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영순목사는 지역신문에 소개되기도 (물론 형제복지원 관여 부분은 제하고):
호주평강장로교회를 23년째 맡아 목회해 오던 임영순(66) 목사가지난 7월 7일은퇴했다.
이제성역을조용히내려놓고호주한인교회를위한새로운비전을품고있는임목사는호주한인교회역사의소용돌이와함께삶을같이해온한인교회사의산증인중한사람이다.
분쟁과분열로얼룩진한인교회역사속에서임목사가던지는“연약한교회에끝까지남아있는성도들께감사한다.”는메시지는의미심장하다.
임목사는1986년가나안장로교회담임으로이민목회를 시작했다.
1990년 2월 호주평강장로교회를 개척한그는 시드니한인교회연합회 회장과 대양주예수교장로회 초대총회장으로 봉사했다.
은퇴예배에서 많은 사람들의마음에잔잔한감동을던져주었던임목사를지난7월18일자택에서만났다.
이민목회 27년‘조기은퇴
임목사는얼굴이약간야윈듯보였다.하지만핸섬한외모와잘정돈된언어에서강하면서도부드러운그의영성을 가늠할 수 있었다. 그는 자리에 앉자마자 홍관표목사(시드니중앙장로교회원로목사)얘기를꺼냈다.“언젠가 홍 목사님을 만났는데 저보고 그러시더라고요.‘은퇴하신다면서요?’ ‘네, 얼마 안 남았습니다.’ ‘은퇴해 보십시오.’ ‘왜요?’ ‘인생이 싹 달라집니다.’뭘 그렇게 처절하게 느끼셨는지 그 뉘앙스가‘당신도 한 번해봐라.’그런의미인데기분이묘하더라고요. 경험자이시니까요.허허허.”그는말을이었다.“그때가한달전일겁니다. 그런데막상은퇴를하니까요, 흔한말로하루가천년같이시간이그리더뎌요.평소 목회할 때는 그래도 준비가 있지 않습니까? 물론하던 일은 다하고 있어요. 새벽에 나가 기도하고 운동하고다하는데도한주가그렇게길수가없어요
그런데 저는 은퇴할 때 이 얘기만 했어요. ‘하나님께감사하고 죄송하고 연약한 교회에서 끝까지 남아있는성도들께 감사하고 아내와 자녀들이 교인이며 자녀로수고한데대해감사하고미안하다’고요.정말잘못한것밖에생각이안나송구스러울뿐입니다.”
-66세에조기은퇴하신이유가있으십니까?′
저는부족하고허물많은사람이지만그동안하나님이은혜로목회를감당하게하셨습니다. 제가호주에서사역한기간은27년이고그중호주평강장로교회에서의사역은23년이었습니다.한마디로 목회는 하나님의 영에 달려있는 거지만 저보다 훨씬 더 나은 분이 해야만 되겠다는 생각으로 성도들한테 미리 공표를 했었어요. 모든 것이 은혜라고생각하고감사한마음이들었습니다.”임목사는성도들에게‘조기은퇴’약속을지켰다.
가나안장로교회에서시작한초년목회어느 날 부산 새마음교회에서 왕성한 사역을 펼치던임 목사에게 한 통의 전화가 왔다. 체스우드교회에서사역하고 있는 지인 목사였다. 지인 목사는 호주로 와사역할것을권했다. 한두차례거절끝에그는 1984년호주로왔다“호주로와서기다리고있었어요. 그리고곧공동의회가열렸고저를청빙하기로결정을한거죠. 그런데연락이없는겁니다. 이상하다, 결정한것으로알고있는데 왜 연락이 없을까. 나중에 알고 보니까 체스우드교회에서 연락을 부산 새마음교회로 한 거에요.
그때 우리교회장로님이전화를받았는데‘우리목사님그교회에안가기로했습니다’그렇게일방적으로말씀을하신거죠.사실그장로님은제가가는걸말렸거든요.그러니까체스우드교회에서는부산으로연락을하고저는호주에서연락이오기만을기다리고요. 이런사실을나중에서야알고죄송하다는전화를교회에드렸어요.본인한테연락을했어야죠.그런후86년10월가나안장로교회의청빙을받은거지요. 당시한인교회가 10여개정도됐을거에요.”
- 목회를 하면서 제일 아쉬웠던 점은 어떤 것이었습니까?
