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12월 7일 화요일

브라질 한인은 어떻게 살고 있을까? 이민 55년 그후 by손정수

 


브라질 한인은 어떻게 살고 있을까?

이민 55년 그후
by  손정수

Feb 03. 2018

수 십 년 전부터 5만여 명이 산다는 브라질 교포사회는 내가 보기에는 그리 많지는 않은 것 같다. 가끔 한인 행사 때에 모이는 사람을 세어보면 많아야 2~3천 명 정도 된다. 어린 1.5세 또는 2~3세와 60세 이상의 노령 인구까지 포함한다면 그보다 많겠지만 실제 한인타운 내에서 활동하는 사람을 보면 그리 많지 않은 것 같다. 가장 좋은 수치를 제시해 본다. 대다수의 브라질 교포들은 자영업을 하는데 업체 전화번호를 한데 묶은 한인 주소록이 있다. 여기에는 가장 이름이 등록되는데 대략 2,500명 정도이다.

한 사람당 5인 가족을 기준으로 계산하더라도 1만 2500명이다. 등록 안 된 사람이 2배라 해도 2만 5000명이다. 중요한 건 한인사회에서 활동하는 사람은 이보다 적다. 한인이 몰려 사는 곳으로는 봉헤찌로, 브라스 그리고 아끌리마썽이 있다. 이중 봉헤찌로(Bom Retiro)와 브라스(Bras)는 상가 지역으로 한때 2,000여 개의 한인 가게가 있었다. 대부분 의류제품 가게를 운영했는데 원사, 원단, 부속 등을 파는 의류업과 식당, 식품점, 병원, 변호사 등 서비스 등 다양한 업종에 종사하고 있다.

브라질 이민 역사를 짧게 적어보면 다음과 같다. 6.25 전쟁의 흔적이 다 가시지 않았던 60년대 초. 대한민국 정부는 이민을 장려하며 몇 년간의 사전답사와 연구를 끝내고 1963년 첫 농업 이민을 보냈다. 당시 브라질은 커피와 사탕수수 등 농업에 필요한 일손을 외국 노동자에 의존했고 일본 이민자와 같이 한국 이민자들도 브라질로 초청하게 된다. 농업이민이란 브라질에서 농사를 짓는 조건으로 인구를 받아들였던 것으로 이미 이탈리아, 일본, 독일 등에서 많은 사람이 이민 와서 성공적으로 정착한 역사가 있었다.

이민 선배들의 경험담을 들어보면 모두 머나먼 브라질에서 가족과 멋진 농장을 일구고 사는 것이 꿈이었다. 전쟁 후 피폐해진 한국보다 밝은 미래가 있을 것이라는 희망 속에 출발한 것이다. 말도 안 통하는 배에 온 식구들을 데리고 일본. 홍콩. 남아공을 거쳐 지구 반대편 브라질까지 왔다. 갖은 고생 끝에 도착 후 바로 농장으로 보내져 농사일을 시작했지만. 대부분 농사일에 익숙지 않았고 한국과 확연히 다른 날씨와 풍토병으로 많은 고생을 했다. 특히 병에 걸려 한둘 죽어 나갈 때 많은 고통이 있었다.

정부의 주선으로 산 농장은 이미 농사를 지을 수 없는 지역으로 알려진 곳도 있었고 중간 중개인의 사기로 피해를 보기도 했다. 4계절이 뚜렷한 한국과 달리 더운 지방이라 음식도 맞지 않았고 더군다나 아이들은 학교도 없어 공부도 못하는 경우가 다반사였다. 우리 민족 특유의 교육열이 높으셨던 한인들은 이런 농장에서 있어봤자 미래가 안 보인다고 결정하고 노동계약 기간이 남아 있음에도 불구하고 농장을 벗어나 시내로 잠입한다. 허름한 시내에 자리를 잡은 한인들은 처음에는 가까운 일본인에게 물건을 소개받아 집마다 돌아다니며 옷을 판매하는 영업에 종사한다.

그러다 차츰 옷을 만드는 유대인으로부터 인정받아 일본인을 거치지 않고 직접 거래하게 되었다. 이후 유대인보다 더 빨리 좋게 옷을 만들기 시작하며 브라질 시장을 석권하게 된다. 70년대부터 농장을 떠나 시내로 나온 이들은 점차적으로 상업에 종사하며 한인 특유의 부지런함으로 다른 민족들을 따 돌리고 의류업계를 장악하게 됐다. 왜 의류를 시작했냐 하면 먼저 당시 옷을 만들기 위해서는 특별한 기술이 필요 없었다. 젓가락질로 단련된 손은 예쁘고 값싼 제품을 만드는 데에 도움이 되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의류제품은 저가의 비용으로 많은 이윤을 남기는 데에 있었다. 80년대를 선두로 급격히 성장한 한인사회는 한때 2500여 개의 의류업체를 가지고 있어 국내 의류계에 상당한 부분을 차지했었다. 1990년대 중반에는 한인촌이며 의류의 중심지인 봉헤찌로와 브라스 지역에서 전체 의류의 60%를 생산했었다. 직. 간접적으로 25만 명의 고용창출을 냈었는데 지금은 중국에서 몰려오는 수입품과 전국으로 의류 생산지가 퍼지며 하락세에 있다. 모두 2000년대 초반만 해도 한인촌에서 만들었었는데 이제 시대가 변한 것이다.

부모 세대가 볼펜으로 뽄뜨고 가위로 안감 자르던 시대에서 요즘 2세는 패션디자인을 전문으로 공부하고 레이저로 안감을 자르는 등 탈바꿈했다. 유럽. 미국도 1년에 수차례 돌아보며 새로운 유행 색상. 원단을 배워와 이곳 브라질에 맞게 다시 제작했다. 한인이 유행을 리더 하다 보니 전국 대형 의류판매장 구매담당자와 도매업자 가게를 돌며 물건을 사기도 했다. 이들은 유럽이 아니라 바로 한인촌에서 유행을 배워가는 것이었다.

브라질 한인 생활 수준은 중산층이다. 몇 년 전만 해도 대부분 중산층이었으나 요즘에는 한인사회가 급격히 어려워지며 빈부격차가 심각하게 나타나고 있다. 말 그대로 어렵게 사는 사람들이 많다. 브라질에 이민 오는 사람들의 발전 단계는 언제나 같았다. 90년대만 하더라도 처음 남의 제품을 판매하는 벤데(Vende:판매)를 시작한다. 3년 정도 하며 어느 정도 모은 자본금을 가지고 조그만 가게를 시작하고. 이를 바탕으로 사업을 점차 늘려 가는 것이 정상적인 발전이었다.

사업이 정상궤도에 들어서면 연말 장사를 하고 나면 적게는 수만 불에서 많게는 수십만 불이 남아 집을 사고 사업을 늘리는 등 안정된 생활을 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그러나 요즘에는 상황이 많이 바뀌어 돈 벌기 쉽지 않다 오히려 손해 보는 곳도 많다. 고인플레 시절에는 시중에 돈이 많이 돌아 장사가 수월했었다. 더군다나 당시에는 경쟁이 없었던 시절이라 한 모델을 수십만 장씩 만들었으나 지금은 한 모델 당 수십장만 팔리는 등 소비자의 취향도 많이 고급화되어 이들 구색을 갖추다 보니 원가가 많이 비싸졌고 수익도 많이 줄었다.

