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dnesday, November 10, 2021

알라딘: [사랑을 말할 때 우리가 이야기하는 것]을 읽고 한국 사람들이 이야기 하는 것

알라딘: 사랑을 말할 때 우리가 이야기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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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브리미널 광고 같은 단편




레이먼드 카버의 "춤 좀 추지 그래?" 부터 "한 마디 더"의 17개 단편으로 구성된 "사랑을 말할 때 우리가 이야기하는 것"을 모두 읽고 나면 몇 개의 잔상만 남을 뿐이다. 17개 각 이야기별로 줄거리를 기억하거나 그것을 구분 짓는 것은 불가해 보인다. 의미가 없어 보이고 그것이 카버가 의도한 것만 같기도 하다. 장대한 긴 이야기가 우리의 영혼까지 그 이야기의 주제를 각인시키는 것이라면 짧은 이야기는 우리가 그것을 인지할 시간도 없이 눈앞에 '제시'하고는 곧 사라져버려 그 '잔상' 마저도 거머쥐기 힘들다.




서브리미널 (Subliminal)

"인지의 아래(Below threshold, 식역하(識閾下))", 즉 우리가 뭔가를 감지하고 그것에 대한 판단을 내리기 전에 이미 감지한 것을 의미한다.

(출처: 나무위키)




우리가 보는 영상은 대부분 초당 30장의 이미지가 연속되는 것이고, 그 30장에 광고 이미지 한 장을 삽입하는 것이 서브리미널 광고 (Subliminal Advertising) 이다. 눈으로 명확하게 인지되지 않지만, 무언가를 본 것 같은 느낌이 겨우 들지만, 영화를 보고 났는데 서브리미널 광고로 삽입된 코카콜라 이미지 때문에 콜라가 마시고 싶다는 것이 한 예가 될 수 있다. 국내에서는 이런 광고가 허용되지 않는다고 한다.




카버의 단편들은 마치 서브리미널 광고의 한 장의 이미지처럼 연속된 삶의 프레임에 슬쩍 끼워져 우리 잠재의식만이 겨우 그것을 인지하는 것 같다. 내 의식이 닿지 않는 저 아래 깊은 곳을 흐르는 잠재의식이 그것을 어떻게 느끼는지 알 수 없다. 나는 읽고 있지만, 언어정보의 해석을 담당하는 베르니케 영역(Wernicke's area)이 어떤 정보를 해석하는지는 나의 통제를 벗어난 것 같고, 읽은 것을 어떻게 표현할지 출력을 담당하는 브로카 영역(Broca's area)은 애를 먹는다.




레이먼드 카버가 다루는 삶은 본인도 겪었던 '술', '중독', '파산', '불화', '밑바닥'과 같이 '삶에 지친, 자포자기 상태'에 처한 인물들의 일상'p245 이다.




우리로 하여금 눈을 돌리고 싶게 만드는 그 일상의 내부를 들여다보게 한다.

일상의 내부에 때로는 미세하게, 때로는 심각하게 나 있는 흠과 금이다. 우리는 그것들을 보면서 가볍게 전율하거나 머리를 내젓게 된다. p245




어떤 이유 때문인지 모르지만 한 남자가 집안 물건을 모조리 마당에 내놓고 팔고 있고, 딸에게 자신의 불륜을 애쓰며 설명하고, 말다툼 끝에 딸과 아내를 등지고 아버지는 짐을 싸서 나가고, 행복해 보이는 두 친구의 가족들이 만나고 있는 와중에 두 가장은 젊은이로 돌아가 두 여자를 쫓아다니고, 이발소에서는 거칠게 욕설을 주고받고, 아이가 밤새 울고 아침까지 진정이 되지 않아 말다툼을 극단적으로는 하지만 젊은 남편은 사냥 약속을 취소하고, 아내의 외도를 참지 못하고 자신이 아끼는 배스가 가득한 호수로 들어가 자살하는 등. 이 모든 이야기는 오래된 영화 속에 나오는 먼지가 가득하고 붐비는 대합실을 메우고 있는 사람들의 버스를 기다리는 무료함을 달랠 정도로만 들을 수 있는 이야기이다. 목적지를 향해 달려가는 버스에 몸을 싣고 나면 더 이상 생각나지 않을 것 같은 이야기이다. 하지만 신기하게도 서브리미널 광고의 한 컷 이미지처럼 그런 이야기들은 삶의 어느 순간 갑자기 그리고 연관 없이 떠오르기도 한다.




흠과 금이 갔을 때.

그것들은 우리 삶에 단절을 가져올지 모른다.

