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라질 한인은 어떻게 살고 있을까?
이민 55년 그후
by 손정수
Feb 03. 2018
수 십 년 전부터 5만여 명이 산다는 브라질 교포사회는 내가 보기에는 그리 많지는 않은 것 같다. 가끔 한인 행사 때에 모이는 사람을 세어보면 많아야 2~3천 명 정도 된다. 어린 1.5세 또는 2~3세와 60세 이상의 노령 인구까지 포함한다면 그보다 많겠지만 실제 한인타운 내에서 활동하는 사람을 보면 그리 많지 않은 것 같다. 가장 좋은 수치를 제시해 본다. 대다수의 브라질 교포들은 자영업을 하는데 업체 전화번호를 한데 묶은 한인 주소록이 있다. 여기에는 가장 이름이 등록되는데 대략 2,500명 정도이다.
한 사람당 5인 가족을 기준으로 계산하더라도 1만 2500명이다. 등록 안 된 사람이 2배라 해도 2만 5000명이다. 중요한 건 한인사회에서 활동하는 사람은 이보다 적다. 한인이 몰려 사는 곳으로는 봉헤찌로, 브라스 그리고 아끌리마썽이 있다. 이중 봉헤찌로(Bom Retiro)와 브라스(Bras)는 상가 지역으로 한때 2,000여 개의 한인 가게가 있었다. 대부분 의류제품 가게를 운영했는데 원사, 원단, 부속 등을 파는 의류업과 식당, 식품점, 병원, 변호사 등 서비스 등 다양한 업종에 종사하고 있다.
브라질 이민 역사를 짧게 적어보면 다음과 같다. 6.25 전쟁의 흔적이 다 가시지 않았던 60년대 초. 대한민국 정부는 이민을 장려하며 몇 년간의 사전답사와 연구를 끝내고 1963년 첫 농업 이민을 보냈다. 당시 브라질은 커피와 사탕수수 등 농업에 필요한 일손을 외국 노동자에 의존했고 일본 이민자와 같이 한국 이민자들도 브라질로 초청하게 된다. 농업이민이란 브라질에서 농사를 짓는 조건으로 인구를 받아들였던 것으로 이미 이탈리아, 일본, 독일 등에서 많은 사람이 이민 와서 성공적으로 정착한 역사가 있었다.
이민 선배들의 경험담을 들어보면 모두 머나먼 브라질에서 가족과 멋진 농장을 일구고 사는 것이 꿈이었다. 전쟁 후 피폐해진 한국보다 밝은 미래가 있을 것이라는 희망 속에 출발한 것이다. 말도 안 통하는 배에 온 식구들을 데리고 일본. 홍콩. 남아공을 거쳐 지구 반대편 브라질까지 왔다. 갖은 고생 끝에 도착 후 바로 농장으로 보내져 농사일을 시작했지만. 대부분 농사일에 익숙지 않았고 한국과 확연히 다른 날씨와 풍토병으로 많은 고생을 했다. 특히 병에 걸려 한둘 죽어 나갈 때 많은 고통이 있었다.
정부의 주선으로 산 농장은 이미 농사를 지을 수 없는 지역으로 알려진 곳도 있었고 중간 중개인의 사기로 피해를 보기도 했다. 4계절이 뚜렷한 한국과 달리 더운 지방이라 음식도 맞지 않았고 더군다나 아이들은 학교도 없어 공부도 못하는 경우가 다반사였다. 우리 민족 특유의 교육열이 높으셨던 한인들은 이런 농장에서 있어봤자 미래가 안 보인다고 결정하고 노동계약 기간이 남아 있음에도 불구하고 농장을 벗어나 시내로 잠입한다. 허름한 시내에 자리를 잡은 한인들은 처음에는 가까운 일본인에게 물건을 소개받아 집마다 돌아다니며 옷을 판매하는 영업에 종사한다.