십몇 년 전만 해도 대충 눈대중으로 만들었었다. 지금은 1년에 몇 번씩 유럽을 다니며 패션 감각을 익히는데 이들은 2세로 포어를 잘 한다. 이곳에서의 생활은 대충 오전에 7시에서 8시에 가게 문을 열고 오후에는 5시 반에 닫는다. 나머지 시간에는 가게 정리, 제품 생산 준비 등으로 분주하지만 그래도 시간에 쫓기며 살지는 않는다. 주말에는 대부분 교회에 나가고 오후에는 골프, 낚시, 테니스 등 여가 생활을 주로 한다. 여가 생활로 빼놓을 수 없는 것 중 하나가 바로 술과 음식이다.

소고기가 싸고 흔하다 보니 항상 고기를 구워 먹는데 여기에 술을 한 잔 걸치며 하루의 피로를 해소하는 사람이 많다. 술은 대체로 맥주와 위스키를 마시는데 예전에는 8년산 Old Eight라는 술을 대중적으로 많이 먹었으나 요즘에는 역시 조니워커를 많이 마신다. 때로는 브라질 전통의 술인 까샤사(Cachaca)를 마시는데 슈퍼에서 한 병에 10불 미만이라 싼값에 찾는 사람들이 많다. 소주는 슈퍼에서 5불 그리고 식당에서는 10불 하는데 위스키 입맛이라 그런지 자주 많이 안 마시고 오히려 맥주를 많이 마신다.

요즘 불경기로 돈 벌기가 쉽지 않다. 그래도 아직 까지는 중산층 생활을 하며 자유롭게 살 수 있다는 것이 가장 장점이다. 그렇다고 쉬운 것은 아니지만 일단 자기 계발 시간이 많이 남는다. 일을 적게 하는 것은 아니지만 한국, 미국과 비교하면 이곳 한인은 시간이 많이 남는다. 차별 없는 사회는 아니지만, 한인 대부분 인정받고 하고 싶은 만큼 할 수 있다는 것이 중요하다. 중남미 다른 나라들을 보면 한인에 대한 반감과 차별로 서러울 때가 많다. 내 맘대로 할 수 있다는 게 얼마나 평범하면서 중요한 것인지 경험한 사람만 알 수 있을 것이다.

요즘 우리 한인이 많이 종사하는 의류업계가 위기라고 한다. 예전에는 브라질에서 생산하는 게 저렴했는데 세금과 비용이 올라 어려워졌다. 십몇 년 전부터 중국에 위탁 생산하여 수입했는데 이들 중국인이 거꾸로 물건을 밀수해 반값에 팔고 있다. 현찰을 들고 다니며 주위 가게를 하나씩 사들여 완전 중국화 되었다. 바느질 하청을 맡던 볼리비아 인도 이제 제법 기술이 늘어 한인과 같이 가게를 직접 운영하고 있다.

부모로부터 가게를 물려받은 2세는 경쟁이 심하고 비용이 올라 가게를 접고 있다. 예전과 같이 수익도 보장 못 하고 오히려 빚만 늘리는 형편이다. 가게를 문 닫는 그 날부터 빚잔치를 해야 하기에 울며 운영하는 사람도 있다. 옷가게를 넘어 다른 업종으로 바꾸는 사람도 있는데 다시 도전하려니 어려움이 이만저만 아니다. 한인촌은 연일 커피집과 식당이 늘고 있다. 새로운 도전으로 먹는장사를 시작하는데 정착하려면 몇 년 걸릴 것이다. 55년 이민 역사가 변하는 우리 브라질 한인사회. 참으로 많이 걱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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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정수착한브라질이야기 칼럼니스트
떠나기 전 꼭 읽어야 할 브라질 이야기저자

브라질에 35년 살며 보고 배운 것을 재미있게 쓰는 '착한 브라질 이야기'. 브라질 한식 홍보 운동 '반찬닷컴 브라질' 대표입니다. 이번에 드디어 책도 냈습니다!

"브라질한인50년사는 우리 모두의 역사" - 재외동포신문

"브라질한인50년사는 우리 모두의 역사" - 재외동포신문

<인터뷰>"브라질한인50년사는 우리 모두의 역사"

이우태 기자
승인 2014.07.02 

김홍기 변호사, "브라질한인사, 역사의 뒤안길로 그냥 흘려보내선 안돼"

▲김홍기 박사

일제에서 해방된 후 꼭 19년이 된 1964년 8월 15일, 먼 여행길을 앞둔 듯 저마다 두툼한 가방과 보따리를 이고 진 500여 명의 사람들이 부산항 제3부두로 모여들었다.

이들은 박정희 군사정권이 궁핍한 국가재정을 충당하기 위해 1963년도에 ‘한민족 해외 대웅비 100년 대계’라는 거창한 이름으로 추진한 파독광부‧간호사, 월남파병, 가족집단 정책이민 등 3대 해외정책 일환으로 지구 반대편 나라 브라질로 떠날 사람들이었다.

이들을 태우기 위해 부두에는 7000천톤급 네덜란드국적 화물선 ‘찌짜랭카’호가 정박해 있었다. 이 배를 타고 갈 사람들이 바로 ‘제2차 브라질 집단영농정책이민단’에 지원한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젖먹이 어린아이부터 80세 고령에 이르기까지 남녀노소 구분이 없었다.


▲1964년 제2차 브라질 이민단 500명을 리우데자네이로항까지 실어 날랐던 화란(네덜란드) 국적의 7천톤급 화물선 '찌짜랭카'호정부는 미지의 세계로 떠나는 이들을 위한다며 대대적인 환송식을 벌였다. 군악대까지 동원해 팡파르를 울려댔고 부산시장은 격려와 희망을 담은 송별사로 불안에 떠는 이들을 달래며 인솔을 맡았던 김홍기 변호사에게는 ‘우리민족 해외 대웅비 100년대계의 선발대장’이라는 별칭까지 붙여주며 추켜세웠다.


부산항을 떠난 찌짜랭카호는 지구 한 바퀴를 돌아 정확히 두 달 만인 10월 25일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항에 닺을 내린다.

당시 30세의 나이로 세상 무서울 게 없었던 김홍기 변호사는 이 정책영농이민단 단장 역할을 맡아 이들과 함께 부산항을 떠난다. 이로부터 50년이 지난 올해가 브라질 한인이민 50주년이 된다.

1964년 당시 제2차 브라질 정책집단영농이민단을 이끌고 브라질 땅에 첫발을 디딘 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브라질 이민사의 산 증인인 김홍기 변호사가 한인이민 50주년 기념식 준비를 위해 고국에 왔다.


▲김홍기박사는 슬하에 2남2녀를 두었다. 이 가운데 브라질 이민전 한국에서 낳은 두 딸은 현재 상파울루시에서 치과의사와 대학교수로 재직 중이며 브라질에서 낳은 첫 아들은 상파울루에서 의류사업을, 막내아들은 미국 LA에서 변호사로 활동하고 있다.(사진 왼쪽 아이를 안고 있는 남자가 김홍기 변호사. 이 사진은 이민선 찌짜랭카호 선상에서 찍은 기념사진)김홍기 변호사는 이처럼 애환과 굴곡으로 점철된 브라질이민 50년 역사를 아무런 의미 없이 지나치기에는 너무 아쉽고 허전하다면서 브라질 이민사에 얽힌 온갖 사연과 함께 50주년을 기념하기 위한 자신의 계획과 포부를 거침없이 밝혔다.