무거운 수납을 하고 병원의 비상계단을 오르내릴 때 그것이 이제 시작임을 알게 되는 순간. 그 길고 억척스러워야 하는 터널 앞에 있지만, 나는 계단을 하나하나 또는 두 개씩 밟고 오르내려야 한다. 그리고 나와 같이 덜하거나 더한 보호자들이 서로 교차한다.

출퇴근의 도로에서 겨우 보이든 부러운 아파트 단지들을 병원 고층의 긴 복도에서 내려본다. 주말이나 연휴 때에 있을 것이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하고.

그 흠과 금은 충전 중이든 핸드폰의 케이블을 무심코 발로 살짝 건드렸는데, 책상에서 핸드폰이 떨어지면서 액정이 흉한 금이 쫙 갔을 때처럼 갑자기 어이없이 나타난다. 그 직전까지 터치하던 액정은 이제 유릿가루가 떨어질까 봐 손을 댈 수도 없다.




내 의식의 인지와 통제를 벗어나는 단편들. 내 잠재의식만이 읽고 있을 것 같은 단편들. 그래서 그 단편들이 내 삶에 흠과 금이 갔을 때 갑자기 찾아와 위안을 주는 이전 일상에서의 건너온 따뜻한 커피나 다정한 말 한마디 먼지를 들추며 내리쬐는 빛줄기처럼 '위안'을 주는지는 모르겠다. 주는 것 같기도 하다.




References

서브리미널 (Subliminal)

베르니케 영역(Wernicke's area)

브로카 영역(Broca's ar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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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딩 2021-07-24 공감(53) 댓글(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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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리뷰] 사랑을 말할 때 우리가 이야기하는 것


사랑을 말할 때 우리가 이야기하는 것

외국영화에 보면 이동식 놀이동산이 한 번씩 나오곤 한다. 이제 마을에서 올 사람들은 거의 다 온, 오늘을 마지막으로 천막을 걷을 놀이동산이다. 해는 지고 첫 날의 기고만장 대신 해 질 무렵의 쓸쓸함이 밀려오지만, 내일은 또 다른 곳에서 새로운 회전목마가 돌겠지. 하루키의 단편들은 그런 놀이동산 느낌이 난다. 하루키와 참 많이 닮은 레이몬드 카버의 단편들도 놀이동산 느낌이다. 철 지나고 버려져, 그대로 비를 맞아 녹 슬고 삐걱이며 더 이상 돌지 못하는 회전목마의 놀이동산.
하루키의 좀 더 삭막한 버전의 단편을 읽는 느낌이었다. 구체적인 상표의 언급과 묘사가 주는 현실감도 닮았다.
레이먼드 카버.
로버트 알트만 감독의 영화 <숏컷>과 하루키의 글들에서 먼저 안면을 튼 작가다.
<숏컷>은 그 당시 내가 좋아했던 줄리안 무어와 팀 로빈슨이 나온다고 해서 무턱대고 본 영화, 보고 나서는 이게 뭐지? 했던 영화다. 레이먼드 카버의 단편들을 엮어 만든 영화다.
삭막함과 불륜, 어지럽고 독창적인 이야기들이 묘하게 맞물리는 영화였다.
그리고 <사랑을 말할 때 우리가 이야기하는 것>에서 숏컷 영화의 몇 장면을 그 느낌을 찾았다.
<목욕>이란 단편에선 생일을 앞두고 사고를 당한 스코티, 그리고 스코티의 케이크를 주문받은 가게 주인이야기가 나오며, <여자들에게 우리가 간다고 말해줘>에서의 유부남들이 불륜,<너무나 많은 물이 집 가까이에>에선 변사체를 놓고 태연히 캠핑을 즐기는 남자들이야기.

매번 보던 익숙했던 벽의 금이, 벗겨진 페인트칠이 못 견뎌질 때가 있다. 그러려니 참았던 남편의 뒤집어진 양말에, 오늘은 끝장을 보리라 극단적일 때가 있다.
그것은 이미 포화상태, 참을 만큼 참았다는 것.
미끈하고 번지르한 삶보단, 소금기 어린 그리고 쓸쓸함과 의미없음, 지나가 버리고 나면 무상함만 남는 삶의 아픔이 담겨 있다.
낡고 허물어져 가는 집, 구차한 세간들, 그 속의 더 위태로운 삶들이 아픔으로 혹은 불편함이나 불쾌함으로 그리고 소설 속 솔직한 현실 앞에 수치스러움으로 담겨 있다.
삶은 이렇게 구차하고 허무하고 손쉽게 바스라지고 더럽혀지는 걸까.
니체는 위대한 철학자들은 우리가 사는 세상이 덧없는 그림자라는 예감을 갖고 있다고 했다.
덧없는 그림자.
그렇지만 그 그림자들이, 모네가 그린 그림자처럼 제각기 색깔이 다름을, 모양도 크기도 다름을 조금은 희망으로 받아들여도 되지 않을까.