그러다 차츰 옷을 만드는 유대인으로부터 인정받아 일본인을 거치지 않고 직접 거래하게 되었다. 이후 유대인보다 더 빨리 좋게 옷을 만들기 시작하며 브라질 시장을 석권하게 된다. 70년대부터 농장을 떠나 시내로 나온 이들은 점차적으로 상업에 종사하며 한인 특유의 부지런함으로 다른 민족들을 따 돌리고 의류업계를 장악하게 됐다. 왜 의류를 시작했냐 하면 먼저 당시 옷을 만들기 위해서는 특별한 기술이 필요 없었다. 젓가락질로 단련된 손은 예쁘고 값싼 제품을 만드는 데에 도움이 되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의류제품은 저가의 비용으로 많은 이윤을 남기는 데에 있었다. 80년대를 선두로 급격히 성장한 한인사회는 한때 2500여 개의 의류업체를 가지고 있어 국내 의류계에 상당한 부분을 차지했었다. 1990년대 중반에는 한인촌이며 의류의 중심지인 봉헤찌로와 브라스 지역에서 전체 의류의 60%를 생산했었다. 직. 간접적으로 25만 명의 고용창출을 냈었는데 지금은 중국에서 몰려오는 수입품과 전국으로 의류 생산지가 퍼지며 하락세에 있다. 모두 2000년대 초반만 해도 한인촌에서 만들었었는데 이제 시대가 변한 것이다.
부모 세대가 볼펜으로 뽄뜨고 가위로 안감 자르던 시대에서 요즘 2세는 패션디자인을 전문으로 공부하고 레이저로 안감을 자르는 등 탈바꿈했다. 유럽. 미국도 1년에 수차례 돌아보며 새로운 유행 색상. 원단을 배워와 이곳 브라질에 맞게 다시 제작했다. 한인이 유행을 리더 하다 보니 전국 대형 의류판매장 구매담당자와 도매업자 가게를 돌며 물건을 사기도 했다. 이들은 유럽이 아니라 바로 한인촌에서 유행을 배워가는 것이었다.
브라질 한인 생활 수준은 중산층이다. 몇 년 전만 해도 대부분 중산층이었으나 요즘에는 한인사회가 급격히 어려워지며 빈부격차가 심각하게 나타나고 있다. 말 그대로 어렵게 사는 사람들이 많다. 브라질에 이민 오는 사람들의 발전 단계는 언제나 같았다. 90년대만 하더라도 처음 남의 제품을 판매하는 벤데(Vende:판매)를 시작한다. 3년 정도 하며 어느 정도 모은 자본금을 가지고 조그만 가게를 시작하고. 이를 바탕으로 사업을 점차 늘려 가는 것이 정상적인 발전이었다.
사업이 정상궤도에 들어서면 연말 장사를 하고 나면 적게는 수만 불에서 많게는 수십만 불이 남아 집을 사고 사업을 늘리는 등 안정된 생활을 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그러나 요즘에는 상황이 많이 바뀌어 돈 벌기 쉽지 않다 오히려 손해 보는 곳도 많다. 고인플레 시절에는 시중에 돈이 많이 돌아 장사가 수월했었다. 더군다나 당시에는 경쟁이 없었던 시절이라 한 모델을 수십만 장씩 만들었으나 지금은 한 모델 당 수십장만 팔리는 등 소비자의 취향도 많이 고급화되어 이들 구색을 갖추다 보니 원가가 많이 비싸졌고 수익도 많이 줄었다.
십몇 년 전만 해도 대충 눈대중으로 만들었었다. 지금은 1년에 몇 번씩 유럽을 다니며 패션 감각을 익히는데 이들은 2세로 포어를 잘 한다. 이곳에서의 생활은 대충 오전에 7시에서 8시에 가게 문을 열고 오후에는 5시 반에 닫는다. 나머지 시간에는 가게 정리, 제품 생산 준비 등으로 분주하지만 그래도 시간에 쫓기며 살지는 않는다. 주말에는 대부분 교회에 나가고 오후에는 골프, 낚시, 테니스 등 여가 생활을 주로 한다. 여가 생활로 빼놓을 수 없는 것 중 하나가 바로 술과 음식이다.
소고기가 싸고 흔하다 보니 항상 고기를 구워 먹는데 여기에 술을 한 잔 걸치며 하루의 피로를 해소하는 사람이 많다. 술은 대체로 맥주와 위스키를 마시는데 예전에는 8년산 Old Eight라는 술을 대중적으로 많이 먹었으나 요즘에는 역시 조니워커를 많이 마신다. 때로는 브라질 전통의 술인 까샤사(Cachaca)를 마시는데 슈퍼에서 한 병에 10불 미만이라 싼값에 찾는 사람들이 많다. 소주는 슈퍼에서 5불 그리고 식당에서는 10불 하는데 위스키 입맛이라 그런지 자주 많이 안 마시고 오히려 맥주를 많이 마신다.