그는 올해 80세라는 고령임에도 불구하고 장대한 기골만큼이나 기억력도 건강도 꼿꼿한 모습이었다.

△1964년 당시의 브라질 제2차 정책집단영농이민단은 말 그대로 농사지을 사람들이 주축이었을텐데 김홍기 변호사님은 어떤 계기로 이 이민단에 합류하게 되셨나요?

▲당시 상황을 얘기하자면 책으로 써도 두 세권은 될 겁니다. 브라질 이민사를 이해하려면 앞서 대한민국의 이민역사를 알아야 합니다. 대한민국 근대사에서 우리 민족의 첫 번째 집단이민은 1902년 대한제국 고종황제 칙령에 따른 하와이‘농노동 청년이민(102명)이었습니다.

그로부터 60여 년이 지난 1963년에 시작된 파독광부, 간호사와 브라질이민이 현대사적 의미의 두 번째 집단이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당시 이민정책을 이제와 돌이켜 보건데 결과적으로는 군사혁명 초기 박정희정권이 추진한 이 정책은 ‘혁명적 발상의 위업’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왜냐하면, 전근대적 의미의 첫 이민 사례인 하와이 이민은 당시 시간당 68전을 받는 사탕수수밭‘농노’라는 고용계약형 이민으로 현지 농장주의 경비부담으로 이뤄진 ‘인력수출’이었습니다.

하지만 당시의 ‘가족집단정책이민’은 국민을 해외로 내보내는 ‘송민국가’인 대한민국이 주관한 이민이었기 때문에 모든 비용을 이민 당사자인 우리가 감당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잘 아시다시피 당시는 해방과 전쟁 후라 국민들은 내남없이‘보릿고개’로 신음하고 있었고 국가재정 역시 말할 것도 없었습니다. 설상가상으로 연 2.9%에 달하는 인구증가율로 사람들을 해외로 내보내 입을 줄이고 약간의 자본이 있던 사람들한테는 해외에 나가 자력갱생토록 권장할 수밖에 없었던 상황이었죠. 당시 경부 고속도로 건설과, POSCO(당시 포항제철)설립 등으로 중화학공업과 인프라구축을 국가재건 사업으로 추진한 박정희대통령의 ‘국가개발 5개년 정책’과 해외 이민은 3대 핵심 사업이었습니다.

△브라질 이민은 쉽게 말하면 농업이민, 즉 농사지을 사람들을 보내야 했는데 당시 대다수가 이북에서 내려 온 실향민이거나 남대문, 동대문, 평화시장 등지에서 봉제업에 종사하던 사람들이 대부분이라고 들었습니다. 이들은 그나마 약간의 자본력이 있는 영세사업자들이었는데 여기에 무슨 사연이 있었나요?

▲NGO활동당시 연설모습▲앞서 말씀드렸지만 해외 이민을 보내는 우리정부는 ‘송민국가’였고 브라질은 ‘수민국가’로 이민정책은 ‘지주 농업이민’이었습니다. 따라서 농지를 구입하고 농업에 직접 종사해야만 했죠. 여기에 영주권비자 발급과 연계해 이를 조건으로 내세웠습니다. 그러나 당시 소작농이거나 조그만 농토에 농사를 지어 겨우 끼니나 떼울 정도의 사람들이 대부분이라 광활한 브라질 땅을 사서 농사를 지을만한 능력이 전혀 없었죠. 또 국가재정도 허락하지 않아 자비부담을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이남으로 내려와 부산국제시장에서 터를 잡았던 속칭 ‘38따라지’ 출신들과 그나마 약간의 자본력이 있는 평화시장, 동대문시장 상인들이 대거 지원하게 됩니다. 이들 대부분은 이북출신으로 뿌리를 내리기 전이라 남한에 별 애착이 없었습니다. 또 당시에는 국가재정이 어려워 무차별적으로 세금을 걷었습니다. 소위 ‘인정과세’라는 악명 높은 세법인데요. 당시 세무당국은 이들 장사꾼들을 ‘상습탈세집단’으로 여겨 무조건 주먹구구식의 세금을 강제로 걷었습니다. 이 두 가지 조건이 아마도 브라질 이민을 어렵지 않게 결정하는 요인이 되지 않았나 합니다
.
▲본지 이형모대표와 함께(사진 왼쪽이 김홍기변호사)

△당시만 해도 드물게 대학까지 졸업한 김홍기 박사님은 이 사람들의 이민동기와 별 관계가 없어 보이는데요?

▲나는 이북(평양)출신으로 유복하게 살다 남한으로 내려온 사람입니다. 당시 북한은 국민소득이 100달러에 육박했고 남한은 절반가량인 65-68달러 정도였습니다. 여기에다 전쟁으로 남북이 분단돼 이 좁은 땅덩어리 안에서 궁핍한 삶에 부대끼면서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니 정말 답답했습니다. 혈기왕성한 젊은 때였으니까요. 때마침 브라질 이민 얘기를 듣고 한반도 보다 거의 100배에 가까운 광활하고 풍요로운 자원대국 브라질에 가서 젊을 꿈을 펼쳐보자 하는 나름의 포부를 갖고 이들과 함께 배를 타게 된거죠. 내가 브라질 이민을 실행에 옮긴 결정적 계기라고 봅니다. 50년 전인 당시에는 대한민국이 ‘한강의 기적’을 일으키고 마침내 오늘날‘세계 10대 경제대국’될 줄은 상상도 못했던 겁니다.

△브라질에 당도해 시작한 이민생활에 대해서 말씀 해주시죠.

▲이제 다 지난 얘기지만 아직도 잘못 알려진 게 있어서 브라질 이민 초기의 비사를 말씀드려야 될 것 같습니다. 당시 브라질 대사는 2대 대사인 박동진 씨였습니다. 초대는 박정희정권 당시 오랜동안 국회의장을 역임한 정일권 대사가 북미(미국)과 남미(브라질)미주지역 통합 대사였죠. 박동진 대사는‘당시 브라질 이민자들이 계획적으로 농업을 피해 상파울루 등 도시로 도피했다’고 본국에 허위보고를 합니다. 이는 사실과 전혀 다른 얘기입니다. 저와의 악연도 이때부터 시작됩니다.

1963년 제1차 브라질이민단은 ‘에스삐리또 싼또 주’의 수도인‘빅또리아 시’근처 아열대 지방에 구입한 땅을 찾아 몇 개월간이지만 실제 농사를 지었습니다. 하지만 땅이 척박해 농사가 어려운데다 밧줄을 늘어놓은 것처럼 큰 뱀과 새끼 잠자리만한 모기들이 밤낮없이 괴롭혀 도저히 농사를 지을 수가 없었습니다. 여기에다 ‘네바다비아’라는 현지 협잡꾼 지주에게 속아 고가로 사들인 땅을 1%값도 못 건진 채 그냥 버리다시피 하고 무작정 도시로 나오게 된 것입니다.

내가 이민을 떠났던 1964년도 2차 이민도 경우도 1차 이민 때와 비슷했습니다. 약 500명의 2차 이민단이 구입했던 땅이 몽땅 국제사기를 당했던 것입니다. 이 땅은 지금도 찾지 못하고 있습니다. 농사지을 땅이 없자 우리는 일본인들 100만 명이 상파울루에 살고 있다는 얘기를 귀동냥으로 듣고 동양인들이 사는 곳으로 가자는 암묵적 동의아래 무작정 그곳으로 흘러 들어가게 됩니다. 농사를 피해 도시로 도피했다는 박동진 대사의 당시 보고는 이렇게 터무니없는 거짓입니다.

