시끄럽게만 했다”며 지난 일들에 대해 내게 사과했다. 나는 “나야 할 수 없이 나와 있지만 당신은 더 돌아다니지 말고 이제 그만 들어가라”고 권유했다. 그는 내가 귀국한 얼마 뒤인 12월 6일 쓸쓸히 서울에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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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14일엔 멕시코의 수도 멕시코시티에 들렀다. 거기서 교포들을 만났다. 40명가량 모였는데 노인들만 한국사람의 모습이었다. 멕시코 교포 중 상당수가 이미 현지 여성들과 결혼해, 아들·손자뻘 되는 젊은 사람들은 혼혈이 많았다. 이들은 구한말인 1905년 일본의 인력송출 회사의 사기계약에 속아 인천 제물포항에서 배를 타고 멕시코로 건너와 에네켄(Henequen) 선인장 농장에서 노예처럼 일한 1000여 명 한인 농부들의 후손이었다. 그들은 한낮에 섭씨 45도까지 올라가는 타는 더위 속에서 에네켄 가시에 찔려가며 4년 동안을 일해야 했다. 안타까웠다. 이제는 좀 제대로 된 이민정책으로 세계 곳곳에 한인들이 자랑스럽게 퍼져나갈 수 있도록 해야 하겠다는 생각에 머리가 무거워졌다.
남미 국가들과 달리 미국은 60년대 중반까지 한국인의 이민을 공식적으로 받지 않았다. 6·25가 끝나면서 미군과 결혼한 한국 여성이나, 양자로 입양된 전쟁고아들이 미국 이주의 대부분이었다. 미국은 린든 존슨(1908~1973년) 대통령의 ‘위대한 사회’ 정책에 따라 65년 아시아계 이민을 허용하는 새로운 이민법(하트-셀러법)이 통과됐으나 발효는 68년에 됐다. 66년 10월 31일 존슨 대통령이 방한했다. 서울시청 앞에서 존슨 대통령 환영 행사가 있었는데, 그 당시 장면이 아직도 생생하다. 옆에 레이디 버드 존슨 부인이 앉아있었다. 바람이 좀 세게 불어 존슨 부인의 머리가 흩어졌다. 그때 존슨 대통령이 호주머니에서 빗을 꺼내더니, 아내의 머리를 빗어 정리해준 뒤 다시 앉았다. 한국 문화에서는 보기 힘든 장면이었다.
청와대에서 존슨 대통령은 박정희 대통령에게 월남 파병에 감사한다며 “뭘 도와주면 되겠느냐”고 물었다. 한국은 64년 비전투부대 파병에 이어, 미국의 요청을 받아들여 65년 청룡부대·맹호부대 등 전투부대도 파병했다. 박 대통령은 “세계 수많은 민족이 모여 미 합중국이 되는 나라인데 한국 민족만 빠져서 될 일이냐. 한국 사람들의 이민을 늘려 미국 시민이 될 수 있는 길을 크게 열어달라”고 요청했다. 나는 그 전날 밤 박 대통령과 미리 상의를 하면서 존슨 대통령에게 미국 이민을 대폭 허용해줄 것을 요구해야 한다고 말씀드렸다. 미국 이민은 1970년대 초 본궤도에 올라 연간 3만 명 이상 나가게 됐다.
● 인물 소사전 린든 존슨(Lyndon Johnson·1908~73)=제36대(1963~69) 미국 대통령. 60년 민주당 대통령 후보 지명전에서 존 F 케네디에게 패해 부통령이 됐지만 63년 11월 케네디 피살 후 대통령에 올랐다. 64년 대선에서 재선됐다. 그는 ‘위대한 사회(Great Society)’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사회·경제적 개혁을 통해 복지정책을 적극적으로 추진했다.
정리=전영기·최준호 기자 chun.younggi@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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