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day, November 6, 2023

방인숙 - 우리 가족의 지구촌 생활 이야기 < I love Paul >

방인숙 - 우리 가족의 지구촌 생활 이야기 < I love Paul >




우리 가족의 지구촌 생활 이야기 < I love Paul >

웹관리자 2023.06.15  조회 수 : 17


우리 가족의 지구촌 생활 이야기 < I love Paul >



1983년 1월 3일, 남편이 호주의 PERTH 지사로 발령을 받아, 우리 가족이 고국을 떠났던 날이다. 이렇게 기약 없는 긴 이별이 될 줄은 꿈에도 모르고. 그때 딸애는 만 7살을 코앞에 두고 있었고, 아들애가 만 3년 7개월이었다.

PERTH는 아열대기후로 겨울이 없고, 계절도 한국과 정반대였다. 하얀 겨울에 떠난 우리가, 그곳에 발을 딛었을 땐, 한창 푸른 여름이었으니까. 여름방학이 끝나고 새 학기가 시작된 2월, 딸애를 입학시키러 갔다. 그 학교엔 한국 애는 물론이고 중국 애, 일본 애, 아니 아시안 애도 없단다. 활달하게 반장까지 하며 1학년을 거의 마치고온 딸애였다. 그랬건 만도, 갑자기 확 바뀐 환경과 낯선 얼굴들에 질려서, 바짝 얼어 있었다. 털보 교장선생님이 안내한 교실 앞에 가서도, 쪼뼛거리며 영 내손을 놓지 못했다. 합리적이고 융통성 있는 교육관을 접수한 선생님들은 역시 달랐다. 딸애의 주눅들은 표정을 감안한 교장과 담임의 권유로, 아들과 나도 얼결에 교실 뒷자리에가 앉았다. 졸지에 딸과 한 반 학생이 됐던 것이다. 내가 받았던 권위적인 한국의 교육방침으론 상상도 못할 배려라, 어리둥절하기도 했다.

한 40여명정도의 학생들이 앉아있는데, 앞쪽은 2학년들이고 뒤쪽은 1학년들이었다. 젊고 예쁜 여선생이, 중년의 푸근한 인상의 보조선생과 같이 두 반을 다 가르치고 있었다. 딸애는 영어가 뭔지도 모르는 탓에, 코흘리개 같은 일 학년 애들 틈에 끼어 앉았다. 한국과 비교해보니, 여기가 입학연령이 일러선지 산수진도는 1년이나 늦었다. 공부수준으로 따지면 딸애는 2년이나 퇴보한 격이었다. 타임머신을 타고 유치원시절로 되돌아간 셈이니 한심하기도 했다. 그래도 아는 것을 복습하는 격이라, 한마디 알아듣진 못해도, 눈치로 잘 따라할 수 있는 점을 다행히 여기기로 했다.

허지만 딱해 보이고 안쓰러웠다. 덩치가 큰 편이라 한껏 어리고 작아 보이는 애들 틈에서 혼자만 쑥 솟구쳐 보이기 때문이다. 여물은 얼굴이 색깔과 모습까지 튀다보니까 더했다. 딸애가 소인국을 방문한 갈리버 같다면 지나친 비약이겠지만, 순간적으로 퍼뜩 갈리버가 떠올려졌던 것은 사실이다. 내년에 영어를 잘하게 되고 성적이 좋으면, 3학년으로 월반시켜주기를 부탁했을 때, 쾌히 수락한 교장의 확약이 그나마 위안이었다.

신난 건 아들애였다. 사려 깊은 보조선생이, 누나가 하는 것처럼 그림에 색칠하고 색종이를 오리게 해줬으니까. 평범한 우리애가 천재나 누릴 수 있는 조기교육을 받는 거라 흐뭇했다. 눈치 없이 “누나!”하며 누나자리로 가고 해도, 미소로 다 수용해주는 선생님들의 넉넉함이 고맙고 존경심이 우러나왔다. 수업 중임에도 몇 번이나 나가서 물먹고 화장실에 갔다 오게 하는 열린 교육제도가, 마음에 쏙 들었다.