더욱 기가 막히는 것은 당시 요코하마 주재 브라질 영사를 대동한 지주대표가 그럴 듯하게 구획된 지도와 함께 50여장의 땅문서를 들고 이민업무 주무부처였던 보건사회부장관실에 나타나 나와 만나게 됩니다. 당시 정희섭 장관이 입회했기 때문에 일말의 의심도 없이 내가 대표/단장 자격으로 당시로서는 거금인 45,000달러를 주고 이 땅을 계약했던 것입니다.

우리가 고생을 각오하고 처음부터 농사를 지으려고 했던 것은 딱히 다른 일들이 우리를 위해 대기하고 있었던 것도 아닌데다 농업정책이민은 한국, 브라질 양국의 약속과 요구였습니다.

특히 여러 사정으로 떨어져 있던 가족들과 후진들을 위해 선발대의 책임과 의무를 다해야 했고, 나는 이민을 떠날 때 인솔단장으로 정부당국에 각서까지 쓰고 왔기 때문에 땅을 찾았다면 단원 모두를 인솔해 농사를 지었을 것입니다.

단장이었던 나는 실제 농사를 지을 생각으로 한국에서 군용천막과 군용부츠 열 켤레, 조선낫 50개(결국 브라질 농법에서는 쓸모가 없게 됐지만)까지 준비했습니다.

세상일 한치 앞도 내다볼 수 없듯이 돌이켜 보건데 이런 우여곡절이 오히려 전화위복이 되어 비교적 짧은 시간에 브라질에서 성공한 이민사회의 토대가 되지 않았나 하는 생각에 지금 이 시점에서는 사기를 쳤던 그 지주에게 감사를 드려야 되는 역설이 됐습니다. 제가 믿는 하나님에게 감사드릴 따름입니다.

▲사진오른쪽(반기문 유엔사무총장)△변호사님 얘기를 듣다보니 브라질 50년 이민사의 산 증인이라는 말씀이 실감이 됩니다. 현재 브라질에서 교민들의 위상과 실제 살아가는 모습은 어떤지요

▲우연인지 주님의 축복인지는 모르겠으나 50년 전 박정희대통령의 선경지명인‘브라질 한민족사회 구축 100년 대계의 기반’이 마치 ‘잔디밭을 떠서 옮긴 것’처럼 이곳 브라질에서 그대로 실현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50년 전 가내공업 수준의 재봉틀 한 대로 시작한 동대문, 남대문, 평화시장의 의류산업을 동포 1세대들이 지구 반대편에 있는 이곳 브라질 상파울루에 뿌리를 내리고 양적성장의 기반을 닦아놨습니다.

이 튼튼한 반석위에서 반세기가 지난 오늘날에는 수백 여 명의 일류대 출신 동포1.5-2세들에 의해 전산화, 패션화, 고급화, 브랜드화 되는 등 패션의 질적 성장으로 이제 거대 브라질 2억 시장을 장악하게 될 날이 멀지 않았다고 자부합니다.

추측컨대 앞으로 5년 이내에 브라질 한인들의 패션산업은 ‘샤넬’이나‘베르사체’ 등과 같은 세계적 패션업계를 능가하게 될 것입니다. 남미 전역에 산재해 있는 동포사회의 의류산업은 브라질이 그 원조입니다. 파라과이, 볼리비아, 아르헨티나 등은 후발주자인 셈이죠.

▲IPU브라질 대표로 북한을 방문했던 당시 김홍기변호사(사진 왼쪽에서 두번째)△김홍기 변호사님께서 브라질이민 50주년에 대해 남다른 의미를 두고 기념하려는 이유를 알 것 같습니다.

▲의류산업뿐이 아닙니다. 최근 20여 년 동안 브라질에서 이룩한 한국의 자동차 산업도 눈부실 지경입니다. 현대와 기아차는 연간 15만대를 만들 수 있는 현지 생산 공장이 있고 남미 전역에 판매망도 갖추고 있습니다. 이같을 기반을 쌓는데는 수백 명에 달하는 고급 전문경영인들의 노력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자랑스럽게도 이들 모두가 우리의 자녀들이라는 것입니다.

그간 브라질 동포사회의 경제 기여도는 한국에는 물론 브라질 국가성장에도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는 점에서 양국 모두 되새겨야 할 것입니다. 또한 향후 50년 동안에는 양국 간 어떤 변화와 발전이 있을지 예측하기 어려울 정도로 역동적입니다.

따라서 정확히 50년 전 박정희대통령이 꿈꾸었던 ‘한민족 해외 대웅비 100년 대계’의 위업이 현실이 된 만큼 브라질한인이민사는 전 세계 175개국 720만 재외동포사회 가운데 ‘최고의 한민족 경제사회’를 이뤘다는 사실에 대해 우리 모두가 자부심과 긍지를 갖고 환호할 일이며 꼭 기념해야 할 반세기이민사인 것입니다.

브라질이민50년 역사를 브라질동포들만의 축제로 그치게 해서는 안 됩니다. 그래서 제가 팔을 걷어 부치고 나서는 겁니다. 누군가는 나이가 여든이나 된 노인네의 ‘노욕’아니냐는 곱지 않은 시선도 있습니다.

하지만 나는 먹고 사는데 전혀 지장이 없는 사람입니다. 국제변호사이며, 브라질 국회의원도 해봤고 자녀들도 다 성공해 잘 살고 있습니다. 이민가기 전 한국에서 낳은 두 딸은 상파울루 치과대학을 나와 모두 교수와 치과의사로 재직 중이고, 상파울루에서 낳은 큰 아들은 의류사업, 막내 아들은 미국 LA에서 변호사로 일하고 있습니다. 이만하면 자식농사는 별 흉잡을 데 없죠? 그런데 이 나이에 내가 더 이상 무슨 영예를 누리겠다고 그러겠습니까.

나는 1964년 8월15일을 잊을 수 없습니다. 500여 명의 이민자들을 인솔하고 부산항을 떠나던 그 순간, 그 장면을 어찌 잊을 수 있겠습니까. 말이 50년이지 그 켜켜히 쌓아온 세월동안 고난과 역경을 딛고 브라질에 정착한 동포들의 지난 50년의 역정을 그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한다는 것이 너무 아쉬워 우리 모두에게 꼭 상기시키고 싶을 뿐입니다.

[허프 인터뷰] 브라질에서 36년 거주한 이민 선배가 '탈조선' 꿈꾸는 젊은이들에게 하는 말 | 허프포스트코리아

[허프 인터뷰] 브라질에서 36년 거주한 이민 선배가 '탈조선' 꿈꾸는 젊은이들에게 하는 말 | 허프포스트코리아

[허프 인터뷰] 브라질에서 36년 거주한 이민 선배가 '탈조선' 꿈꾸는 젊은이들에게 하는 말

당신도 '탈조선'을 꿈꾸는가?

당신도 혹시 ‘탈조선’을 꿈꾸는가? 

수년 전부터 이민을 꿈꾸는 사람들이 급격하게 늘어나면서 ‘헬조선’, ‘탈조선’ 등 이민 관련 신조어가 유행하고 있다. 지난 3월 한국청소년정책연구원이 1539 청년 2700여명을 상대로 실시한 ‘2017 청년 사회 경제 실태조사’에 따르면 청년 10명 중 3명은 해외 이주를 고려했다. 이들은 “행복한 삶을 위해” ‘탈조선’을 꿈꾸었다.

