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day, January 15, 2024

박정미 - 조앤 디디온 미국의 저널리스트이자 에세이스트 글 쓰는 사람들은 언제나 누군가를 팔아넘기고 있다

박정미 - 글 쓰는 사람들은 언제나 누군가를 팔아넘기고 있다 <조앤 디디온>이라는 미국의 저널리스트이자 에세이스트를... | Facebook
박정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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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쓰는 사람들은 언제나 누군가를 팔아넘기고 있다

<조앤 디디온>이라는 미국의 저널리스트이자 에세이스트를 우연히 알게 되었다. 페친이 인용한 글을 통해 처음 접한 후 넷플릭스에서 그녀의 생애를 다룬 다큐를 찾아내었고, 급기야 초기 작품집인 <베들레헴을 향해 웅크리다>를 주문해 읽었다. 

"조앤은 수필을 통해 자신이 살아온 시대의 역사를 썼어요. 소설만큼이나 유연하고 변동성있고 뉘앙스를 사용할 수 있는 방법으로요."

"조앤은 (자기가) 무슨 생각을 하고 무엇을 느끼는지 알기 위해서 글을 써요."

넷플릭스 다큐에서 조앤의 지인들이 증언한 그녀의 문체와 글쓰기방식은 흥미로웠다. 그런데 더 세게 나를 끌어당긴 것은 그녀의 얼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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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시절 그녀의 얼굴을 보면 다소곳하고 수줍은 듯 하면서도 내적인 강인함이 느껴진다. 그리고 여배우처럼 화사하지는 않지만 단정하게 정돈된 이목구비가 때에 따라 귀 밑과 어깨사이를 오르내리며 길고 짧아지는 단발머리와 어울려 지적인 아름다움을 뿜어내고 있었다. 

그리고 그 눈이 참 이뻤는데 빤히 쳐다보면서도 결코 속단하지 않고 투명하게 지켜본다는 느낌을 주었다.공격적으로 팩트에 육박해들어가는 것이 미덕인 저널리즘계에 속한 사람으로서는 아주 특이한 눈이었다. 그 눈은 팩트 자체보다는 진실이 무엇인가 골몰하면서 수동적으로 그러나 끈질기게 들여다보는 듯 했다.

그녀가 대표하는 <뉴 저널리즘>은 소설처럼 스토리텔링과 문학적 기법을 통해 사실을 전달하고자 하는 조류다.  
그 어여쁜 얼굴과 작은 체구로 조앤은 샌버디노 현장을 찾아 살인동기를 캐고 히피이즘과 마약에 찌든 1960년대 샌프란시스코의 거리를 거닐었다. 거기서 당대 중산층의 공허함과 사회의 해체를 포착했다. 

시들어가는 이데올로기의 끝자락을 붙잡고 있는 미국공산당 중앙위원회의 한 젊은이를 만나고 미국 인권운동의 상징으로 60년대를 풍미한 존바에즈를 찾아가 시대의 초상화를 그렸다.  

자기가 본 그 장소에서 살아있는 사람들의 엇갈린 증언을 채록하고 한 시대의 감성과 정신을 자신만의 문체로 그려냈다. 

내 대학시절 절친은 어린시절부터 책벌레였는데  '수필은 절대 읽지 않는다'는 남다른 독서관을 갖고 있었다. 남의 횡설수설을 시간들여 읽고 있을 이유가 없다는 것이 그애의 지론이었다. 그 때는 그 말을 이해할 수 없다가 나이가 들자 나도 점점 그 애의 말을 따라가고 있다. 

에세이, 특히 시간과 장소의 구체성을 갖추지 못하고 관념과 감정의 직조물로 쓴 에세이에는 점점 여유를 잃게 된다.
시간과 장소의 물성이 집약된 것이 바로 인간이다. 조앤디디온의 글에는 시대의 감성과 지성이 사건의 지평에 선 인간을 통해 드러나있다. 
 제대로 된 글은 인간을 그려내지 않고는 쓸 수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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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것이 기억해야 할 마지막 한가지다. 글 쓰는 사람들은 언제나 누군가를 팔아넘기고 있다는 것."
그러므로 조앤이 책의 서문에서 말한 이 유명한 구절은 
  • 누군가를 팔아넘기지 말라는 뜻이 아니다. 
  • 어차피 글은 누군가를 팔아넘겨야 제대로 나오게 되어있다. 
  • 글을 쓰는 사람은 가차없이 누구든지 팔아먹을 생각을 해야 한다. 
  • 다른 사람이 안팔리면 자기라도 팔아먹어야 한다
  •  하지만 이왕 팔아넘길 때는 제값을 받고 비싸게 팔아넘겨야 한다. 
  • 시대의 진실에 가까이 갈수록 비싸고 좋은 것이다.
나는 누군가를 혹은 나 자신을 책임지고 팔아먹을 용기가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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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들레헴을 향해 웅크리다

조앤 디디온 지음 | 김선형 옮김

원제Slouching Towards Bethlehem
발행일2021년 4월 8일
ISBN9791191438000 03300
면수344쪽
판형변형판 127x200, 반양장
가격17,000원
한 줄 소개
결코 낡지 않는 "원조 쿨 걸" 조앤 디디온의 세계를 만나다
주요 내용

‘단단한’ 스타일과 ‘날카로운’ 지성의 작가

디디온 글쓰기의 원형을 만난다

 

시대를 앞선 스타일로, 영미권에서 ‘통찰력 있는 에세이스트’를 넘어 신화가 된 조앤 디디온. 1968년 출간된 『베들레헴을 향해 웅크리다』는 그가 취재한 기사와 에세이를 엮은 첫 논픽션으로, “지난 60년간을 통틀어 가장 독보적인 영향력을 행사한 에세이 선집”이자 소설처럼 읽히는 뉴저널리즘의 고전으로 꼽힌다. 디디온 스타일의 원형과 정수가 담긴 이 책은 ‘히피’를 비롯해 반문화를 대표하는 인물과 현장들을 탐사하며 1960년대 혁명의 격변기를 거치는 미국의 초상을 그려내는 한편, 자신의 내면과 고향인 새크라멘토 등을 아우르며 미국의 삶과 정신을 묘파해낸다. 오늘날에도 결코 낡지 않은 현재성이 돋보이며 여성의 글쓰기와 에세이의 외연을 확장하는 이 책의 섬세한 문장과 특유의 리듬감을, 마거릿 애트우드, 수전 손택, 패티 스미스 등 수많은 여성 작가들의 작품을 우리말로 옮긴 김선형 번역가가 노련하게 살려냈다. 또한 디디온에게 글쓰기가 갖는 의미를 이야기하는 「옮긴이 해제」가 디디온의 세계에 대한 이해를 돕는다.