그렇게 같이 공부하던 일주일이 지나자, 딸애가 좀 창피한지 나가서 기다리란다. 복도에서 기다리다가 운동장으로 나갔다. 아들애는 놀이터에서 놀고 나는 나무 밑에서 책을 읽었다. 노는 시간만 되면, 철저히 외돌토리인 딸애는 나비처럼 팔랑거리고 뛰어나와 안도의 눈도장을 찍고는 했다. 2주가 지나니까 씩씩하게 집에 가서 기다리라고 해, 나와 아들애의 짧은 학교생활도 끝났다. 다른 부모들처럼 아침에 데려다주고 끝나면 데려오고 했다.

한 달 정도 됐을까? 비가 오는 날이었다. 딸애를 데려오려고 나서는데 집 앞에 웬 낯선 차가 섰다. 머리가 길고 매력적인 여자가 차에서 내리더니 딸애를 데리고 들어왔다. 비가 오는데 엄마를 기다린다고 해 데리고 왔다면서, 같은 반 2학년인 Paul의 엄마란다. 딸애는 비록 1학년일 망정, 자연스레 정신연령이 비슷한 제 또래 2학년들과 어울렸나보았다. 완전히 꾸어다 놓은 보릿자루였을 딸애에게, 고맙게도 폴이 다가가서 제일먼저 친구가 돼준 것이리라. 폴은 딸애보다 키가 작고 어려 보였지만 어찌나 귀엽고 맑게 생겼던지, 그때 막 나온 영화‘E T’ 에서 주인공인 엘리엇<Elliott>을 연기한 헨리 토머스<Henry Thomas>똑 닮았다. 그 후로 둘은 학교가 끝나면 우리 집 아니면 폴 집에 가 놀았다. 언어가 전연 안 통하는데도 마음이 맞아 잘 노는 것을 보면서, 동심의 세계는 신비롭고 아름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또 폴 엄마는 서양여자에 대한 내 선입관과 달리 소박하고 겸손하고 온유했다. 상대방을 보듬고 편안하게 해주는 스타일이었다. 이민족인 생면부지의 동양 여자애와 그 가족에게, 어떻게 아무런 편견과 거리감이 없이 먼저 호의를 베풀 수 있을까? 좀 의아스럽기도 했다. 그러다가 폴 엄마가 어릴 때, 외교관인 아버지를 따라 인도네시아에서 자랐다는 배경을 알고 나서는 납득이 됐다. 폴 네는 고급 멕시칸 식당을 경영하는 부자였고, 옆 동네에다 집을 좋게 짓는 중이었다.

나는 차도 없고 그곳 사정에 어두운 때라, 애들을 기껏 학교, 도서관, 슈퍼만 쳇바퀴 돌 듯 데리고 다녔다. 내대신 폴 엄마가 딸애를 온갖 곳을 다 데리고 다녔다. 마치 친딸처럼. 딸애는 폴 네 집에서 수영도하고 자고 오기도 했다. 나는 너무 고마워서 잡채, 빈대떡 같은 별식이나, 낚시로 잡은 생선을 깨끗이 손질해 갖다 주곤 했다. 우리도 어디를 가게 되면 가급적 폴도 데리고 가곤 했다.

몹시도 뜨겁던 어느 여름날이었다. 수은주가 40도 넘게 치솟아 차안에 둔 크레용이 팍팍 녹아 내렸던 날이었다. 아무리 볕이 따가워도 늘 습도가 없어 견딜 만 했는데, 그날은 어쩐 일로 습도마저 높았다. 밤이 돼도 달궈진 양철지붕의 집처럼 식지가 않아, 집안은 그야말로 찜통이었다. 진짜 숨 막히는 열대야였다. 궁여지책으로 주재원 몇 가정이 가까운 해변으로 갔다. 폴도 데려갔다. 달밤의 모래사장은 잠을 못 이루고 나온 사람들로 하늘의 별들만큼 빼곡했다. 폴은 한국 애들 틈에 혼자 끼었는데도 스스럼없이 신나게 어울렸다. 돌격대가 되어 일제히 깜깜한 바다를 향해 달려가면, 심술궂은 파도는 모래사장에다 애들을 확 내동댕이치고는, 냅다 도망갔다. 그러면 애들은 재미있다고 까르르 나뒹굴었다가 일어나고는 했다. 달밤에 애들의 파도타기는 보는 것만으로도 색다른 청량제였다.