손주를 위해 그림을 그리는 것으로 유명해진 이찬재 할아버지 역시 30여 년 전 ‘탈조선’을 한 사람이다. 하지만 지금의 ‘탈조선’이 뜻하는 것처럼 한국이 싫어 이민을 떠난 것은 아니었다. 그는 36년간 브라질에서 살다 지난해 귀국했고, 지금도 종종 브라질에서의 이민 생활을 그림 주제로 다루곤 한다. 30여 년 전 브라질로 향한 그는 어떤 마음가짐으로 한국을 떠났을까? 36년 만에 처음으로 한국 땅을 밟았을 때는 어떤 기분이 들었을까? 허프포스트코리아는 최근 이찬재 할아버지와 만나 이민 생활의 장단점과 그가 현재 이민을 꿈꾸는 이들에게 보내는 조언을 들어봤다. 이찬재 할아버지에게 브라질에서의 이민 생활은 “천국”과 같았다.

 

그림

HUFFPOST KOREA / TAEWOO KIM

손주들을 위해 그린 그림으로 전 세계적으로 유명해지셨어요. 그림은 어떻게 그리기 시작했나요?

=딸과 손자들이 브라질을 떠나고 나서 아들에게 제안을 받아 시작했어요. 그 당시 저는 손주들을 학교에 데려다주는 것이 일상이었는데, 아이들이 한국으로 떠나고 나서는 할 일 없이 빈둥거렸죠. 그러다 막내 손자가 태어났을 때, 이 아이가 크면 어떤 사람이 될까 궁금해졌어요. 아이가 성인이 될 즈음에는 내가 이 세상에 없을 것 같다고 하니 아들이 충격을 받았나 봐요. 그래서 손자들을 위해 그림을 그리는 것이 어떻겠냐고 제안하더라고요. 정식 교육을 받은 적이 없어 걱정했지만, 한 번 해봐야겠다는 생각에 시작하게 됐어요.

이미루씨 제공.
이찬재 할아버지와 손자들. 

그림으로 하루의 일과를 기록한다는 건 할아버지에게 어떤 의미인가요?

=제가 그림을 그리지 않았다면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텔레비전이나 보고 이웃과 이야기할 거리가 있나 괜히 기웃거렸겠죠. 나이 먹고 할 일이 있다는 자체가 너무 다행이라고 생각해요.

그림의 주제를 고르는 기준이 있다면요?

=아들은 항상 아무거나 그리라고 하더라고요. 그림을 막 시작하는 사람의 마음을 편하게 해주려고 그런 것 같아요. 막내 손주는 만 세 살인데 공룡을 좋아하고 큰애들은 지금 중학교 1학년, 2학년인데 아이돌을 좋아해요. 그래서 막내를 위해서는 공룡, 첫째와 둘째를 위해서는 방탄소년단을 그리죠. 한 달에 두세 번 정도는 제 인생을 회상하는 그림을 그리는데, 손주들이 할아버지가 어떤 환경에서 자랐는지, 그리고 우리나라 역사는 어떻게 흘러갔는지 배울 기회라고 생각해요. 다만 고생한 이야기는 별로 하고 싶지 않아요. 좋은 이야기만 전해주고 싶어요.

이민 초기

HUFFPOST KOREA / INKYUNG YOON

1981년 이민을 떠나기 전까지는 한국에서 어떤 일을 하셨나요?

=고등학교에서 지구과학을 가르쳤어요.

이민은 어떻게 떠나게 되었나요?

=어떤 면에서는 우연이었죠. 처가가 5년 먼저 브라질에 이민을 갔고, 장인어른이 우리를 데려가겠다고 한국으로 나오셔서 브라질로 떠나게 됐어요. 특별히 제가 결정한 사항은 아니었어요.

브라질로 떠나기 전 이민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셨나요?

=브라질로 오겠냐는 제안을 받았을 때 한국에서 태어나 40년을 살았으니 다른 세상에서 살아보는 것도 재밌겠다는 생각밖에 없었어요.

이민 준비는 어떻게 하셨나요?

=이전에는 이민을 간다는 생각을 한 번도 해본 적 없었어요. 별안간에 결정이 나는 바람에 언어를 배울 시간적 여유도 없었고, 학원에도 가본 적 없이 떠났죠. ‘가면 어떻게든 되겠지’라는 생각이었어요.

이민 초기 브라질 현지 분위기는 어땠나요?

=브라질로 떠났던 1981년에는 한국의 경제 상황이 그리 좋지 않았어요. 브라질에 도착해보니 브라질이 한국보다 훨씬 잘 살고 있었어요. 교포사회에서 브라질로 이민을 잘 왔다면서, 이곳은 천국이라고 하더라고요. 당시에는 집에서 바느질만 해도 충분히 먹고 살 수 있는 상황이었거든요. 잘 왔다는 생각이 들었죠. 이민 생활 시작하면서 고생이라는 걸 몰랐어요. 미리 정착해 있던 친척들의 덕을 크게 봤죠.

브라질에서는 어떤 일을 했나요?

= 언어 문제가 있다 보니 대부분의 사람이 자신의 특기를 살리지 못해요. 그래서 현지 언어를 사용하지 않아도 될 장사를 했어요. 그 당시 브라질에 사는 한인 교포들은 대부분 여성 의류를 팔았어요. 그래서 우리도 여성 의류 사업에 뛰어들었죠. 옷이라고는 전혀 모르던 사람들이었는데 말이죠. 당시 브라질의 의류 기술은 그다지 좋지 않았어요. 한국인들은 눈썰미나 손재주가 좋다 보니 높은 질의 옷을 만들었고, 그 덕에 브라질 고객이 많았죠.

이민 초반에는 어떻게 적응했나요?

=처음에는 연고가 없는 곳도 아니다 보니 막연하게 떠나도 괜찮다고 생각했어요. 이민 사회에서는 나중에 온 사람들이 이미 정착한 사람들의 도움을 많이 받는데, 언어가 필요할 때면 오래 산 사람을 붙잡고 도움을 청했어요. 그리고 교포 사회 속에 들어가니 포르투갈어를 몰라도 쉽게 살 수 있었어요. 장사를 할 때도 한국인이 만든 제품을 받아 한국인에게 주문을 넣고 판매하다 보니 언어로 인한 힘든 점은 비교적 적은 편이었죠.

자녀분들은 갑자기 떠난 이민에 쉽게 적응하던가요?

=당시 아들은 초등학교 5학년이었고, 딸은 초등학교 입학하기도 전이었을 거예요. 아이들도 이민 생활에 적응하는 걸 너무나 힘들어 했어요. 미리 정착해 있던 사람들의 조언을 듣고 먼저 입학 수속을 밟았어요. 아이들은 당시 포르투갈어를 거의 하지 못했거든요. 어린아이들이라도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을 거예요. 그래도 잘 견뎌내고 학교를 마쳐 다행이죠.

이미루씨 제공,
이찬재 할아버지 단독 전시를 찾은 가족들.

남미 이민은 한국인들에게 생소한 편인데, 당시 브라질에 한국인은 얼마나 있었나요?

=당시에도 브라질에 한국인이 많았어요. 확실하게 기억은 안 나지만, 2~3만 명 정도 된 것으로 알아요. ‘한국촌’을 형성할 정도였으니 제법 컸죠. 당시에는 그곳에 진입하면 능히 살 수 있는 장사의 길이 있었어요.