요즘 불경기로 돈 벌기가 쉽지 않다. 그래도 아직 까지는 중산층 생활을 하며 자유롭게 살 수 있다는 것이 가장 장점이다. 그렇다고 쉬운 것은 아니지만 일단 자기 계발 시간이 많이 남는다. 일을 적게 하는 것은 아니지만 한국, 미국과 비교하면 이곳 한인은 시간이 많이 남는다. 차별 없는 사회는 아니지만, 한인 대부분 인정받고 하고 싶은 만큼 할 수 있다는 것이 중요하다. 중남미 다른 나라들을 보면 한인에 대한 반감과 차별로 서러울 때가 많다. 내 맘대로 할 수 있다는 게 얼마나 평범하면서 중요한 것인지 경험한 사람만 알 수 있을 것이다.
요즘 우리 한인이 많이 종사하는 의류업계가 위기라고 한다. 예전에는 브라질에서 생산하는 게 저렴했는데 세금과 비용이 올라 어려워졌다. 십몇 년 전부터 중국에 위탁 생산하여 수입했는데 이들 중국인이 거꾸로 물건을 밀수해 반값에 팔고 있다. 현찰을 들고 다니며 주위 가게를 하나씩 사들여 완전 중국화 되었다. 바느질 하청을 맡던 볼리비아 인도 이제 제법 기술이 늘어 한인과 같이 가게를 직접 운영하고 있다.
부모로부터 가게를 물려받은 2세는 경쟁이 심하고 비용이 올라 가게를 접고 있다. 예전과 같이 수익도 보장 못 하고 오히려 빚만 늘리는 형편이다. 가게를 문 닫는 그 날부터 빚잔치를 해야 하기에 울며 운영하는 사람도 있다. 옷가게를 넘어 다른 업종으로 바꾸는 사람도 있는데 다시 도전하려니 어려움이 이만저만 아니다. 한인촌은 연일 커피집과 식당이 늘고 있다. 새로운 도전으로 먹는장사를 시작하는데 정착하려면 몇 년 걸릴 것이다. 55년 이민 역사가 변하는 우리 브라질 한인사회. 참으로 많이 걱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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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정수착한브라질이야기 칼럼니스트
떠나기 전 꼭 읽어야 할 브라질 이야기저자
브라질에 35년 살며 보고 배운 것을 재미있게 쓰는 '착한 브라질 이야기'. 브라질 한식 홍보 운동 '반찬닷컴 브라질' 대표입니다. 이번에 드디어 책도 냈습니다!
수 십 년 전부터 5만여 명이 산다는 브라질 교포사회는 내가 보기에는 그리 많지는 않은 것 같다. 가끔 한인 행사 때에 모이는 사람을 세어보면 많아야 2~3천 명 정도 된다. 어린 1.5세 또는 2~3세와 60세 이상의 노령 인구까지 포함한다면 그보다 많겠지만 실제 한인타운 내에서 활동하는 사람을 보면 그리 많지 않은 것 같다. 가장 좋은 수치를 제시해 본다. 대다수의 브라질 교포들은 자영업을 하는데 업체 전화번호를 한데 묶은 한인 주소록이 있다. 여기에는 가장 이름이 등록되는데 대략 2,500명 정도이다.
한 사람당 5인 가족을 기준으로 계산하더라도 1만 2500명이다. 등록 안 된 사람이 2배라 해도 2만 5000명이다. 중요한 건 한인사회에서 활동하는 사람은 이보다 적다. 한인이 몰려 사는 곳으로는 봉헤찌로, 브라스 그리고 아끌리마썽이 있다. 이중 봉헤찌로(Bom Retiro)와 브라스(Bras)는 상가 지역으로 한때 2,000여 개의 한인 가게가 있었다. 대부분 의류제품 가게를 운영했는데 원사, 원단, 부속 등을 파는 의류업과 식당, 식품점, 병원, 변호사 등 서비스 등 다양한 업종에 종사하고 있다.
브라질 이민 역사를 짧게 적어보면 다음과 같다. 6.25 전쟁의 흔적이 다 가시지 않았던 60년대 초. 대한민국 정부는 이민을 장려하며 몇 년간의 사전답사와 연구를 끝내고 1963년 첫 농업 이민을 보냈다. 당시 브라질은 커피와 사탕수수 등 농업에 필요한 일손을 외국 노동자에 의존했고 일본 이민자와 같이 한국 이민자들도 브라질로 초청하게 된다. 농업이민이란 브라질에서 농사를 짓는 조건으로 인구를 받아들였던 것으로 이미 이탈리아, 일본, 독일 등에서 많은 사람이 이민 와서 성공적으로 정착한 역사가 있었다.