집으로 와서 보니 애들 머리가 모래찜질을 한 꼴이라, 폴의 머리도 내가 헹궈주게 됐다. 폴의 머리에 손을 댄 순간, 깜짝 놀랐다. 금발에 대한 환상이 여지없이 깨지는 순간이기도 했다. 머리카락이 부스스한 검불 마냥 푸석푸석 맥이 하나도 없었다. 그 아름다운 금발이 빛 좋은 개살구라니. 그때 처음 알았다. 머리카락이란 것이 인종에 따라 색깔만 다른 게 아니라, 질도 촉감도 다르다는 것을. 찰지고 매끄럽고 윤기 있고 톡톡한 우리 애들 머리카락은 생명감이 드는데, 유감스럽지만 폴 머리는 그냥 인형머리카락 일 뿐이었다. 꼭 옥수수수염 같던 그 이질적이던 촉감의 기억은 지금도 생생하다.

하여간 그 후로는 우리 한민족의 흑발은 재인식으로 자부심이 커진 반면, 금발은 재발견으로 동경이 사라진 셈이다. <그래서 요즈음 한국 젊은 애들이 너도나도 머리에 염색을 해서 머리 결이 상한걸 보면 아쉽다. 천연 흑 진주에다 형형색색의 인조조개껍질을 씌운 양 마음에 안 든다.>

하여간 1년 후에, 딸은 희망사항대로 3학년 폴 반으로 월반이 되면서, 폴과 더 어울려 지내게 됐다. 그런데 허물없이 들락거리는 폴에게 꼭 하나 섭섭한 점이 있었다. 한국음식을 권하면 낯을 가리듯 사양을 하는 거였다.

마침 폴이 집에 놀러왔을 때 아버지가 보내신 소포가 왔다. 나와 딸애가 좋아한다고, 배보다 배꼽이 큰 우표 값을 감수하시면서, 그 먼 곳까지 햇 곶감 한 상자를 부치신 거였다. 그 귀한 곶감을 폴한테도 줬더니, 처음 보는 거라 그런지 손에 들고는 난감한 표정이다. 하긴 감조차, 보거나 먹어본 적도 없을 테니 그럴 법도 했다. 얼른 한영사전을 뒤져서, 매우 맛있는 Dried Persimmon 이니 먹어보라고 했다. 그랬는데도 폴이 가고 난 다음에 우연히 쓰레기통을 보다가, 천덕꾸러기가 돼버린 곶감들을 보게 됐다. 가뜩이나 아버지의 깊은 사랑과 그리움에 가슴이 아린 터였다. 눈물 나도록 소중한 곶감이 내팽개쳐졌다는 것이 너무 죄송하고 기막혀서, 살짝 씻어 수정과를 만들었다.

한 번은 정성스레 김밥을 싸주었다. 맵지도 짜지도 않으니 맛있게 잘 먹으려니 하고. 그랬는데 새까만 김이 영 이상하고 찜찜했나보았다. 그 김밥들도 처연하게 쓰레기통이 제집인 줄 아는 신세가 된 걸, 폴이 가고 나서야 알았다.

음식문화와 역사의 차이에서 오는 단절감은 친한 것과는 별개였다. 그 벽이 너무 높아서 극복이 어렵다는 게 안타깝지만, 강요한다고 될 일은 더더욱 아니었다. 그래서 폴에겐 늘 햄버거나 피자, 스파게티나 해주었다. 결국 한 가족처럼 지내면서도 폴에게 한식은 한 번도 못 먹였다. 음식차이로 인한 거리감만은 끝까지 지속될 수밖에 없었다.