할아버지에게 브라질은 어떤 곳인가요?

=브라질은 좋은 곳이죠. 날씨도 좋고, 브라질인들의 감정 표현도 순수해서 좋아요. 서양이지만 주식이 쌀이라 음식도 잘 맞았고요. 저는 유난히 브라질 음식을 좋아했어요. 

가장 좋아하는 브라질 음식은 뭔가요?

RICARDO MORAES / REUTERS

=페이조아다라는 음식을 가장 좋아해요. 돼지의 여러 부위와 팥을 함께 푹 삶은 요리인데, 브라질인은 물론이고 한국인들도 좋아하는 음식이에요. 보통 맛이 아니죠.

귀국

이민 생활 중 한국에 나온 적은 없었나요?

=아내는 여러 번 나왔지만, 저는 36년 동안 한 번도 나오지 않았어요. 장사를 하다 보니 한 사람은 가게를 지켜야 하잖아요. 가끔 한국 생각이 나기는 했지만, 브라질에서의 삶이 참 좋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심한 향수는 느끼지 않았어요. 아주 만족스러운 삶이었죠.

한국으로 돌아오기로 결심한 계기는 뭔가요?

=의류 사업이다 보니 나이가 들면 패션 감각을 습득하고 적응하는 게 힘들어요. 그래서 더 할 생각을 생각을 안하고 2005년쯤 은퇴했어요. 그 후에는 젊은 사람들의 일을 도와주고, 손주가 학교에 입학한 후에는 학교에 데려다주는 게 제 일이었어요. 몇 년 뒤, 우리 곁에 살던 딸이 한국으로 떠났는데 우리 두 식구만 남아 있다 보니 한국으로 간 딸과 손자들이 계속 나오라고 하더라고요. 결국 딸 근처로 가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들어 한국으로 오게 됐어요.

이민을 떠나기 전과 후의 서울은 어떻게 다른가요?

=저는 서울에서 태어나 서울에서 자랐어요. 그런데 지금은 서울 어떤 곳에 가도 그곳이 어딘지를 모르겠어요. 광화문, 종각 이런 곳 외에는 전혀 모르겠어요. 완전히 다른 세상 같아요.

수십 년만에 한국에 돌아오는 것에 대한 두려움은 없었나요?

=제가 태어난 곳이고 딸도 근처에 있어서 두려움은 없었어요. 그런데 막상 와보니 전혀 다른 세상이 되어있더라고요. 적응이 아주 힘들었어요. 발전된 세상을 따라가는 것이 어려워서 딸의 도움을 많이 받아야 했어요. 만약 딸이 살지 않는 다른 곳에 정착을 해야 했다면 정말 힘들었을 것 같아요. 지금은 지하철을 타도 두렵지 않고, 갈아타는 것도 적응됐어요.

HUFFPOST KOREA / INKYUNG YOON

이민 생활의 장점이 있다면요?

=이민을 가게 되면 한국에서는 하지 못했던 일들을 쉽게 할 수 있어요. 한국에서는 교사로 일하다 보니 남에게 행상을 한다든지, 주문을 받는 일을 하는 게 어려웠을 것 같아요. 그런데 브라질에서는 다 내려놓다 보니 뭐든 쉽게 할 수 있었어요.

단점은요?

=단점은 크게 생각해본 적 없어요. 가장 큰 어려움은 언어겠지만, 그것도 살다 보면 다 해결되니까요. 차츰차츰 배우다 보면 늘거든요. 더군다나 가보지도 못한 이국땅에 가는 데 어느 정도 힘이 들 거라는 건 이미 떠날 때부터 생각하고 있는 게 아니겠어요? 특별한 건 아니라고 생각해요. 웬만한 여건만 된다면 도전해보는 게 좋다는 생각이에요.

지금 이민을 꿈꾸는 젊은 세대에게 어떤 조언을 하고 싶으신가요?

=다른 환경에서 모험을 할 용기가 필요하다는 생각을 해요. 같은 브라질이라도 지금과 그 당시의 브라질 상황은 다를 것 같아요. 저의 경우에는 가자마자 이민 생활에 적응해서 어려움 없이 잘 지냈는데, 지금 상황은 다를지도 모르겠어요. 저는 계획 없이 언어도 배우지 않고 떠났는데, 아마 요즘 젊은 분들은 어딜 가겠다고 마음을 먹으면 가서 무엇을 하겠다는 정도의 계획은 있을 것 같아요. 그러다 보니 아주 어렵지는 않을 것이고 성공할 기회가 더 많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죠.

또, 현지인들 사이에 빨리 흡수되라고 조언하고 싶어요. 그들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파악하면 큰 도움을 받을 수 있거든요. 빠른 시간 내에 현지인 사회에 진입하는 것이 굉장히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그림은 언제까지 그릴 계획인가요?

=언제까지 그려야겠다는 생각은 해본 적이 없어요. 끝까지 그려볼 생각이에요. 나이 먹어서 더 이상 못하는 일은 아니잖아요. ‘할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셨는데 내가 진짜 할아버지 같다’는 댓글을 볼 때면 전 세계에 내 손주가 생긴 듯한 생각이 들기도 해요.

브라질 이민 50년 ②이민 1세대가 말하는 반세기 | 한경닷컴

브라질 이민 50년 ②이민 1세대가 말하는 반세기 | 한경닷컴
[브라질 이민 50년] ②이민 1세대가 말하는 반세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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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13.01.03 08:37 수정 2013.01.03 08: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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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민 여권 3호 김영종씨 "한인 정착 역사는 타민족의 모범 사례"
"1.5세와 2세에 우수한 인재 많아…가장 다이내믹한 커뮤니티 될 것"
"부모님과 함께 부산항을 떠나오던 때가 지금도 눈에 선합니다.
어느새 50년이 흘러버렸네요."

브라질 최대 도시 상파울루의 한인 동포 거주 지역인 봉헤치로에서 김영종(67) 씨를 만났다.

김씨는 1963년 2월12일 네덜란드 선박을 타고 산토스 항에 도착한 103명의 이민 1세대 가운데 한 명이다.

이민 여권 순서로 따지면 부모가 1호와 2호, 김씨는 3호다.

초기 브라질 이민자들은 대부분 북쪽에 고향을 둔 사람들이었다.
김씨 가족도 마찬가지였다.
"함경남도 함흥이 고향인 아버님께서 이민을 결정했어요.
한국전쟁 중에 사선을 넘어 월남했지만, 실향민으로 사는 게 쉽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사업을 잘하셨지만 남쪽에서의 생활에 정을 붙이지 못하셨던 것 같아요."

김씨는 고교 2년생이던 17살에 이민선을 탔다.

"1962년 12월16일에 서울역에서 기차를 타고 부산으로 갔지요.
다른 이민자들과 함께 부산의 재활원에서 이틀을 보내고 나서 12월18일에 이민선에 올랐습니다."

그때부터 기나 긴 여정이 시작됐다.

일본 오키나와에 들러 일본인 이민자들을 태운 선박은 홍콩, 싱가포르, 말레이시아의 페낭을 거쳤다.
인도양에 접어든 선박은 모리셔스와 모잠비크의 마푸토, 남아프리카공화국의 더반과 포트 엘리자베스, 케이프타운에서 2~3일씩 머물렀다.
난생처음 보는 아프리카의 풍경은 김씨에게 오래된 추억으로 남아 있다고 한다.
대서양을 가로지른 선박이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에 도착했다.
대한민국 1호 특명전권대사인 박동진이 이들을 맞았다.
김씨는 당시 우리 대사관의 모습을 뚜렷하게 기억했다.