이민 선배들의 경험담을 들어보면 모두 머나먼 브라질에서 가족과 멋진 농장을 일구고 사는 것이 꿈이었다. 전쟁 후 피폐해진 한국보다 밝은 미래가 있을 것이라는 희망 속에 출발한 것이다. 말도 안 통하는 배에 온 식구들을 데리고 일본. 홍콩. 남아공을 거쳐 지구 반대편 브라질까지 왔다. 갖은 고생 끝에 도착 후 바로 농장으로 보내져 농사일을 시작했지만. 대부분 농사일에 익숙지 않았고 한국과 확연히 다른 날씨와 풍토병으로 많은 고생을 했다. 특히 병에 걸려 한둘 죽어 나갈 때 많은 고통이 있었다.
정부의 주선으로 산 농장은 이미 농사를 지을 수 없는 지역으로 알려진 곳도 있었고 중간 중개인의 사기로 피해를 보기도 했다. 4계절이 뚜렷한 한국과 달리 더운 지방이라 음식도 맞지 않았고 더군다나 아이들은 학교도 없어 공부도 못하는 경우가 다반사였다. 우리 민족 특유의 교육열이 높으셨던 한인들은 이런 농장에서 있어봤자 미래가 안 보인다고 결정하고 노동계약 기간이 남아 있음에도 불구하고 농장을 벗어나 시내로 잠입한다. 허름한 시내에 자리를 잡은 한인들은 처음에는 가까운 일본인에게 물건을 소개받아 집마다 돌아다니며 옷을 판매하는 영업에 종사한다.
그러다 차츰 옷을 만드는 유대인으로부터 인정받아 일본인을 거치지 않고 직접 거래하게 되었다. 이후 유대인보다 더 빨리 좋게 옷을 만들기 시작하며 브라질 시장을 석권하게 된다. 70년대부터 농장을 떠나 시내로 나온 이들은 점차적으로 상업에 종사하며 한인 특유의 부지런함으로 다른 민족들을 따 돌리고 의류업계를 장악하게 됐다. 왜 의류를 시작했냐 하면 먼저 당시 옷을 만들기 위해서는 특별한 기술이 필요 없었다. 젓가락질로 단련된 손은 예쁘고 값싼 제품을 만드는 데에 도움이 되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의류제품은 저가의 비용으로 많은 이윤을 남기는 데에 있었다. 80년대를 선두로 급격히 성장한 한인사회는 한때 2500여 개의 의류업체를 가지고 있어 국내 의류계에 상당한 부분을 차지했었다. 1990년대 중반에는 한인촌이며 의류의 중심지인 봉헤찌로와 브라스 지역에서 전체 의류의 60%를 생산했었다. 직. 간접적으로 25만 명의 고용창출을 냈었는데 지금은 중국에서 몰려오는 수입품과 전국으로 의류 생산지가 퍼지며 하락세에 있다. 모두 2000년대 초반만 해도 한인촌에서 만들었었는데 이제 시대가 변한 것이다.
부모 세대가 볼펜으로 뽄뜨고 가위로 안감 자르던 시대에서 요즘 2세는 패션디자인을 전문으로 공부하고 레이저로 안감을 자르는 등 탈바꿈했다. 유럽. 미국도 1년에 수차례 돌아보며 새로운 유행 색상. 원단을 배워와 이곳 브라질에 맞게 다시 제작했다. 한인이 유행을 리더 하다 보니 전국 대형 의류판매장 구매담당자와 도매업자 가게를 돌며 물건을 사기도 했다. 이들은 유럽이 아니라 바로 한인촌에서 유행을 배워가는 것이었다.
브라질 한인 생활 수준은 중산층이다. 몇 년 전만 해도 대부분 중산층이었으나 요즘에는 한인사회가 급격히 어려워지며 빈부격차가 심각하게 나타나고 있다. 말 그대로 어렵게 사는 사람들이 많다. 브라질에 이민 오는 사람들의 발전 단계는 언제나 같았다. 90년대만 하더라도 처음 남의 제품을 판매하는 벤데(Vende:판매)를 시작한다. 3년 정도 하며 어느 정도 모은 자본금을 가지고 조그만 가게를 시작하고. 이를 바탕으로 사업을 점차 늘려 가는 것이 정상적인 발전이었다.