 

‖ 책 소개 

 

조앤 디디온몇 세대가 지나도 낡지 않는,

작가와 예술가들이 사랑하는 이름

 

“디디온은 내 수호성인이다. 그의 진실들은 작은 칼이며, 표면을 뚫고 삶, 특히 캘리포니아의 삶이라는 환상이 피를 흘리게 한다.”

_그레타 거윅(<레이디 버드><작은 아씨들> 감독, <프란시스 하> 배우)

 

“남자들의 세계에서 글을 쓰는, 디디온의 무성적인 목소리를 사랑한다.”

_킴 고든(뮤지션, 미술가, 『걸 인 어 밴드』 저자)

 

“디디온은 우리 시대의 진실 중에서도 가장 완강하고 다루기 힘든 진실들을 엄정하고 유려하게 증언했다. 찬사 같기도 절망 같기도 한 그 목소리는 언제나 잘 통제되어 있었다.”

_조이스 캐럴 오츠(소설가)

 

“이 책을 손에 넣었을 때, 나는 디디온의 목소리와 산문이 전하는 독특한 힘—외과수술의 정밀함, 주문에 가까운 리듬에 감동받았다. (…) 사실 디디온의 작품은, 여러 면에서, 1990년대와 2000년대에 등장한 새로운 세대의 작가들이 받아들인 회고록 글쓰기를 예견했다.”

―미치코 가쿠타니(『진실 따위는 중요하지 않다』 저자)

 

“이 책에 완전히 사로잡혔다. (…) 디디온을 사랑한다.”

―애니 클라크(세인트 빈센트, 뮤지션)

 

“디디온은 내가 정말 어두울 때, 세상에 대해 생각하는 방식을 돌아보게 한다. 그건 몹시 절망적이다. 디디온은 부끄러워하지 않고 그냥 거기에 간다.”

―피비 브리저스(뮤지션)

 

“디디온은 언제나 내가 정말로 존경하는 작가 중 한 사람이다. 가장 좋아하는 디디온의 글은 1967년 에세이 <베들레헴을 향해 웅크리다>. 영국에서 자란 애들은 히피 시대가 유토피아적인 꿈나라라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엉망이었다. 문화적 쿨함의 바깥에서 반문화를 그대로 바라보는 디디온의 능력을 사랑한다.

―매튜 힐리(더 1975 멤버, 뮤지션)

 

“강한 파급력을 지닌 에세이. 서구의 신화와 미국 그 자체에 대한 묵상. 정곡을 찌르고, 앞날을 내다보며, 시대를 타지 않는다.”

―캐리 브라운스틴(슬레이터 키니 멤버, 뮤지션, <포틀랜디아> 배우, 『헝거 메이크스 미 어 모던 걸』 저자)

 

“인간 군상의 초상을 그리는 디디온의 목적은 폭로가 아니라 이해다. (…) 디디온은 그들을 악인으로 몰지도 않고 화려하게 미화하지도 않는다. 그들은 생생히 살아 있고 엉망진창이고 애달프게 아름다울 때도 많다.”

―댄 웨이크필드(《뉴욕 타임스 북 리뷰》)

 

“1960년대와 70년대 미국에 대한 우리의 관념은, 상당 부분, 디디온 덕분에 존재하게 되었다.”

―허마이어니 호비(《가디언》)

 

“캘리포니아는 디디온에게 시작에 불과했다. 지금과 마찬가지로 그때도 디디온은 국가로서의 미국 그 자체를 주시했고, 그때나 지금이나, 그보다 더 명료하고 적확하게 본 사람은 극히 적었다.

―조너선 야들리(《워싱턴포스트》)

 

미국 에세이의 살아 있는 전설

‘원조 쿨 걸’ 조앤 디디온의 세계

 

2021년 현재 뉴욕에 살고 있는 86살의 조앤 디디온은 20세기 후반 미국을 대표하는 가장 영향력 있는 저널리스트이자 에세이스트를 넘어, 신화가 되었다. 미국에서 통찰력 있는 에세이나 회고록을 쓰는 여성들은 물론, 음악을 만드는 여성들까지도 디디온과의 비교를 피할 수 없다(그 리스트에는 『트릭 미러』의 지아 톨렌티노와 『면역에 관하여』의 율라 비스, 킴 고든, 라나 델 레이 등이 있다). 여러 매체에는 “디디온풍”Didion-esque, “디디온 같은”Didion-like, “디디온스러운”Didion-ish 같은 형용사, “우리 시대의 디디온”과 “다음 세대의 디디온”, “디디온을 비롯한 작가들의 전통 속에서” 같은 표현들이 범람한다.

디디온이 관찰과 분석과 문장이 탁월한 에세이스트의 압도적인 대명사, 나아가 형용사로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2010년대부터다. 밀레니얼 세대에게 영향력 있는 작가와 배우와 뮤지션들이 디디온으로부터 받은 영감과 그에 대한 애정을 피력했으며, 미셸 딘에 따르면 “후대의 젊은 여성들은 디디온이 글에서 자신들 내면의 가장 깊숙한 생각을 표현해주었다고 주장”했다.

은둔으로 악명 높던 이 고령의 작가는 2015년 패션 브랜드 셀린의 모델이 되었고, 같은 해 700페이지가 넘는 디디온 평전이 출간되었다. 2017년에는 디디온에 관한 넷플릭스 다큐멘터리 <조앤 디디온의 초상>이 공개되었고, 

2019년 디디온의 소설을 영화화한 <마지막 게임>The Last Thing He Wanted이 개봉했으며, 올해는 디디온의 미발표 에세이를 묶은 책 『내가 하고 싶었던 말』Let Me Tell You What I Mean이 출간되어 큰 화제를 모았다.

디디온은 1934년에 캘리포니아 새크라멘토에서 태어나 다섯 살부터 글을 쓰기 시작했다. 패션잡지 《보그》 에디터를 거쳐 여러 매체에 글을 기고했으며, 여러 편의 소설과 논픽션, 희곡, 시나리오를 썼다. 국내에는 지금은 절판된, 남편의 죽음 이후를 다룬 『상실』The Year Of Magical Thinking, 그리고 딸의 죽음을 둘러싼 자전적 에세이 『푸른 밤』이 소개되어 상실과 애도의 작가로 알려져 있지만, 영미권의 ‘디디온 르네상스’는 “원조 쿨 걸”이자 “영원한 쿨 걸”의 이미지에 기인한다. 1960년대와 70년대에 찍힌 사진(줄리언 와서Julian Wasser가 촬영한 사진들이 유명하다) 속 수려한 스타일과 무심한 듯 꿰뚫어보는 표정, “명민하고 창의적이고 모호하게 반항적인” 아우라가 디디온을 이룬다. 리지 굿맨이 《엘르》에 쓴 글에 따르면, 디디온은 “캘리포니아의 우울한 여자애들에 관한 쿨한 소설을 쓰는, 마찬가지로 우울한 새크라멘토의 소녀이자 버클리 대학교를 졸업하고 미국 정치를 날카롭게 비판하는 지식인”, “셀러브리티 문화의 기민한 비평가이자 스타들의 친구”, “깊숙한 개인적 고백을 쓰는 에세이스트이자 냉철한 기자”, “보헤미안”, “WASP”, “노련한 뉴요커이자 노련한 캘리포니아인”, “진보이고 보수”, “패션 아이콘”, “문학 아이콘”, “페미니스트 아이콘”, “궁극의 인사이더이자 궁극의 아웃사이더”이다.