"우리나라 대사관은 별도의 건물이 아니라 아파트처럼 생긴 건물에 입주해 있었어요.
태극기가 창문 밖으로 내걸려 있던 모습이 생각납니다."
선박은 이틀이 지나 리우를 떠났고, 1963년 2월12일 목적지인 상파울루 주 산토스 항에 도착했다.

여기서 다시 기차를 탄 한인들은 상파울루 시에서 100㎞가량 떨어진 미라카투라는 곳으로 갔다.

미라카투는 이민 1세대를 위한 거주지로 알려진 곳이었다.
그러나 한인들은 미라카투에 오래 머물지 않았고, 각자의 형편에 따라 농장 등으로 흩어졌다.
김씨의 가족은 상파울루 주 이타케라에 있는 일본인 과수원으로 들어갔다.
1963년 5월 말이었다.
"평생 해보지 않았지만, 영농기술을 배우며 열심히 일을 했지요.
1964년에 땅 6만 평을 사들일 정도로 나름대로 자리를 잡았어요."

김씨 가족은 1971년 3월까지 농장을 운영했다.
그러는 사이 김씨는 독학으로 명문 상파울루 주립대학(USP) 경영학과에 입학했다.
김씨 가족이 농촌을 떠나 상파울루로 이주하는 계기가 됐다.
이국적 정취가 물씬 풍기는 대도시 상파울루는 김씨에게 새로운 세상이었다.
가족들은 식료품점을 운영했고, 김씨는 대학을 다니면서 1972년부터 1978년까지 6년간 초창기 코트라 무역관에서 일했다.
한 사람이 10명의 몫을 해야 하는 상황이었지만 김씨는 당시를 아름다운 추억으로 간직하고 있다.

"자비로 신문과 잡지를 구독하며 브라질 경제와 시장에 관한 보고서를 만들었어요.
한국 업체들이 보낸 가스통과 소주를 싸들고 직접 팔러 다닌 기억도 납니다."
김씨는 지난 50년간 대한민국은 물론 브라질 한인 동포사회도 큰 발전을 이룩했다고 강조했다.

"대한민국은 최빈국에서 50년 만에 선진국이 됐습니다.
1991년에 브라질 국적을 취득했는데, 당시엔 대한민국이 이렇게 발전하리라고는 생각하지도 못했어요.
브라질 국적으로 바꾼 것을 후회할 정도입니다.
동포사회도 엄청나게 성장했습니다."
이민 50년을 맞은 동포 사회의 앞날에 대한 기대감도 컸다.

"1.5세와 2세들은 1세들과 많이 다릅니다.
훌륭한 인재들이 많아요.
한인들은 브라질 이민사회에서 가장 앞서가는 커뮤니티를 이루고 있습니다.
앞으로 브라질에서 가장 강력하고 다이내믹한 커뮤니티로 성장할 겁니다."

김씨는 50년 전 조국을 떠나올 때 가족이 사용한 이민 여권을 지금도 소중하게 보관하고 있다.

"이 여권들은 우리 가족의 역사이자 브라질 한인 이민사의 자랑스러운 기록입니다.

"브라질 한인 이민은 세계에서 가장 성공한 사례" | 연합뉴스

"브라질 한인 이민은 세계에서 가장 성공한 사례" | 연합뉴스



"브라질 한인 이민은 세계에서 가장 성공한 사례"

송고시간2012-12-21


고미혜 기자기자 페이지


'브라질 이민 50주년' 학술대회서 최금좌 교수 주장

(서울=연합뉴스) 고미혜 기자 = 1963년 2월 12일 103명의 한인을 태운 네덜란드 선박 치차렌카 호가 브라질 산토스 항에 도착했다.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고 1962년 3월 이민법이 공포된 이후 처음 실시된 공식 집단이민이었다.

내년 브라질 이주 50주년을 앞두고 반세기 브라질 이민사를 돌아보고 현재 브라질 한인사회를 살펴보는 자리가 마련됐다.

재외한인학회(회장 임영상 한국외대 교수)는 21일 서울 서초동 외교센터에서 열린 연례학술대회의 첫 번째 세션에서 '브라질 한인의 문화적 적용과 한국 문화의 수용'이라는 주제로 발표와 토론을 진행했다.


이 자리에서 최금좌 한국외대 교수는 "정부의 대 브라질 이민정책은 세계 이민 역사상 가장 성공한 사례로 꼽을 만하다"며 ▲미리 정착한 일본인과 일제강점기 그들과 함께 이주한 한인들의 도움 ▲상공업과 금융의 중심지인 상파울루에 정착한 점 ▲이민자들이 진취적인 소상인 집단으로 구성된 점 ▲한국-브라질의 경제 성장과 교역 확대 등을 이민 성공 요인으로 제시했다.

1963년 첫 이민이 실시된 이후 다섯 차례에 걸쳐 총 1천300명의 농업 이민자들이 브라질로 이주했다.

농업 이민이었지만 이민자 대부분이 도시 출신의 화이트칼라였으므로 당시 브라질에서 진행되던 산업화와 도시화 흐름에 맞춰 대부분 이민자가 3~4년의 농업 계약기간이 끝나기도 전에 농장을 이탈해 인근 도시로 이주했다.

브라질 정부가 농업 이민을 금지한 이후 1970년대에는 해외개발공사를 통해 1천400여 명의 기술자들이 이민을 떠났다. 서독으로 갔던 광부와 간호사, 베트남에서 일하던 계약 노동자 등도 제3국을 통해 브라질에 도착하면서 브라질 한인사회도 규모가 커지기 시작했다.

현재 브라질에는 5만 명의 한인이 한인타운으로 명명된 상파울루의 봉헤치로와 브라스 등을 중심으로 의류업에 종사하며 거주하고 있다.

한인들은 수준 높은 디자인과 좋은 품질의 옷을 매우 싼값에 공급하며 경쟁력을 키워 현재 브라질 의류 생산의 40%를 담당하고 있다.

최 교수는 "초기 이민자들은 전문가 혹은 사업가로서 재브라질 한인사회의 중추산업을 일으키는 데 기여했으며 초기 이민자의 수가 적어 자연스럽게 서로 단결할 수 있었다"고 설명했다.

최 교수는 이어 "상당수의 이민자가 미국으로 재이주한 탓에 이민 역사에 비해 한인의 수는 많지 않다"며 "최근 브라질의 경제가 성장하고 있고 한국 기업의 브라질 진출과 대학생 연수도 확대되고 있어 향후 3년 내 한인의 수는 급속하게 증가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또 다른 발표자인 안경자 전 상파울루 한국학교 교장은 "2005년 이후 한국에 대한 브라질 언론의 관심이 양적, 질적으로 눈에 띄게 달라졌다"며 "한국어 수업에 대한 현지 학생의 수요도 늘고 있다"고 전하기도 했다.

한편 이날 학술대회 두 번째 세션에서는 전문가들이 일본, 러시아 사할린과 상트페테르부르크, 독일 등 지역별로 해외 한인문화의 정착과 전승 양상을 짚어봤다.