사업이 정상궤도에 들어서면 연말 장사를 하고 나면 적게는 수만 불에서 많게는 수십만 불이 남아 집을 사고 사업을 늘리는 등 안정된 생활을 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그러나 요즘에는 상황이 많이 바뀌어 돈 벌기 쉽지 않다 오히려 손해 보는 곳도 많다. 고인플레 시절에는 시중에 돈이 많이 돌아 장사가 수월했었다. 더군다나 당시에는 경쟁이 없었던 시절이라 한 모델을 수십만 장씩 만들었으나 지금은 한 모델 당 수십장만 팔리는 등 소비자의 취향도 많이 고급화되어 이들 구색을 갖추다 보니 원가가 많이 비싸졌고 수익도 많이 줄었다.
십몇 년 전만 해도 대충 눈대중으로 만들었었다. 지금은 1년에 몇 번씩 유럽을 다니며 패션 감각을 익히는데 이들은 2세로 포어를 잘 한다. 이곳에서의 생활은 대충 오전에 7시에서 8시에 가게 문을 열고 오후에는 5시 반에 닫는다. 나머지 시간에는 가게 정리, 제품 생산 준비 등으로 분주하지만 그래도 시간에 쫓기며 살지는 않는다. 주말에는 대부분 교회에 나가고 오후에는 골프, 낚시, 테니스 등 여가 생활을 주로 한다. 여가 생활로 빼놓을 수 없는 것 중 하나가 바로 술과 음식이다.
소고기가 싸고 흔하다 보니 항상 고기를 구워 먹는데 여기에 술을 한 잔 걸치며 하루의 피로를 해소하는 사람이 많다. 술은 대체로 맥주와 위스키를 마시는데 예전에는 8년산 Old Eight라는 술을 대중적으로 많이 먹었으나 요즘에는 역시 조니워커를 많이 마신다. 때로는 브라질 전통의 술인 까샤사(Cachaca)를 마시는데 슈퍼에서 한 병에 10불 미만이라 싼값에 찾는 사람들이 많다. 소주는 슈퍼에서 5불 그리고 식당에서는 10불 하는데 위스키 입맛이라 그런지 자주 많이 안 마시고 오히려 맥주를 많이 마신다.
요즘 불경기로 돈 벌기가 쉽지 않다. 그래도 아직 까지는 중산층 생활을 하며 자유롭게 살 수 있다는 것이 가장 장점이다. 그렇다고 쉬운 것은 아니지만 일단 자기 계발 시간이 많이 남는다. 일을 적게 하는 것은 아니지만 한국, 미국과 비교하면 이곳 한인은 시간이 많이 남는다. 차별 없는 사회는 아니지만, 한인 대부분 인정받고 하고 싶은 만큼 할 수 있다는 것이 중요하다. 중남미 다른 나라들을 보면 한인에 대한 반감과 차별로 서러울 때가 많다. 내 맘대로 할 수 있다는 게 얼마나 평범하면서 중요한 것인지 경험한 사람만 알 수 있을 것이다.
요즘 우리 한인이 많이 종사하는 의류업계가 위기라고 한다. 예전에는 브라질에서 생산하는 게 저렴했는데 세금과 비용이 올라 어려워졌다. 십몇 년 전부터 중국에 위탁 생산하여 수입했는데 이들 중국인이 거꾸로 물건을 밀수해 반값에 팔고 있다. 현찰을 들고 다니며 주위 가게를 하나씩 사들여 완전 중국화 되었다. 바느질 하청을 맡던 볼리비아 인도 이제 제법 기술이 늘어 한인과 같이 가게를 직접 운영하고 있다.
부모로부터 가게를 물려받은 2세는 경쟁이 심하고 비용이 올라 가게를 접고 있다. 예전과 같이 수익도 보장 못 하고 오히려 빚만 늘리는 형편이다. 가게를 문 닫는 그 날부터 빚잔치를 해야 하기에 울며 운영하는 사람도 있다. 옷가게를 넘어 다른 업종으로 바꾸는 사람도 있는데 다시 도전하려니 어려움이 이만저만 아니다. 한인촌은 연일 커피집과 식당이 늘고 있다. 새로운 도전으로 먹는장사를 시작하는데 정착하려면 몇 년 걸릴 것이다. 55년 이민 역사가 변하는 우리 브라질 한인사회. 참으로 많이 걱정된다.
한인사회
이민
브라질 댓글 2
손정수착한브라질이야기 칼럼니스트
떠나기 전 꼭 읽어야 할 브라질 이야기저자
브라질에 35년 살며 보고 배운 것을 재미있게 쓰는 '착한 브라질 이야기'. 브라질 한식 홍보 운동 '반찬닷컴 브라질' 대표입니다. 이번에 드디어 책도 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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