이처럼 복합적이며 “기묘하게 이질적인 요소들의 공존에 기대어 구축”(「옮긴이 해제」)된 디디온이라는 아이콘, 시대를 앞선 스타일로 열풍을 일으킨 디디온의 세계에 근접하기 위해서는 초기 작품들이 중요하다. 1968년 출간되어 20세기 후반 미국 문학의 정전正展 반열에 오른『베들레헴을 향해 웅크리다』는 디디온 스타일의 시발점이다. 이 책은 디디온이 1960년대에 취재한 기사와 에세이를 엮은 첫 논픽션으로, 디디온 글쓰기의 원형과 정수를 만날 수 있다.

 

50년 만에 도착한 뉴저널리즘의 고전

미국의 적확한 초상, 퇴색되지 않은 현재성

 

『베들레헴을 향해 웅크리다』는 “지난 60년간을 통틀어 가장 독보적인 영향력을 행사한 에세이 선집”(《뉴요커》)이자 미국 뉴저널리즘의 고전으로 꼽힌다. 조앤 디디온은 톰 울프, 노먼 메일러와 더불어, 1960년대 새롭게 출현한 저널리즘의 흐름인 뉴저널리즘을 대표한다. 당시 잡지에 주로 실렸던 뉴저널리즘 기사들은 관습에 얽매이지 않는 문학적 스타일의 글쓰기와 주관적 관점을 특징으로 하며, ‘사실’을 넘어선 ‘진실’을 강조했다. 책 제목과 동명의 표제작이자 디디온에게 명성을 가져온「베들레헴을 향해 웅크리다」는 《새터데이 이브닝 포스트》에 실렸던 기사다. “글쓰기가 무의미한 행위고 내가 아는 세계는 이제 존재하지 않는다는 확신에 사로잡혀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10쪽)던 서른두 살의 디디온은 다시 일하기 위해 “무질서와 화해”해야 했고, 그래서 1967년 늦봄에 샌프란시스코에 갔다. 디디온은 헤이트 애시베리 지구에 머무르면서, ‘히피’라고 불리는 아이들을 만나고 그들과 함께 지내며 이 글을 썼다. 하지만 이 글은 하나의 이야기가 아니라 여러 장면들을 혼란스럽게 파편처럼 늘어놓는 구성을 통해, 그 형식 자체로 이곳에서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장소의 진실을 독자들에게 보여준다. 그동안 언론에 알려진 바와 달리, 샌프란시스코는 “사회적 출혈이 드러나고 있는 곳”(125쪽)이며, “안쓰러우리만큼 아무 대책도 없는 한 줌의 아이들이 사회적 진공 상태에서 공동체를 창조하려 애쓰는”(175쪽) 곳이라고 디디온은 쓴다.

이 책은 모두 3부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 글을 비롯해 1부에 실린 글들은 대부분, 반문화counterculture를 대표하는 인물과 현장들을 탐사하며 1960년대 혁명의 격변기를 거치는 미국을 가감 없이 기록해낸다. ‘히피’와 같은 사회 현상, 조앤 바에즈와 평화주의 운동, 민주주의연구소와 인문학, 마이클 라스키와 노동자국제서점에 이르기까지 디디온은 사람들을 “악인으로 몰지도 않고 화려하게 미화하지도 않”(댄 웨이크필드)으며, “특정한 시간과 공간의 디테일한 구체성을 차곡차곡 쌓아 올려”(「옮긴이 해제」) 미국의 적확한 초상을 그려낸다. 1부에 실린 다른 글들 또한, 캘리포니아를 중심으로 “황금의 땅”의 “황금빛 꿈”, 즉 1960년대 미국의 삶과 아메리칸드림을 둘러싼 미국의 정신을 묘파한다. 디디온은 배우 존 웨인에게서 “다른 세계”에 대한 열망을, 괴짜 백만장자 하워드 휴스에게서는 ‘자유’를 향한 욕망을 본다. 또한 남편을 살해한 가정주부와 라스베이거스에서 결혼하는 어린 커플들에게서는 ‘결혼’과 ‘스위트홈’이라는 환상과 그 배반을 본다.

“마음의 일곱 장소”를 이야기하는 3부는 물론, “개인적인 글들”이라는 제목이 붙은 2부 또한 미국, 특히 캘리포니아의 삶을 구성하는 것들에 관한 질문을 피하지 않는다. 자존감이나 도덕성에 관한 글, 가족이나 샌타애나 바람에 관한 글에서조차 캘리포니아의 과거, 아니 미국의 역사가 뚜렷한 흔적을 남긴다. 디디온은 고향인 새크라멘토에서 “우리가 늙어가면서 잃어버리는 것들, 우리가 깨뜨리는 약속들”을, 휴가를 떠난 하와이에서는 전쟁의 상흔을 품은 자본주의의 관광지의 모습을 본다. 아주 사적으로 보이는 이야기나 손에 잡히는 일상적인 이야기를 하면서도 디디온은 세상에 대한 더 큰 그림을 그린다. 또한 디디온이 포착한 “원자화의 증거, 만물이 해체되는 물증”(10쪽)은 당대의 기록을 넘어 현재에도 유효하다. 1960년대는 전세계적으로 여전히 지속되는, 현대인의 삶의 원형이 형성된 시기로서, 인물과 사건과 장소들, 자신의 내면을 가로지르며 우리 삶의 ‘중심부’에 다가가는『베들레헴을 향해 웅크리다』에서 독자들은 기묘한 기시감, 즉 결코 퇴색되지 않은 현재성과 전혀 낡지 않은 통찰을 만날 수 있다.

