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riday, October 29, 2021

[살아남은 형제들] 16번째 증언 `박인근 `호주골프장` 2만여 평, 사위한테 몰래 넘겨` 형제복지원 피해자(골프장 인부) 임봉근 씨 - 부산일보

Song Jiyoung
19 h  · 
형제복지원 원장 박인근의 호주 시드니근방 Milperra Gold Club을 사서 운영했고, 
그 처남 임영순은 호주에 이민와서 호주평강장로교회 목사를 했다고 한다. 

박인근은 한달에 한번꼴로 호주에 와서 골프장 관리를 했고, 
한국에서 노예와 같이 노동자들을 데려와 일을 시키고 폭력을 행사했다고. 
이에 관해 알고계신 분은 메세지 주시기 바랍니다.


[살아남은 형제들] 16번째 증언 `박인근 `호주골프장` 2만여 평, 사위한테 몰래 넘겨` 형제복지원 피해자(골프장 인부) 임봉근 씨 - 부산일보



[살아남은 형제들] 16번째 증언 "박인근 '호주골프장' 2만여 평, 사위한테 몰래 넘겨" 
형제복지원 피해자(골프장 인부) 임봉근 씨

박 원장 한 달에 한 번씩 호주 찾아와
매상 챙기며 골프장 시설·돈 관리
"모른 체 해달라" 셋째 사위한테 넘겨
고작 주급 20달러…맨몸으로 쫓겨나
이대진 기자 djrhee@busan.com






입력 : 2020-08-14 16:54:00수정 : 2020-08-22 12:09:06게재 : 2020-08-15 12:00:00




※편집자주-1987년 봄, 부산 사상구 주례동 백양산 자락. 육중한 담장 너머로 '형제복지원'의 참상이 세상에 알려졌다. 12년 동안 공식 사망자만 513명. 이후 33년이 지나서야 올해 5월, 과거사법 개정안이 통과되면서 진상 규명과 책임자 처벌을 위해 작은 한 걸음을 내디뎠다. <부산일보>는 '살아남은 형제들-형제복지원 절규의 증언' 영상구술사 프로젝트를 통해 피해자들 기억 속 진실의 조각을 맞춰보려 한다. 33인의 목소리가 모여 33년 전 '한국판 아우슈비츠'의 실체를 밝히는 한 걸음, 수만 명 피해자의 아픔을 치유하는 다음 걸음으로 이어지길...('살아남은 형제들' 시리즈는 매주 토요일 연재됩니다.)


<간추린 이야기>

1987년 박인근 원장이 감옥에 들어가자 형제복지원은 '해방'을 맞았다. 시설 열쇠꾸러미를 관리하던 임봉근(73) 씨는 혼자만 나올 수 없단 생각에 내무반 등 곳곳의 문을 땄다.

복지원에서 나왔지만 세상은 녹록지 않았다. 임 씨에겐 마땅히 갈 곳이 없었다.

이곳 저곳을 전전하던 중 박인근 원장의 막내 동생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결국 형제복지원에서 운영하는 장애인 시설에서 각종 공사와 빨래, 청소 등을 도맡게 됐다.

박인근 원장은 고작 징역 2년 6개월을 산 뒤 풀려났다. 임 씨는 박 원장에게서 "호주로 가서 일해볼 생각이 없냐. 거기 가서 골프 기계도 고치고 하라"는 '강압'이나 다름없는 제의를 받았다.

1995년 가을, 임 씨는 영어 한 마디 할 줄 모르는 상태로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목적지는 시드니에서 차로 35~40분쯤 더 달려야 나오는 '밀페라'. 박인근 원장이 소유한 골프장을 관리하는 일이었다. 무려 2만여 평(약 8만㎡). 드넓은 잔디를 다 손질하려면 3~4시간만 자며 꼬박 사나흘 깎아야 했다. 골프 기계가 고장나면 시도때도 없이 공구를 들었다.

박 원장은 한 달에 한 번, 빠짐없이 골프장으로 날아왔다. 공이 얼마나 나갔는지, 매상은 얼마나 올랐는지, 잔디 상태는 괜찮은지 등을 깐깐하게 챙겼다.