눈 깜짝 할 새에 3년이 돼오는 어느 날, 날벼락처럼 지사가 철수하게 됐다. 아니 본사 자체가 공중분해 돼버렸다. 오만한 마음으로 화풀이 삼아 던진 돌이나, 심심하다고 재미 삼아 던진 돌이라 해도, 죄 없는 개구리에겐 핵폭탄이 된다더니, 꼭 그 격이었다. 수주 받은 공사가 10년도 넘게 걸리는 거라 느긋하게 있다가, 갑자기 귀국 짐을 싸자니 황당하고 허무했다. 한국서 구해왔던 교과서로, 방학 때마다 딸애한테 산수와 국어를 공부 시켰었다. 한글을 안 잊어버리게 일기를 쓰게 했었고. 그랬어도 누락된 많은 과목에서 바닥을 헤맬 애를 생각하니, 귀국길이 자꾸 망설여졌다. 그런 차에 뉴욕에서 사는 동생이 무조건 오라고 해, 무작정 기수를 뉴욕 행으로 돌렸다.

PERTH를 떠나던 날 공항에서였다. 생각지도 않았는데 폴의 엄마가 폴과 폴의 동생이 탄 유모차를 끌고 배웅 나왔다. 가족사진이 들어있는 예쁜 액자를 주며 말없이 내 손을 꼭 잡았다. 깊고 그윽한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한 채로. 한없이 가슴이 따뜻하고 여린 여자였다.

뉴욕 땅에 내린 순간부터, 우리는 낯선 우주에 떨어진 미아였다. 안정됐던 주재원 생활에서 하루아침에 밑바닥부터 개척해야 되는 험난한 이민생활로 바뀌었으니까. 나도 처절한 생활전선에 뛰어들었다. 애들은 애들대로, 또다시 확 달라진 상황을 혼란스러워했다. 표시 나게 다른 영어발음, 어려워진 집안사정을 힘들어했다. 학교수업이 끝나 집에 와도, 엄마가 없는 열쇠아동들이고, 방학 때면 4학년짜리 딸애는 동생의 보모노릇까지 해야 했다. 그 무렵 딸아이의 맺힌 말 한마디가, 미국서 산지 18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가슴을 찌른다.

“호주에서 그냥 살지. 왜 미국으로 와서 이렇게 Poor하게 살아야 돼? 호주로 다시 가서 살면 안 돼 응 !” 하고 울면서 항변하던 말이...

그렇게 한 치의 정신적, 물질적 여유 없이 살았어도, 연말이면 폴 네 하고 작은 선물과 편지를 교환하면서, 소중한 인연의 끈을 이어왔다.

4년 전인가?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생활을 하던 딸아이가, 호주가 그립다며 폴 네 집을 방문했다. 폴 부모님이 우리 딸이 돌아 왔다면서, 그렇게 반가워하고 끔찍하게 잘 해주었단다. 우리 가족사진과 내가 선물했던 매듭장식들이 이제껏 걸려있는 것도 보여 주더란다. 우리가 떠날 때 아기였었던 폴 동생이, 어느새 대학생이 돼서 아르바이트도 한단다. 딸은 눈을 똥그랗게 뜨면서 말했다.

“그런데 엄마! 어디서 일하는 줄 알어? 한국 식당이야. 차도 무슨 차냐하면 현대차야!”

한국 차를 샀다는 사실이 반갑고 좋으면서도 신기하고 좀 멋쩍은 표정이다. 저희들은 늘 일제 차를 사자하고, 나는 일장연설 끝에 죽어도 일본차는 안 된다고 해서, 네 번 다 미국 차를 샀으니까. 그런데 폴 동생이 주저 없이 한국 차를 사고 아주 만족해한다는 사실에, 뭔가 느껴지나 보다. 저희들 보다 낫다 싶은 모양이었다.

폴이 얼마 전에 뉴욕을 방문했다. 딸애랑 마중을 나갔는데 나를 보더니 눈이 다 젖으면서 꼭 안는다. 귀엽고 짓궂은 얼굴모양은 개구쟁이 때 그대로지만, 인간미 있어 보이는 청년으로 변모돼 있었다. 어찌나 반듯하고 건실하게 잘 컸던지, 자꾸 어렸을 때의 천진했던 모습이 오버랩 됐다. 아들이 돌아온 것같이 대견스러웠다. 폴 부모가 우리 딸애보고 자기네 딸 하자고 했다는 심정이 헤아려졌다.