 

여성의 글쓰기를 확장하는

‘터프’하고 ‘샤프’한 디디온의 에세이

 

2010년대 이후, 국내에서 에세이 장르 및 여성의 글쓰기에 대한 관심이 높아져가는 가운데, 20세기 미국 문화사에서 중요한 여성 저자들에 관한 책 두 권이 최근 출간되었다. 여성의 글쓰기를 공감, 감상주의, 온정주의와 연결 짓는 관습으로부터 해방시킨 ‘터프’한 여성들에 관한 사상비평서 『터프 이너프』Tough Enough(2019), 신랄하고 예리한 글을 썼던 20세기 뉴욕의 ‘샤프’한 여성 작가들에 대한 기록 『날카롭게 살겠다, 내 글이 곧 내 이름이 될 때까지』Sharp(2020)가 바로 그것이다. 조앤 디디온은 한나 아렌트, 메리 매카시, 수전 손택과 함께 두 책에 모두 이름을 올렸다. 자기가 본 것과 자신이 느낀 것들을 속이지 않으려는 냉정하고 강인한 삶의 태도, 그리고 그렇게 뾰족한 필치로 써 내려간 글들이 『베들레헴을 향해 웅크리다』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마거릿 애트우트, 수전 손택, 패티 스미스, 토니 모리슨 등 수많은 여성 작가들의 작품(그리고 『터프 이너프』)을 우리말로 옮긴 김선형 번역가가 이 책의 섬세한 문장, 특유의 리듬감과 호흡을 노련하게 살려냈다. 특수한 시대성과 지역성이 담긴 인물과 사건들에 대한 꼼꼼한 주석과 「옮긴이 해제」 또한 이 책의 이해를 돕는다.

“혼돈의 무의미에 맞서는 글쓰기의 힘”이라는 제목이 붙은 「옮긴이 해제」는 디디온에게 평생 동안 내면과 세계의 문제와 “맞서 싸울 수 있는 유일한 무기”가 “말이 되는 적절한 어휘들을 찾아내는”(『푸른 밤』) 글쓰기였다는 점을 강조한다. “삶을 설명할 수 있는 어휘와 맥락”을 찾기 위한 다각도의 노력이 첫 논픽션인 『베들레헴을 향해 웅크리다』에 이미 선명하게 각인되어 있다는 것이다. 옮긴이에 따르면, 패션 잡지를 위한 소품 「자존감에 관하여」는 “거창한 사회 현상이 아니라 일상의 마음가짐을 다룰 때조차 작가로서 디디온이 얼마나 용감하게 정직한지를 훌륭하게 보여”주는 사례다. “이 불타협의 정직성이 구체적인 현실을 언어로 포착하는 비범한 능력과 결합해 혼돈의 세계상을 서사적으로 파악하고 지적으로 질서를 부여하고자 하는 강력한 사명으로 변한다.” 따라서 “미국에 팽배한 반지성주의, 즉 적절한 어휘를 찾아낼 능력의 부재”는 “이 책에 실린 다양한 글들을 하나로 묶는 중요한 문제의식”이다. 디디온은 “미국 사회에서 의미 있는 방향을 지시할 “어휘”를 내려주는 데 실패했기 때문에, 그리하여 한 세대가 “독자적으로 사유하는 능력”을 잃었기 때문에, 그들은 다 같이 길을 잃었다고 진단한다.” 하지만 이러한 현실 인식을 넘어, “사회적 혼돈과 무질서, 서사적 일관성으로 정리되지 않는 무의미와 평생 싸우며” “자아를 해체하는 ‘그런’ 슬픔 앞에서 ‘그런’ 공포를 마주하면서도, 여전히 있는 그대로, 여전히 용감하게, 글로 포착하려는 노력을 놓지 않는 지성인의 투지”가 ‘디디온’과 그의 글쓰기를 규정한다고, 옮긴이는 썼다. 독자들은 그 단단한 스타일과 날카로운 지성의 가장 알아보기 쉬운 원형을 이 책 『베들레헴을 향해 웅크리다』에서 만날 수 있다.

2010년대를 지나며 우리는 ‘에세이’의 호황 덕분에 누구나 작가가 될 수 있는 시대를 살고 있다. 굳이 직업적인 작가가 아니더라도 일기 또는 SNS에 끊임없이 무언가를 쓰고, 자기고백과 자기노출이 일상이 된 시대를 살아간다. 이때, 독자들은 “나 자신으로 존재하는 게 어떠했는지 기억하라”(193쪽)가 언제나 자신의 글쓰기에서 핵심이었다는 디디온의 경구로부터, 그리고 자기 내면에 관한 토로, 타인과 장소에 관한 개인적이면서 역사적인 기록, 사회적 사건과 현상을 취재해 쓴 사회비평을 모두 ‘에세이’에 포함시킨 디디온의 작업으로부터 에세이의 외연을 확대하는 풍부한 영감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특히, 여성적이라고 간주된 기존의 글쓰기를 벗어나 자기다운 스타일과 태도를 밀어붙이며 여성의 글쓰기를 확장해온 디디온의 작업은, 자기 글쓰기를 하려는/하고 있는 여성들에게 굉장한 활력과 자극을 줄 것이다.『베들레헴을 향해 웅크리다』를 읽는 것은 우리가 왜 쓰는지에 대해 가장 근본적인 지점을 다시 생각하도록 하는 소중한 경험이 될 것이다.

 

‖ 책 속에서 

 

나는 다른 사람을 인터뷰하는 데 소질이 없다. 타인의 홍보 담당자와 얘기해야 하는 상황을 피한다. (그래서 대다수 배우들에 대한 글 청탁이 미리 걸러지는데, 그것만도 보너스다.) 전화를 거는 것도 좋아하지 않고 아침에 어딘가의 베스트웨스턴 모텔 침대에 앉아서 검사보에게 어떻게든 연락을 해보려 애쓰던 나날을 헤아리고 싶지도 않다. 기자로서 내 유일한 이점은 체구가 너무 작고 기질적으로 눈에 잘 띄지 않고 신경이 너무 약해 말도 잘하지 못하기 때문에 상대가 내 존재를 잊고 자신의 이득에 반하는 행동을 하기 쉽다는 것뿐이다. 그것이 기억해야 할 마지막 한 가지다. 글 쓰는 사람들은 언제나 누군가를 팔아넘기고 있다는 것_「서문」 13쪽.

 

설마 타이프라이터가 근처에 없을 때도 정말 이런 말투를 쓸 리야 없겠지만, 미스 바에즈는, 아마도 무의식적으로, 아무리 진부하고 피상적이라 해도 그녀 자신이나 다른 누군가의 청소년기가 갖는 무구함과 격동과 외경의 능력을 잃지 않으려 애쓴다. 이 개방성, 여린 면모를 그대로 드러내는 무방비성은 그녀가 어리고 외롭고 표현 능력이 없는 모든 이들에게 ‘가닿을 수 있는’ 이유다. 이 세상에 아름다움과 상처와 사랑과 형제애를 이해할 사람은 그녀 말고 아무도 없다고 믿는 사람들 말이다. 아마도 이제는 나이가 들었기 때문이겠지만, 미스 바에즈는 자신이 무수한 추종자들에게 아름답고 진실된 모든 것을 표상한다는 사실에 간혹 심란해질 때가 있다. _「키스가 끊이지 않는 곳」 89쪽.