현지에선 박 원장의 셋째 사위와 막내 아들, 그리고 임 씨가 골프장을 관리했지만 궂은 일은 사실상 임 씨가 도맡았다.


어느 날, '겨울 장마'로 잔디깎이(풀차) 바퀴가 계속 빠져 제대로 잔디 관리가 안 됐다. 풀이 자라 골프공이 안 보일 지경이었는데, 마침 박 원장이 골프장을 찾아 사달이 났다.

골프채를 사정없이 휘둘렀고 허리 등을 맞은 임 씨는 그대로 고꾸라졌다. 30분쯤 흘렀을까. 고함 소리를 들은 이웃 호주 사람들이 경찰에 신고했다. 조사를 받았지만 이후 생활은 그대로였다.

4년이 지나서야 동료 1명이 충원됐다. 번갈아가며 3개월을 호주에서 일하고, 귀국해 열흘 동안 비자를 받아 다시 출국하는 생활이 계속됐다.

월급은 언감생심. 매주 용돈으로 20달러 정도 받아서 빵과 음료수를 사먹으면 끝이었다.

형제복지지원재단이 기장군 정관에 중증장애인요양시설 '실로암의 집'을 지을 땐 한동안 부산에 머물며 용접일을 도맡았다. 2년 뒤 산사태가 일어나 장애인 아동 4명이 숨지는 참사가 벌어지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호주에서 셋째 사위와 그의 아버지가 아침부터 찾아왔다. 박 원장이랑 얘기가 됐고 자신들에게 소유권을 넘기려고 하니 "조용히 묻어달라"는 부탁이었다.

엮이기 싫었던 임 씨는 비행기표를 끊어 완전히 한국으로 돌아왔다. 임 씨 출입국 기록을 보면, 1995년 9월부터 2005년 2월까지 18차례나 호주를 오갔다.

임 씨 여동생(임필순·71)은 형제복지원 일가에서 일하던 시절 오빠 모습을 생생히 기억한다. 형제원 아래 철도 쪽 경비를 통해 연락을 주고 받은 그녀는 간혹 돈이나 과자 등을 사들고 오빠를 보러 가기도 했다고 한다. 여기저기 맞아서 얼굴을 못 알아볼 정도일 때도 있었다.

호주골프장에서만 9년, 형제복지원 일가 손아귀에서 십수 년간 일했지만 여동생 집에 돌아왔을 때 임 씨는 빈털터리였다.
채소밭에서 일하고 있는 원생들. 형제복지원 운영자료집
2002년 8월 10일 산사태로 4명이 사망하는 사고가 발생한 '실로암의 집'. 부산일보DB



<더 많은 이야기>

■ 박인근 구속, '해방'인 줄 알았는데…

전두환이 정권 잡을 때 형제복지원에 전부 다 붙들려 있었다 아입니까. 깡패고 뭐 거러지고 뭐고 전부 다 잡아넣어버렸다 아입니까. 그래 이제 그길로 붙들려 들어갔어요.

쌀을 얼마나 지하실에 묵혀 놨던지... 쌀이 곰팡이가... 썩어가지고. 그거 가지고 밥을 해가지고. 좋은 거는 이제 밖으로 팔아무뿌고.

김해 채소밭이 굉장히 넓다 아입니까. 시래기 주우러 가는 기라예. 대여섯 대가 짐차로 나갑니다. 그걸 가져와서 말려가지고... 국을 끓여가지고.

불한당 전부 붙들어가지고 시래기국 끓여주고 뭐. 옳게 먹이지도 않고 일만 쌔가 빠지게 시키고. 그때 박인근(형제복지원 원장)이가 돈을 끌어모았는 거라.

형제복지원 뒤에 가면 굴이 커다랗게 있어요. 자세히 안 보면 몰라요. 그 안에 숨어 있다가 새벽 4시 반 돼서 잡혀간 기라예. 박인근이가 말입니다.

잡혀가고 나서는 이제 해방이 돼버린 거예요. 그때 열쇠를 내가 가지고 있었어요. 문을 내가 다 풀어줬지예. 놔둬보면 뭐합니까... 내 혼자 나오면 뭐합니까. 그거 풀어주고 나는 마 열쇠고 뭐고 다 집어던지뿌고. 그러고 이제 왔어요.