<결국 그들은 하던 일을 계속했고, 텐트를 쳤다. 그들은 불을 피웠고 위스키를 마셨다. 달이 떴을 때 그들은 여자애 얘기를 했다. 누군가 시신이 떠내려가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말을 했다. 그들은 손전등을 들고 다시 강으로 갔다. 그들 중 한 명이 물 속으로 들어가 그녀를 붙잡았다. 그는 그녀의 손목을 잡고 강가로 끌어냈다. 나일론 줄을 찾아 그녀의 손목을 묶은 다음 나무에 걸었다. ~ 너무나 많은 물이 집 가까이에, 126p~>

<그 후로 아버지는 하는 일마다 제대로 되지 않은 듯했다. 더미가 그러했던 것처럼 그는 더 이상 자기 자신이 아니었다. 물 위로 나왔다가 다시 들어간 그 팔은 좋은 시절에 보내는 작별인사이자 나쁜 시절을 맞이하는 인사인 듯 여겨졌다. 더미가 그 어두운 물 속으로 자신의 몸을 던진 이후 모든 일이 그러했다. ~ 우리 아버지를 죽인 세 번째 이유 160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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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ni74 2021-06-14 공감(30) 댓글(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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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각한 오역과 심드렁한 문학동네


소설가 정영문이 번역한 <사랑을 말할 때 우리가 이야기하는 것>을 읽기 전에,
원서로 [What we talk about when we talk about love]를 먼저 읽었다.(Vintage Books Edition, June 1989)

원서로 읽었음에도 번역본을 다시 읽은 이유는
"도대체 어떻게 번역을 했을까?"
참을 수 없이 궁금했기 때문이다.

Raymond Carver의 문장은 진정...간결하고도 짧다.
두줄 넘는 문장이 거의 없다. 동사도 아~주 평이한 걸 쓴다.
평이한 동사란 무엇인가?
이렇게도 저렇게도 해석될 수 있는 수많은 가능성을 가진 동사다.

"집사재"에서 나온 Raymond Carver 시리즈는 잘 읽어지는데
"문학동네"판은 읽기가 힘들다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건....당연할 수 밖에 없다.

왜? Raymond Carver의 문장은 "불친절" 하니까.

"문학동네"에서 펴내고 있는 Raymond Carver 시리즈는 "완역본"이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작품해설이 부록처럼 들어있는
"집사재"에서 펴낸 시리즈는?
친절한 일본어 번역의 영향을 상.당.히 받은 듯 하다.

Raymond Carver의 단편들엔 사전을 찾아야 할 어려운 단어가 거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번역을 하기엔 참으로 난해하고 어려운 작품들이다...라고 생각했다.

"도대체 어떻게 번역했을까?"
궁금해서 읽은 정영문 번역의 <사랑을 말할 때...>에서
"심각한" 오역을 발견했다.

[Tell the Women We're Going]에서
제리는 두 여자를 "죽인다".

그런데...<여자들에게 우리가 간다고 말해줘>에서
제리는 두 여자와 "섹스를 한다".

"문학동네"에 전화를 할까, 귀찮은데 그냥 넘어갈까 망설이다가
귀차니스트의 본능을 억누르고 전화를 했다.

난 담당자를 바꿔 달라고 하고 정중하게 말했다.
"심각한 오역이 있어서 전화드렸습니다."

그런데.....담당자는 전혀 놀라지도 않고
오히려 귀찮다는 듯이 전화를 받았다.

허름한 분식집에서 3천5백원짜리 김치찌개를 먹다가
"여기 머리카락 들었어요!" 말했을 때
주인 아줌마의 반응보다도 심드렁했다.

담당자의 심드렁한 태도는 "오역 첨 봐?" 하고 나를 흘기는 듯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화를 한 김에 꾸역꾸역 말을 했다.

"103~104 페이지 보시겠어요?

원문 : But it started and ended with a rock.
오역 : 하여튼 그건 바위에서 시작하여 바위에서 끝났다.

원문 : Jerry used the same rock on both girls, first on the girl called Sharon
and then on the one that was supposed to be Bill's.
오역 : 제리는 같은 바위 위에서 두 여자, 처음에는 샤론이라는 여자와,
그 다음에는 빌리의 몫인 여자와 섹스를 했다.

같은 바위 위에서 두 여자랑 섹스를 한 게 아니라,
두 여자를 같은 돌로 쳐서 죽인 거예요."