 

사실 나는 이 세상의 마이클 라스키들과 함께 있으면 편안하다. 안쪽이 아니라 바깥쪽에 사는 사람들, 두려움의 감각이 너무나 날카로워 극단과 실패가 예정된 헌신에 경도되는 사람들. 나 역시 두려움이라면 제법 아는 사람이거니와, 어떤 사람들이 공허를 채우기 위해 애써 만들어내는 정교한 체제들의 가치를 안다. 알코올이나 헤로인이나 색정처럼 접근성이 좋은 것이든 신이나 역사에 대한 믿음처럼 얻기 힘든 것이든 그런 사람들의 아편이 얼마나 값진지 안다. _「미국 공산당 중앙위원회(마르크스-레닌주의 노선) 소속의 라스키 동지」 95쪽.

 

물론 활동가들—사고가 경직된 사람들 말고 창의적이고 무정부주의적으로 혁명에 접근하는 이들—은 언론이 놓치는 진실을 이미 오래전에 포착했다. 우리는 뭔가 중요한 것을 보고 있었다. 안쓰러우리만큼 아무 대책도 없는 한 줌의 아이들이 사회적 진공 상태에서 공동체를 창조하려 애쓰는 모습을 보고 있었다. 이 아이들을 본 이상, 그 진공 상태를 더는 간과할 수 없었다. 원자처럼 쪼개지는 사회를 복구할 수 있다고 더는 믿을 수 없었다. 이건 전통적인 세대 반항이 아니었다. 1945년에서 1967년 사이의 어느 시점에서 우리는 이 아이들에게 우리가 하는 게임의 법칙을 말해주는 일을 게을리했다. 어쩌면 우리 자신도 그 법칙을 믿지 않게 되었을지도 모른다. 이야기를 들려줄 사람의 수가 너무 적었을 수도 있다. 이 아이들은 사회의 가치를 전통적으로 제시하고 강화하는 사촌과 대고모와 주치의와 평생 함께 하는 이웃의 그물망에서 잘려 단절된 채 성장했다. 이 아이들은 새너제이로, 출라비스타로, 여기로, 아주 많이 이사를 다녔다. 사회에 반항한다기보다는 사회를 아예 모른다. 그저 이 사회에서 가장 널리 홍보된 내재적 의혹에 피드백을 할 줄만 안다. 베트남비닐 랩다이어트 알약원폭_「베들레헴을 향해 웅크리다」 175~176쪽.

 

아이들은 정확히 주어진 대로 피드백을 한다. 단어를 믿지 않기 때문에—체스터 앤더슨은 단어란 “먹물”용이라고 아이들에게 말한다. 단어가 필요한 생각은 역시 잘난 척에 불과하다고—이 아이들이 유창하게 구사하는 유일한 어휘는 이 사회의 진부한 표현들이다. 사실 나는 독자적으로 사유하는 능력은 언어의 통달에 달려 있다는 생각을 아직도 몸 바쳐 믿고 있기에, 어머니와 아버지가 함께 살지 않는다는 말을 할 때 “결손가정” 출신이라는 표현에 만족하는 아이들의 미래를 낙관하지 않는다. 아이들은 열여섯, 열다섯, 열네 살이다. 나이는 항상 어려진다. 거대한 청소년 군단이 명령 대신 단어가 떨어지기를 기다리고 있다. _「베들레헴을 향해 웅크리다」 176~177쪽.

 

내가 처음 쓴 노트는 ‘빅파이브’ 태블릿 노트였다. 그만 징징거리고 생각나는 대로 쓰면서 혼자 노는 법을 배우라는 분별 있는 조언과 함께 어머니가 준 것이다. 어머니는 몇 년 전 그 노트를 내게 돌려주었다. 첫 글은, 자기가 남극해에서 얼어 죽고 있다고 믿었는데, 해 뜰 무렵에 사실은 사하라 사막에 떨어졌고 점심시간이 되기도 전에 열기로 죽을 운명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여자 이야기였다. 대체 무슨 일이 계기가 되어 다섯 살짜리 아이가 그토록 지독하게 ‘아이러니’하고 이국적인 이야기를 상상했는지는 모르지만, 내가 어른이 될 때까지 집요하게 따라다닌 극단적인 취향을 잘 보여주기는 한다. _「노트 쓰기」 189~190쪽.

 

기억이 모두 되살아난다. 그런 기분의 자신을 되살리는 일의 가치를 이해하기 힘들 수도 있지만 나는 똑똑히 알겠다. 과거의 우리 자신이 매력적이든 아니든 가끔 인사라도 나누는 사이로 지내는 편이 현명하다는 생각이 든다. 안 그러면 예고도 없이 들이닥쳐 우리를 놀라게 할 테니까. 괴로운 밤 새벽 4시에 마음의 문을 쾅쾅 두드리며 누가 그들을 저버리고 배반했는지 따지고 보상을 요구할 테니까. 우리는 영원히 잊을 수 없다고 생각했던 것들을 너무 빨리 잊어버린다. 우리는 사랑과 배반을 똑같이 잊고 속삭였거나 외쳤던 말을 잊고 우리가 누구였는지를 잊는다. 나는 이미 과거의 나 자신 한두 명과 연락이 끊어졌다. 그중 열일곱 살배기는 별로 위협적이지 않지만, (…) 스물세 살의 나는 훨씬 더 마음에 걸린다. 언제나 굉장히 골칫덩어리였던 그 여자는, 전혀 보고 싶지 않을 때 불쑥 다시 나타날 거라는 예감이 든다. 너무 긴 치마를 입고 공격적일 정도로 수줍고 언제나 피해의식에 젖어 있고 원망과 작은 상처와 다시 듣고 싶지 않은 이야기들로 가득 찼던 그 여자는 취약하고 무지해서 나를 슬프게 만들고 동시에 화나게 만들고, 오래 추방당해 있었던 만큼 훨씬 더 끈질기게 유령이 되어 쫓아다닐 것이다. _「노트 쓰기」 197~198쪽.

 

자존감이 있는 사람들은 일정한 터프함, 소정의 윤리적 배짱을 보여준다. 과거에 ‘한 성격character 한다’고 말해진 어떤 자질을 갖고 있다. 추상적으로는 인정받아도 간혹 더 즉각적이고 타협의 여지가 있는 미덕 앞에 맥을 못 추고 밀려나곤 하는 자질이다. (…) ‘성격’—자기 삶에 대단한 책임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태도—은 자존감이 샘솟는 원천이다. _「자존감에 관하여」 205쪽.