갈 데가 있습니까 또 인자... 돌아다니다가...

(몇 년 뒤에) 형제복지원에서 오라고 전화가 왔어요.

(찾아가니 박인근 원장이) "니 호주 갈 마음이 있나" 이러는 기라. "거기 가라 인마 공기 좋고... 거기 가서 일 좀 해라. 골프 기계도 고치고".

한 100마지기 돼요, 골프장 평수가. 일요일날 안 쉬고 (잔디) 다 깎으려면 한 4일 풀차로 끌고 댕겨야... 그러면 잔디 다 깎아요.

골프 기계 고장나면 그거 고치러 나와야 되지. 뭐 잠 많이 자야 3시간 반~4시간...
박인근 일가 소유의 '호주골프장' 주차장에서 설비 작업을 하고 있는 임봉근 씨.

■ 골프장 잔디 깎다 개 맞듯 맞아

장마가 지니까 풀차가 못 다니는 거예요... 발통이 빠져서. 잔디가 길어서 공이 잘 안 보이는 기라예.

(박인근 원장이 잔디 제대로 안 깎았다고) 골프채 가지고 사정없이 마 허리 여기 때려뿟는데. '아' 소리도 못 하고 그 자리에 폭 주저앉아가지고 헤딱 꼬부러져가지고. 한 30분 꼼짝도 못 하고 그냥 꼬부러져가 있었어요.

근처에 이웃 사람들이 호주 사람들이 많이 살아요. 때리는 고함 소리를 듣고 그 사람들이 박인근이 보고 욕을 하고 막 야단이 난 모양이라요.

즈그 사위하고 즈그 아들, 나... 셋이 마... 개도 그렇게 안 맞아요.

내 혼자 한 4년 하다가 그 사람을 내가 받았어요. (박인근 원장한테) 보내달라고 했지.

그래 이제 왔다갔다 둘이 바꿔치기 하지. 내가 먼저 (한국에) 들어와가지고 한 열흘 있다가... 또 비자 내가지고 (호주에) 들어가고.

그 사람도 석 달 있다가 (한국에) 들어와가지고. (다시 호주 가서) 골프공 줍고 뭐 또 풀 베고...

밥 얻어먹고 담배 (하루에) 두 갑씩 피우고. 1만 6000원가지고 일주일 내내 빵 같은 거 사가지고 (먹고).

(일주일에 20불?)

예. 뭐 모은 돈이 어딨습니까.

(한국으로) 나올 때 이제 내 잡비 쓰라고 30불씩, 50불씩 주는데. 여기(한국에) 오면 즈그 아버지 박인근이 알고 있는 기라예.

"썼나?" "여기 있어요" 50불 던져 줘버렸다고.
호주골프장에서 하루 단위로 매출을 집계해 한국으로 보낸 팩스 문건. 부산일보DB

■ 셋째 사위에게 넘어간 '호주골프장'

밀페라 골프장... 시드니에서 골프장 가려면 40분, 35분 걸려요. 100마지기 돼요, 100마지기. 그만치 넓어요.

반은 전부 풀밭이고. 거기서 반만 톡 깨가지고 동쪽으로...(골프장으로 썼어요).

(한국 사람들이 골프장에 온 적이 있나요?)

많이 와요. 한국 사람들 (골프) 가르쳐주는 데 1시간에 얼마 받냐 하면 15불 받거든요. 부산 사람도 거기 더러 와요.

(박인근이 수시로 와서 관리를 하던가요?)

한 달에 한 번씩 꼭 오지예. 장부 계산 이제... 하루에 공이 몇 개 나갔나. 매상이 얼마 올라갔나. 잔디가 기나 안 기나 그거 조사하러 오는 거지요.

즈그 아들이 처음에... 막내아들이 그걸 보고 있었어요. 근데 나한테 맡겨놔버리고 마... 3일 있다 들어오고 4일 있다 들어오고... 뭐 신경을 안 쓰는 기라.

그래 할 수 없어... 박인근이한테 전화를 안 했습니까. 호주에 있는 사위를 여기로 보내든가... 보내주소 하니까...

(매일매일 팩스를 한국으로 보냈나요?)