'국제결혼 여성들의 가족생활과 경제활동', '재외동포 의료 서비스 개선 방안' 등을 주제로 한 대학·대학원생들의 발표도 이어졌다.

mihye@yna.co.kr

브라질 속의 한국인: 한국-브라질 수교 55주년ㆍ이민 51주년 기념 특별전



도록 / 전시
브라질 속의 한국인: 한국-브라질 수교 55주년ㆍ이민 51주년 기념 특별전
발행일2014-04-29



발간부서조사연구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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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대한민국역사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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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브라질 수교 55주년ㆍ이민 51주년 기념 특별전 자료집

브라질 속의 한국인

Coreanos no Brasil



목차


010 1부 희망의 나라 브라질로!, ‘치차렌카’에 꿈을 싣다
- 1차 이민
- 2차 비토리아 지역 이민
- 3차 카우사 이민
- 4차 볼리비아 초청이민과 5차 가톨릭 이민
- 이민 초기 한국과 브라질
- 당신이라면...
- 이민의 배경
- 공식이민 이전의 이민자들
- 국교수립 이전, 한국에 소개된 브라질

070 2부 영농이민의 꿈과 좌절, 아리랑 농장에서 비토리아까지
- 아리랑 농장
- 서울 농장
- 비토리아 지역 정착 예정지
- 카우사 이민과 볼리비아 초청이민 정착 예정지
- 산타마리아 농장
- 십자새마을 농장
- 브라질의 자연과 문화

096 3부 봉헤찌로 코리아타운에서 브라질의 중심사회로 다가서다
- 다양화된 한인 활동
- 한인들의 상업 활동
- 상파울루의 동대문시장, 봉헤찌로
- 삼바축제 속의 한국

124 에필로그


126 논문 브라질 한인 이민사(移民史) - 최금좌


130 문화 Tips 숫자로 보는 브라질

브라질 이민 약사 + 국내에 방영된 방송 프로그램 소개 상세보기|이민정보주 상파울루 대한민국 총영사관

브라질 이민 약사 + 국내에 방영된 방송 프로그램 소개 상세보기|이민정보주 상파울루 대한민국 총영사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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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브라질 이민 약사 + 국내에 방영된 방송 프로그램 소개
작성자 주 상파울루 총영사관
작성일 2020-10-09




브라질 이민 약사




【 이민정책 추진 이전 】

ㅇ1918년 재일교포 1가구 및 독신자 3명이 일본국적으로 입국
o 1956년 반공포로 50여명이 인도를 거쳐 브라질에 입국




【 이민정책 추진기 】

o 1961년 한백협회를 구성, 본격적으로 이민 추진
o 1962년 해외이주법 공포와 함께 정부와 민간이 공동으로 최초의 해외 이민사업 추진
o 1963년 1차로 농업이민(4년간 농업분야 종사 조건부 이민) 103명(17가구 92명, 독신자 11명) 산토스항으로 입국
- 이후 1965년까지 5차에 걸쳐 농업이민으로 지속 유입

o 1970년 한국개발공사 주선, 기술이민자 1,200명(210세대) 입국

o 2010년 상파울루 시정부 봉헤찌로 지역을 한인타운으로 공식 지정
o 2013년 브라질 한인 이민 50주년 경축 행사
o 2017년 상파울루시 8.15 ‘한국문화의 날’ 공식지정
o 2017년 8월 ‘한국문화의 날’ 개최(연인원 4만명 참석)
o 2018년 8월 ‘한국의날 문화축제’ 개최 및 ‘한인타운 상징물’ 완공식 개최




【 브라질 초기 이민의 특징 】

o 정부의 이민정책 차원에서 추진된 영농이민
o 이민에 성공한 사람들의 가족 및 친척 초청에 의해 이루어진 혈연가족 초청이민
o 농촌에 정착하지 못한 고학력 이민자들은 산업・금융 중심의 상업도시인 상파울루 등 대도시 근교로 모여들어 의류・봉제업에 종사




【 브라질 동포사회 특징 】

브라질 동포사회는 중남미 최대 경제도시에 위치




o 브라질 동포사회가 위치한 상파울루는 브라질의 산업 및 금융수도로서 약 2만5천여개의 공장이 운영되고 있으며, 이는 브라질 총 GDP의 30%, 제조업 총생산액의 약 55%를 차지

※ 상파울루 총 GDP: USD 5,878억 (브라질 총 GDP: USD 1조 9,040억)

브라질 동포들의 대부분(98%)이 상파울루州에 거주하고, 한인타운인 봉헤찌로 지역을 중심으로 주로 패션・의류업에 종사




o 브라질 여성의류시장의 약 60%를 점유하고 있으며, 봉헤찌로 지역과 브라스 지역 의류매장 중 약 2,000여개가 동포 소유임

※ 재브라질동포 직업 현황 : 의류업 60%, 통신·전자·IT 15%, 기타 25%




o 최근 중국인과 볼리비아인들이 저가의류 중심으로 의류산업에 진입하면서 동포들의 영업에 타격이 되고 있어 고급의류 중심으로 판매전략 변화가 필요한 실정

※ 의료산업, 전기전자, 무역, 전문직, 공무원 등 동포 2,3세 이후는 사회의 다양한 분야에 진출 중







브라질 카톨릭 이민 다큐멘터리 PBC-TV

PBC-TV [특집다큐] 반세기의 항해 - 브라질 카톨릭이민 50년 (다큐멘터리 영상 시청)
https://www.youtube.com/watch?v=9GA5jiWwz_M

https://www.youtube.com/watch?v=DcwYW8XPT10






KBS 가요무대 브라질 공연 (2016.6.)

KBS 가요무대 브라질 공연 보도

https://www.youtube.com/watch?v=B0G9e_u_YM0



KBS 다큐멘터리3일 한인타운 봉헤치로 방송(2011.1.16.)

KBS 다큐멘터리3일 방송

https://www.youtube.com/watch?v=4Y43NUR4GhE




문화체육관광부 공식 유튜브(브라질 속의 한국인)

https://www.youtube.com/watch?v=OubxDsTKA18





(KBS 한국인의 밥상 해외특집 브라질 2013년 12월 방송)

KBS 한국인의 밥상 해외특집 브라질

https://www.youtube.com/watch?v=Ui8vm1BSQso&t=1s&fbclid=IwAR2xWqbmMkI9An8kd30vHsDj9pCYH-sau5Lp2sEmFRi0af3n4Pjqv_5uQEk

'브라질 이민 밥상 열정으로 통하다'에서는 남아메리카에서 가장 많은 한인이 거주하는 브라질로 찾아갔다. 1963년 2월 12일 제1차 공식이민을 시작으로 1960년대 브라질에 이민을 온 한인들은 한국의 맛을 잊지 않고 있었다. 이민 온 지 44년이나 된 지경혜 씨 부부는 배추, 상추를 비롯해 쑥, 깻잎, 도라지, 더덕, 오리 등 다양한 채소와 가축들을 키우며, 메주를 직접 떠서 된장도 담가 먹었다.

브라질 사람들이 K-팝의 영향으로 한국을 배우면서 김치, 잡채, 삼겹살 등의 한국 음식을 맛있게 먹고 있다는 점도 재미있는 풍경이었다. 이런 모습은 멕시코의 젊은이들에게서도 찾아볼 수 있었는데, 음식이 한국 문화를 알리는 주요한 수단이라는 것을 다시금 일깨워줬다.

최불암의 구수한 진행으로 각 지역의 향토 음식에 담긴 사연과 사람들의 이야기를 통해 우리 문화의 뿌리를 짚어내는 '한국인의 밥상'은 화학조미료가 가미되지 않은 순수한 음식 다큐멘터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