 

베벌리힐스의 라스칼라나 샌프란시스코의 어니스 같은 곳의 바에 앉아 있다 보면, 캘리포니아가 비행기를 타면 뉴욕에서 다섯 시간밖에 걸리지 않는 곳이라는 팽배한 망상에 쉽게 동참할 수 있다. 진실은 뉴욕에서 비행기로 다섯 시간 걸리는 곳은 라스칼라와 어니스라는 것이다. 캘리포니아는 다른 곳에 있다.

동부의 많은 사람들(라스칼라나 어니스에서는 안 쓰는 말이지만, 캘리포니아 사람들의 표현대로 하면 “저 후미진 동쪽” 사람들)은 이를 믿지 않는다. 로스앤젤레스나 샌프란시스코에 가봤고, 거대한 삼나무 숲 사이로 드라이브도 해봤고 빅서에서 오후 햇살에 빛나는 태평양도 봤기에, 자연스럽게 실제 캘리포니아에 가봤다고 믿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캘리포니아에는 가본 적이 없으며 앞으로도 가지 못할 공산이 높다. 원하는 정도보다 훨씬 더 오래 걸리고 어려운 여행일 것이기 때문이다. 목적지가 지평선에서 신기루처럼 어른거리고 심지어 점점 더 멀어져서 영원히 작아지는 그런 여행 말이다. 내가 이 여행에 대해 좀 아는 게 있는 이유는 캘리포니아 출신이고, 태초부터 새크라멘토 밸리에 자리 잡은 가족, 아니 가족‘들’의 군집으로부터 왔기 때문이다. _「캘리포니아의 딸이 쓰는 단상」 239~240쪽.

 

처음 로스앤젤레스에 와서 외딴 해변에 살던 때 들은 이야기가 있다. 나쁜 바람이 불면 인디언들이 바다에 몸을 던진다는 얘기였다. 이유는 짐작할 수 있었다. 샌타애나가 부는 시기에 태평양은 불길하게 번들거리고, 밤에는 올리브 나무 사이에서 비명을 지르는 공작들뿐 아니라 파도조차 없는 섬뜩함 때문에 잠을 설친다. 열기는 초자연적이었다. 하늘에는 누런빛이 감돌았다. 가끔 ‘지진 날씨’라고 불리는 그런 빛이었다. 하나밖에 없는 내 이웃은 며칠 동안 집 밖 출입을 하지 않고 밤에 불도 켜지 않았으며, 그이의 남편은 손도끼를 들고 주변을 배회했다. 어느 날 그는 내게 침입자 소리를 들었다고 했고, 다음 날은 방울뱀 소리가 들렸다고 했다. _「로스앤젤레스 노트」 301쪽.

 

처음 뉴욕을 보았을 때 나는 스무 살이었다. 여름철이었고, DC–7 여객기에서 내려 낡은 아이들와일드 임시 터미널로 들어섰다. 새크라멘토에서는 내가 입은 원피스가 굉장히 세련되게 느껴졌지만 벌써부터, 심지어 낡은 아이들와일드 터미널에서도, 덜 세련되다는 느낌이 들었다. 따뜻한 공기에서는 곰팡이 냄새가 났고, 뉴욕과 관련해 내가 본 모든 영화와 내가 들은 모든 노래와 내가 읽은 모든 이야기로 프로그래밍되어 있던 어떤 육감이 앞으로는 모든 게 딴판으로 달라질 거라고 내게 말해주었다. 실제로 그랬다. 그로부터 얼마 후 어퍼 이스트 사이드의 모든 주크박스에서는 같은 노래가 흘러나왔는데 그 노래의 가사는 “하지만 예전의 나였던 여학생은 어디로 갔을까”였고, 충분히 늦은 밤이 되면 나도 같은 의문을 품곤 했다. 이제는 무슨 일에 종사하든 거의 모든 사람이 시차는 있더라도 결국 같은 의문을 품게 된다는 걸 알지만, 스무 살과 스물한 살과 스물두 살의 좋고도 나쁜 축복 중에는 모든 물적 증거가 반대 방향을 가리키는데도 불구하고 이런 일을 겪은 사람은 자기 말고 아무도 없을 거라는 확신이 있다. _「그 모든 것들에 안녕」 312쪽.

 

작가로서, 또 셀럽으로서 디디온의 명성 또한 늘 이처럼 기묘하게 이질적인 요소들의 공존에 기대어 구축되었다. 패셔너블한 부잣집 아가씨의 이미지와, 거친 갈등과 참혹한 고통의 현장을 누비는 노련한 기자의 커리어. 수줍고 상처받기 쉬운 소녀 같은 여린 페르소나와 무정하리만큼 써늘하고 예리한 문체. 군더더기라고는 없는 간결한 문장과 서슴없이 정곡을 찌르는 킬러 본능, 그러나 단단한 표면 아래 흐르는 억눌린 애상. 객관적 묘사를 표방한 외연과 충돌하는, 냉소와 불안으로 점철된 주관성. 우아함, 세련됨, 뉘앙스, 아이러니, 그리고 이른바 “과거에 ‘한 성격 한다’고 말해진 어떤 자질.” 이 모든 것들이 어우러져 대체 불가능한 브랜드, 작가와 예술가들이 선망하는 작가, 문체와 분위기와 작가관을 아우르는 의미에서 이른바 ‘스타일’의 창시자, 마치 소설처럼 읽히는 뉴저널리즘의 기수로서 영어권 저널리즘의 트렌드를 영원히 변화시킨 ‘조앤 디디온’을 이룬다. _「옮긴이 해제」 332~333쪽.