실컷 듣고 있던 직원은 여전히 심드렁하게 말했다.
"네~ 2판 찍을 때 참고할께요."

화가 나기 보다는... 허무했다.
이게 도대체 무슨... 시간 낭비람? 쓸데 없는 짓을 했다.삽질!

담당자는 내 연락처도 물어보지 않고 전화를 끊었다.

소설을 사랑하는 선배에게 이 얘기를 했더니
그런건 출판사에 전화하지 말고 번역가에게 직접 알려주라고 했다.
그 얘길 듣고 잠시 정영문에게 멜을 보낼까...생각하다가 접었다.
삽질은 한번으로 충분하기에.

누구나 오역을 할 수 있다. 그 어떤 훌륭한 번역가라도.
하지만... 오역이란 2판 찍을 때 "참고할" 만한 한가한 사항은 아니지 않을까?

오역으로 인해 이 책을 읽은 독자는 이렇게 생각할지도 모른다.

왜 제리는 친구도 옆에 있는데 혼자서 두 여자랑 섹스를 했을까?
제리는 욕심장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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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leinsusun 2006-12-02 공감(42) 댓글(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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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리뷰] 사랑을 말할 때 우리가 이야기하는 것


레이먼드 카버의 작품을 좋아한다고 하기에는 무언가 조금 부족하기는 하다.
그의 소설 속 인물들은 여전히 나에게는 너무 난해하고, 허무맹랑하고 한편으로는 너무나 현실적인 주인공들이다.

하지만 수 많은 책을 읽었지만, 여전히 내가 책에서 가장 좋아하는
구절이 이 책에 나온다.

‘내 심장이 뛰는 소리가 들렸다. 다른 모두의 심장 소리도 들렸다.

우리가 내고 있는 인간적인 소음이 들렸다.

방이 어두워졌는데도 누구도 움직이지 않았다.’

날이 쓸쓸해지면 늘 생각나는 책.

+) 국내 카버의 번역본은 대성당 제외 모두 엉망이다.....
아무리 단편집이라지만 미국을 대표하는 그 레이먼드 카버인데
문학동네가 언제 개정판을 내줄까?...
심지어 모든 책의 표지도 너무 구리다 ㅠㅠ 정말 슬픈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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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탈리 2021-02-25 공감(10) 댓글(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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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먼드 카버의 단편소설집






영화 <버드맨>을 봤고, 레이먼드 카버의 소설을 읽고 싶어져서 이 책을 구입해서 읽게 되었다. 레이먼드 카버는 무라카미 하루키를 통해 알게 되었고, 꼭 읽어보고 싶은 작가 중에 하나였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나는 이 책을 잘 감상하지 못한 것 같다. 레이먼드 카버의 작품세계를 처음 접하는 내게는 너무 낯설었으며, 작품을 통해서 작가가 무슨 이야기를 하는 지 도통 이해하지 못했다. 짧은 단편을 다 읽고 나서 드는 생각은 항상 '머지?? 무슨 이야기지?' 하는 것들 뿐이었다.

유일하게 내가 온전히 이해할 수 있었던 단편은 <사랑을 말할 때 우리가 이야기하는 것>이었다.



3인칭 관찰자 시점이라고 해야하나? 아무튼 작가는 인물들의 행동과 대화를 그저 보여줄 뿐 어떠한 판단도 드러내지 않는다. 오로지 리얼만 존재할 뿐 판단과 해석은 독자에게 슬그머니 떠 넘긴다. 아니 떠넘긴기보다는 그냥 현실 그대로를 가감없이 보여줄 뿐이다. 소설 속 인물이 찌질하면 찌질한대로 미숙하면 미숙한대로, 그냥 보여줄 뿐이었다.



소설 속 인물들의 심리나 생각은 오로지 그들의 대화와 행동을 통해서 유추할 수 밖에 없다. 그리고 그 능력이 나는 정말 부족한가보다ㅠ



예전에 무라카미 하루키의 <TV피플>이란 소설을 누나에게 빌려준 적이 있었다. 나는 정말 너무너무 재미있게 읽었기 때문에 누나에게 "어땠어?" 라고 물었었다. 누나는 "무슨 이야긴지 하나도 모르겠던데?" 라고 했다. 나는 무라카미 하루키에게 익숙해서 인지 그냥 이야기를 이야기 그 자체로만 놓고 재미있게 봤었던 것 같다. 그 이야기를 통해서 작가가 무슨 말을 하려는 지 따위는 신경안쓰고 그냥 이야기 자체가 너무 재미있어서 즐겼었다.

아마 난 카버의 소설을 그냥 그 자체로 읽어어야 했는데, 너무 많은 생각을 하면서 해석하려 하면서 본 건 아닌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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