예예... 사위가 보내지. 딴 사람은 보낼 사람이 없거든.

어느 날 사위하고 즈그 아버지하고 아침에 떡 왔어. 골프장을 아버지 앞으로 넘기려고 하는데. 이걸 누가 알면... 골치가 아프니까. 묻어주면 어떻겠냐 이러는 거야.

세 번이나 나한테 찾아왔어. 그래 죽어도 안 한다고 했어... 난 모른다고...

임봉근 씨 말이 어디 터져버리면 골프장이 국가로 넘어간다 이기라. 아 그거 넘어가디 말디 내가 알 게 뭐인교.

(박인근 원장) 사위가 4명인데... 저 호주 있는 사위가 제일 못살았어요. 그래 지(그 사위)가 하는 말이... 딴 사람은 (박인근 원장이) 집 사주고 전부 다 해줬다 이기라.

(자꾸 골프장 얘기를 해서) 나갈란다 도저히 내 여기 못 있겠다. 비행기표를 끊어줘요... 그래서 보따리 싸가지고 나왔어요.
형제복지지원재단이 기장군 정관에 문을 연 중증장애인요양시설 '실로암의 집'. 형제복지원 운영자료집
2002년 8월 10일 산사태로 4명이 사망하는 사고가 발생한 '실로암의 집'. 부산일보DB

■ 먼길 돌아 집에 오니 '빈털터리'

(박인근 원장의) 막내 동생... 고게 굉장히 못됐어요. 고게 이제 사람을 잘 팼다고. 몽둥이로 마 두드려 패고... 말 안 들으면 이리 패뿌고 저리 패뿌고.

(장애인시설에) 방을 만들어가지고... 문도 쇠문 만들어가지고. (말 안 들으면) 거기 주워넣어뿌고 자물쇠로 잠가뿌고. 밥도 문 열어가지고 넣어주면 이제... 한 숟가락 떠먹고. 대변도 그 안에서 똥통 만들어가지고...

(박인근 원장이) 영창 살다 나와가지고... 장애자 시설을... 부산시에서 '박인근이 아니면 할 사람이 없다'. 주례동 (형제복지원) 땅은 팔아뿌고 (기장군) 정관 땅을 샀어요.

(정관 '실로암의 집')지을 때 내가 같이 짓고... 용접도 전부 내가 다 하고... 용접을 밤새도록 마. 잠 많이 자야 1시간 아니면 2시간밖에 못 잤어요.

다 짓고 나서 1년인가 2년인가 있다가 뒤에 산사태 그게 때려가지고. 애들 그때 3명인가 죽었어요.

성경책 보고 이름을 다 지은 기라예. '실로암의 집' 하는 것도 성경책에 보면 '실로암의 집' 나오거든요. '욥의(마을)' 하는 그것도 성경책 보면...


*추가* 임필순(임봉근 씨 여동생) 씨 증언

우리 보는 데서는 안 때려요... 거기 가서 때리지.

그래 한번은 전화가 왔더라고. 그래 가니까 여기 입이고 뭐시고 다 터져가지고. 얼굴 알아보지도 못할 상태로 해가지고. 창문을 이래 내다보고 있더라고예.

그 철도길에 경비가 하나 있었어요. (오빠가) 우리집 전화번호를 가르쳐줘가지고. 그래가지고 내가 (거기 있는 줄) 알았지예.

한번은 돈을 8만 원을 가져오라고... 그때 당시에 돈 8만 원 컸습니다. 가지고 갔더만은... 오빠는 돈 구경도 못 했고.

이제 돌아오면서 눈물을 흘리고... 오빠 보는 데서는 눈물 안 흘리고...

어느날 갑자기 (집에) 왔더라고. "우째 오빠 왔노?" 하니까. "박인근이 가라고 해서 왔다" 하는 거라. 맨몸으로 쫓아 내보낸 거라예.

이대진 기자 djrhee@

※본 기획물은 언론진흥기금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출처: 부산일보] http://www.busan.com/view/biz/view.php?code=2020081413544807568&fbclid=IwAR0VoUNOmzJ57-ibGKYKKOxlRhwafEJmDFDjBRm31WPo0NYESU-vPVSTTkQ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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