차례

서문

 

1부 황금의 땅 라이프스타일

황금빛 꿈을 꾸는 사람들 _어느 살인에 대하여

존 웨인: 어떤 사랑 노래 _그 남자를 기억하는 수많은 방법

키스가 끊이지 않는 곳 _조앤 바에즈와 수정 눈물의 감성

미국 공산당 중앙위원회(마르크스-레닌주의 노선) 소속의 라스키 동지 _바깥쪽에 사는 사람들

로메인 스트리트 7000번지, 로스앤젤레스 38 _하워드 휴스와 미국의 은밀한 꿈

캘리포니아 드리밍 _자본주의 사회에서 인문학이 생존하는 법

결혼이라는 부조리극 _라스베이거스 웨딩의 낭만에 대하여

베들레헴을 향해 웅크리다 _히피라 불리는 미아들의 네버랜드

 

2부 개인적인 글들

노트 쓰기 _과거의 나와 화해할 이유

자존감에 관하여 _내 삶을 내가 책임진다는 것

마음속에서 그 괴물을 떨칠 수가 없어 _파괴자 할리우드의 신화

도덕성에 관하여 _사막의 윤리

귀향 _‘집’이라는 짐

 

3부 마음의 일곱 장소

캘리포니아의 딸이 쓰는 단상 _새크라멘토

낙원에서 보낸 편지, 21°19′ N., 157° 52′ W. _하와이

태고의 바위 _앨커트래즈

절망의 해안 _뉴포트 벨뷰 애비뉴

소노라주 과이마스 _멕시코

로스앤젤레스 노트 _로스앤젤레스

그 모든 것들에 안녕 _뉴욕

 

감사의 말

옮긴이 해제 혼돈의 무의미에 맞서는 글쓰기의 힘

지은이·옮긴이

조앤 디디온 지음

1934년 미국 캘리포니아 새크라멘토에서 태어났다. 다섯 살부터 글을 쓰기 시작했으며, 버클리 대학교 영문과 재학 중 패션잡지 《보그》가 후원한 에세이 공모전 우승을 계기로 뉴욕에서 《보그》 에디터로 일했다. 작가 존 그레고리 던과 결혼한 후 캘리포니아로 돌아와, 여러 편의 소설과 논픽션, 시나리오를 썼다.

2005년 『마술적 사유의 한 해』(The Year of Magical Thinking)로 논픽션 부문 전미도서상을, 2012년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으로부터 내셔널 휴머니티스 메달을 받았다. 2015년 패션 브랜드 셀린의 광고 모델이 되었고, 2017년에는 디디온에 관한 넷플릭스 다큐멘터리 <조앤 디디온의 초상>이 제작되었다.

미국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에세이스트이자 저널리스트, 소설가, 정치·문화 비평가, 스타일 아이콘으로, 특히 몇 세대에 걸쳐 젊은 여성들에게 전폭적 지지를 받고 있다. 1968년에 출간된 첫 논픽션 『베들레헴을 향해 웅크리다』는 소설처럼 읽히는 뉴저널리즘을 대표하는 작품으로, 20세기 후반 미국 문학의 ‘정전’正典으로 꼽힌다.

디디온은 현재 뉴욕에 살고 있다.

김선형 옮김

서울대학교 영어영문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세종대학교 초빙 교수를 지냈고 2010년 유영번역상을 받았다. 옮긴 책으로 『시녀 이야기』『실비아 플라스의 일기』『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다시 태어나다』『수전 손택의 말』『몰입』『가재가 노래하는 곳』『터프 이너프』『증언들』『솔로몬의 노래』『달에서의 하룻밤』 등이 있다.

편집자 100자평
넷플릭스 다큐멘터리 <조앤 디디온의 초상>의 주인공, 미국 에세이의 살아 있는 전설, 강인한 스타일과 날카로운 지성의 작가 조앤 디디온의 대표 에세이집! 그레타 거윅, 킴 고든, 세인트 빈센트, 피비 브리저스, 캐리 브라운스틴 등 세상 멋진 언니들이 사랑하는 "원조 쿨 걸"의 진면목을, 김선형 선생님의 아름다운 번역으로 만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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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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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인간은 멈추지 않는다
by이운Jul 24. 2023
https://brunch.co.kr/@justsimplyiun/21

내가 참여하고 있는 독서모임에서는 한 사람당 책 2권을 고르면 한 달에 한 권씩 읽고 발표하고 토론한다. 이번 달의 책은 내가 고른 서머싯 몸의 <케이크와 맥주>다. 당연히 발표는 내가 맡았다. 그런데 거기서 미처 다 얘기하지 못한 부분이 있다.

책에 묘사된 문단이 스타 작가를 만드는 과정은 대략 이러하다. 우선 한 사람을 콕 집어 저 높이까지 띄워놓고 거기서 발생하는 관심과 이익을 나눠 먹은 다음, 희소성과 상품 가치가 떨어지면 같은 자리에 올려놓을 다른 작가를 찾아 나선다. 각종 파티에 출석하고 문학계 인사들과 어울리며 우승마에 베팅하는 바턴 트래퍼드 부인은 그야말로 작가 사냥꾼이다. 거장 후보에 오를 작가 목록의 잉크가 가만히 마르게 두지 않는 사람이다. 그녀의 손에 의해 유명 작가로 거듭난 에드워드 드리필드는 어떤 남자로 바닥을 닦고 그를 계단 위로 질질, 아래로 질질, 그다음엔 여기저기로 끌고 다니는 가사의 곡을 자주 불렀다. 문단, 혹은 그 업계의 설계자에게 작가는 맛 좋은 고기다. 물렁한 비곗덩어리가 불티나게 팔리고 나면, 단단해서 씹어먹을 수 없는 뼈는 철저히 외면받고 버려진다. 이것이 과연 작가 개인이 살아남고 싶다고 해서 살아남을 수 있는 구조일까?

몸은 실존 인물들을 연상하게 하는 이야기들로 문단의 내막을 폭로했고, 책은 출간되자마자 파장을 일으켰다. 작품 속에서 에드워드 드리필드의 전기를 집필하기로 한 작가 앨로이 키어는 묘사에 따르면 진실한 이야기보다 재밌는 이야기, 그래서 자신이 성공할 수 있는 이야기를 쓰려고 한다. 하지만 이런 적나라한 평가로도 몸의 ‘문단 흠집 내기 작전’은 실패했다. 앨로이 키어의 실제 모델인 휴 월폴은 책의 출간을 막으려 했을 만큼 자신을 겨냥한 공격이었음을 알아챘지만, 그 외에는 별다른 타격 없이 출간 7년 후에 기사 작위를 받았다. 문학계의 폐해는 지금도 공감할 수 있는 부분이 있는 걸 보면 그다지 개선되지 않았다. 판을 뒤집는 작품들이 등장할 때의 충격과 떠들썩함에 커튼 뒤의 잡음이 가려졌을 뿐이다. 세상의 부조리는 여전히 그대로고, 몸은 20년 지기 친구를 잃으면서 인간관계를 망친 것으로 끝이 났다.

<케이크와 맥주>는 작가가 직접 못다 한 이야기가 많았다고 언급한 <인간의 굴레에서>의 연장선과 같은 작품이다. 전작에서 문학을 좋아했지만 작가는 아니었던 필립 캐리는 <케이크와 맥주>에서 이미 50대의 원숙기 작가인 윌리엄 어셴든으로 변신한다. 직업인으로서의 서머싯 몸은 후자에서 더 가깝고 생생하게 만날 수 있다. 그래서 작품 밖의 상황까지 함께 본다면 이 작품은 내면세계를 탐구했던 <인간의 굴레에서> 못지않게 사적이고 내면적인 이야기다. 유미주의를 거부하고 사실주의를 쫓는 그의 취향과 에드워드 드리필드로 치환되는 토마스 하디에 대한 평가, 자신의 전기가 쓰이지 않기를 바라 서류와 편지를 불태웠던 일화 등 작품을 둘러싼 뒷이야기들이 몸 개인의 세계관을 드러낸다.