“사실잘못한것밖에생각이안나요.부족하고허물많은사람이었거든요. 당시가나안교회에부임해보니새벽기도회가없었어요. 새벽기도를시작했죠. 이렇게사역을 펼쳐나가던 중 성도와 불화가 있었어요. 교회가합병을 하니까 문제가 생기더라고요. 이때 좀 더 엎드리고기도하는가운데지혜를구하고잘처리만했으면좋았을텐데인간적인측면에서내마음대로처리를한거에요.순간시원했는데이게평생따라다니더라고요.잠재력은 컸습니다. 돌이켜볼 때 한 번의 실수 아, 그 손해가얼마나 컸던지. 상처받은 사람은 나름대로 앙갚음하려하고,목회에지장이너무많았습니다.교회다운교회를만들어 보려고 했는데 몇 년 동안 가슴이 아팠습니다.목회경험이 없는데다 약점이 많았어요. 그런데 감사한것은그뒤로부터는그렇게했던것을반복하지않는그런은혜를받았습니다.한량없는주의은혜지요.”
- 목회를 하면서 제일 역점을 둔 것이 무엇이었습니까?
“교회의 지상사명이 전도니까 교회 지역을 중심으로전도를 계속해왔습니다. 한국에서 전도지를 만들어 왔어요. 예배후면으레온교인이거리로나가전도지를나눠주며소산중창단과함께노방전도를했어요. 2007년부터는 브라스밴드(헵시바)를 만들어 전도를 계속해오고 있는데 열매는 많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일들을 통하여 교인들로 하여금 전도가 생활화되었다는거지요.그열정과설렘,간절함이그립습니다.사실은 제가 이민교회에 정착하면서 가졌던 꿈이 있습니다. 1968년도말서울 YMCA 회관에서전석환씨가 통기타치며포크송을부르며인도한‘건전가요부르기’라는프로그램이있었는데사람들이많이모였어요.대학생들도많았고요. 직접선물도하고사람들도만나고너무좋았어요.이민목회를 하면서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교회에 몸담은사람들이갈곳이별로없는거에요. 그래서그걸접목시켜 보려고 애를 썼는데 그 계획이 잘 안됐어요.‘목회자쉼터’같은것을만들었으면좋겠다는거죠.그때부터생각한것이‘기독교문화원’입니다. 폐쇄된교회에서만 생활할 것이 아니라 폭넓게 만날 수 있는공간을마련했으면좋겠다는것이제개인적인염원이었어요.언젠가 어느 목사님을 만났는데 그러시더라고요. 앞으로탈북자들도많이올텐데그분들이설자리가어디있겠느냐, 목사님이 구상했던 누구나 와서 만날 수 있는그런공간이마련됐으면좋겠다고말씀하셨어요.향후 제가 아닐지라도 이민사회에 그런 장소가 마련돼 그곳이 많은 사람들의 쉼터가 됐으면 좋겠다, 그런아쉬움과바람이있어요.”앞으로사역에있어서어떤계획을갖고있느냐고물었다.우체통선교회에서봉사“저는오래전부터우체통선교회를섬기기로이미선포했습니다. 그곳에서 예배드리며 전도하고 있는데 제가할수있는범위에서최선을다해감당하고싶습니다.”
-후배목회자들에게권면의말씀을해주십시오.
“제목회가실패라면실패인데실패한결정적인게뭐냐,모세가하나님을믿지아니하고우리가너희를위하여물을내랴하고지팡이로반석을쳐물을냈지않습니까. 분노로 죄를 범한 거지요. 그것으로 모세는 가나안땅에들어가지못하고멀리서바라만보게됩니다.사실성도들과불화가생겼을때쓴뿌리로봤습니다.인간적인것이많이작용을한거지요. 제나이가 40이었으니까혈기왕성할때가아닙니까? 엎드려기도하면서 하나님께 지혜를 구해야 되는데 못 참겠더라고요.결국해서는안될일을했지요. 그때는너무시원하더라고요. 그래서 실제 목회현장에서 중요한 것은 어떤상황에 처했을 때 나타난 결과가 내가 시원하면 절대안 된다. 성도를 감싸고 보듬어 줘야지 어찌 목회자가시원할수있느냐. 그런데저는결과를놓고너무시원했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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