하지만 문단에 대한 비판은 쾌락과 유희를 예찬하기 위한 근거로 사용되는 표면적인 이야기에 지나지 않는다. 몸이 우리에게 케이크와 맥주를 대접해줬지만, 단순히 먹고 마시고 취할 일만은 아니다. 오늘 우리가 실컷 먹고 마시고 잠든 뒤 내일 아침에 일어나면 그때 전날의 케이크와 맥주가 어떤 의미로 남아 있는지 곱씹어야 한다. 그게 문학의 확장이다. 나는 주인공인 어셴든이 아주 열렬히 사랑했던 로지에 대한 찬미가 모두 지나간 다음, 즉 마지막 장까지 읽고 책을 덮은 뒤에 곱씹어본 결과, 몸은 케이크와 맥주가 선사하는 순수한 쾌락과 유희를 강조하고자 했지만 드러난 진실은 그것에 관한 것이 아니라고 믿게 되었다.

영어 관용구에서 ‘좋은 것’을 의미하고 작품 내에서는 쾌락과 유희를 의미하는 케이크와 맥주, 그리고 그것의 의인화인 로지 드리필드의 이야기에서 한 겹 벗겨보면, 문단을 비판하고 위대한 작가의 조건을 읊는 화자가 보인다. 거기서 멈추지 않고 케이크의 생크림과 맥주의 거품을 끈질기게 걷어내면 자신의 주변 인물들에게 잔인한 서머싯 몸의 모습이 보인다. 그 모습은 “글 쓰는 사람들은 언제나 누군가를 팔아넘기고 있다”고 말했던 조앤 디디온의 말을 증명하기에 최적이다. 그런데 오히려 내용이 충격적일수록 작가에게 관심이 쏠린다. 실제 모델로 지목되어 모욕감을 느낀 사람이 작가에게 행하는 압력과 그에 대한 이차적 반응이 궁금해진다. 종이 위에 남아 있는 글자는 더 이상 없지만 이야기는 아직 끝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 구경거리를 놓치기 싫은 본능적인 욕망이 나를 지배하고 있다. 내가 이 책을 독서모임에서 읽자고 제안한 이유도 거기 있다.

몸은 전기를 쓸 때 의도적인 편집을 거치며 맹점을 만들어낸다는 사실을 간접적으로 언급했다. 그런데 그의 뜻과는 다르게 오히려 몸의 전기를 써서 더 큰 모순을 생산하고 싶은 이상한 충동이 든다. 죽어서 더 이상 작품을 만들지 못하는 화가의 가치가 더욱 상승하듯이, 작가의 죽음은 도구화되고 상업화된다. 사실은 문단을 넘어선 자본주의가 창작자라는 맛 좋은 고기를 더 많이, 더 자주 게걸스럽게 먹어치우는 것 아닐까?

몸은 전기 집필에 대한 의견을 도마 위에 올려놓은 순간 자신도 제물이 될 것이라는 걸 이미 알았던 것 같다. 자신이 죽고 나면 자신을 잘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 의해 사생활이 파헤쳐지고 함부로 평가당할 것을 두려워하여 자신이 남긴 기록과 편지들을 불태웠다. 그런 위험을 알고 있었음에도 그가 이 주제를 택한 이유는 스스로 그런 불상사를 통제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이 게임은 죽는 순간 불리해진다. 몸이 91세까지 살다가 세상을 떠났다 해도 절대 승리할 수 없다. 이 지점에서 우리의 유한함이 참 안타깝다.

작가의 자기변명은 통하지 않는다. 시대와 상황에 따라 변하는 해석도 통제할 수 없다. 글은 공개되는 순간부터 공공재가 된다. 따라서 손에서 완전히 떠나보낼 각오를 해야 한다. 완벽하게 이해받고 싶다는 건 달성할 수 없는 목표다. 이러한 한계 앞에서 전기가 작가에 대해 올바르고 정확한 해석이라는 목표를 달성하려면 주기적으로 새롭게 해석하는 수밖에 없다. 일정한 시간에 따라 변하는 가치와 의미들을 같은 대상에 매번 새롭게 적용하는 수밖에 없다. 물론 그렇게 되려면 그만큼의 꾸준한 관심과 정성을 필요로 할 만큼 충분히 사랑받는 작가여야 한다. 그런데 누구에게 그런 영광이 주어질까? 바람직한 작가의 모습이란 건 실체가 없다.

휘황찬란한 플롯 사이에 숨겨진 이야기는 작가의 삶이다. 작가의 삶은 이 작품에 의하면 대략 세 가지 유형으로 나뉜다. 죽은 작가인 에드워드 드리필드와 출세욕이 강한 작가인 앨로이 키어, 그리고 원숙기 작가인 윌리엄 어셴든이다. 죽은 작가는 자신에 대한 평가에 권한을 행사할 수 없고, 출세욕이 강한 작가에게 성공은 있지만 명예는 없다. 그는 죽음으로써 명성이 사그라든다. 마지막으로 원숙기 작가는 이제야 문학계를 돌아볼 여유를 가지고, 죽음에 대한 고민을 시작할 것이다. 이들은 서로 교집합이 없는 것처럼 살아간다. 하지만 죽어서 가치가 상승하든 매력이 떨어지든, 우리의 불멸의 관심사는 ‘사람’이라는 점에서 모두 같은 생태계 안에 있는 셈이다.

전기는 각자 나름대로의 해석을 담고 있다. 다른 사람의 시선을 바탕으로 하고, 작가가 스스로 자기 삶에 대해 어떤 말을 하는지는 담겨 있지 않다. 실제 모습을 똑같이 그린 초상화보다는 생전의 업적과 명성이 덧씌워진 일종의 상상화가 된다. 그래서 전기는 기본적으로 기만이다. 하지만 인간은 집필을 멈추지 않는다. 아무리 감춰도 다 들키는 경우가 있는가 하면 아무리 보여줘도 알 수 없는 것들도 있는 법인데, 그럼에도 우리는 그것이 기만이든 모순이든 거짓이든 상관없이 여전히 알고 싶은 게 너무 많다. 그렇다고 거기에 큰 의미를 둘 필요는 없다. 인물과 직접 만나지 않은 채 전기를 읽을 때 가장 큰 목적은 단순히 시간과 체력을 아끼는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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