식당엘 데려갔더니 대뜸 김치찌개를 주문해서 어안이 벙벙했다. ‘어! 몹시 매울 텐데, 얘가 어떻게 먹으려고 시키지?’ 걱정스레 눈여겨보니까, 찌개를 푹푹 떠서 밥 위에다 놓고 우리처럼 쓱쓱 비벼가며 먹는다. 된장찌개를 덜어주니까 그것도 맛있게 먹는다. 불고기도 상추에 싸더니 쌈장까지 넣어 먹는걸 보고는 할 말을 잃었다. 밑반찬도 골고루 섭렵했다. 과연 이 애가 어렸을 때 한국음식 기피증이 있던 그 애가 맞나? 의문스럽다. 화살같이 흐른 18년 동안, 이렇게 음식까지 완전히 한국통으로 될 줄은 정말 몰랐다. 너무 신통하고 고맙다.

내가 웃으면서, 왜 옛날엔 한국음식이라면 질색하고, 그 맛있는 곶감과 김밥을 쓰레기통에 버렸냐고 했더니, 내가 그랬냐? 면서 믿어지지 않는다는 듯이, 고개를 흔들며 웃는다. 그러면서 지금은 김치를 제일 좋아하고 한국음식은 뭐든지 맛있단다. 어떻게 그리 잘 먹게 변했냐고 물으니까, 동생이 일하는 식당에도 자주 가고 또 동생이 싸오기도 해서 많이 먹는단다. 자기네 가족은 KOREA랑 관계되는 것이면, 우리가 떠올라 무엇이던지 반갑고 관심이 가며 친근감이 든다는 것이었다. 얼마 전에 자기도 현대차를 샀다며 으쓱댄다. 한국제인 핸드폰도 보여 주는데, 꼭 제나라 물건을 자랑하듯 한다. 우리가 한국에 대해 느끼는 자긍심과 애정보다, 더 큰 자부심이 내비치는 폴의 얼굴을 보면서 내심 뜨끔했다.

가게에서 일하다가도, 손님들이 가진 핸드폰을 유심히 보게 된다. 한국제면 더 친절하게 대하게 된다. 또 우리나라 차를 보면 운전자를 호감어린 눈과 미소로 다시 보곤 한다. 고마워서 절이라도 꾸뻑 하고 싶다. 그러면서도 아직껏 일제만 기피했다 뿐이지, 정작 국산차는 산적이 없다. 결국은 내 모국사랑이 딱 고만큼, 거기였다 싶어 자성이 됐다. 나야말로 입으로만 애국하는 위선자 아닌가! 폴이 내차를 보고 이해 못하겠다고 흉이나 안 볼지 뜨끔하다. 부끄럽다. 애들도 폴 때문에 은연중 우리 것에 대한 자부심과 사랑을 느낀 눈치다. 저희들이 가진 카메라 폰을 폴에게 보여주며, “Made in Korea!” 라며 씩 웃는 표정이 그렇다.

폴이 떠나기 전날, 만찬을 준비했다. 메뉴 선정에 꺼릴 게 없다보니 너무 좋다. 폴의 한국 사랑이 기특해서 한 가지라도 더 먹이고 싶었다. 갈비찜에다 돼지갈비도 맵게 고추장양념해서 굽고, 잡채, 전야에 나물들까지, 순 한국식으로만 요리했다. 김밥을 버렸던 애였기에, 혹시 미역국을 안 먹나 했더니, 국물 한 방울도 안 남겼다. 김과 깻잎장아찌도 익숙한 젓가락질로 밥 위에다 놓고 밥을 싸서 먹었다. 한국음식은 먹는 법까지 통달한 박사였던 것이다. 나중에 눌은밥을 끓여주니까, 고개를 끄덕이며 나이스란다. 분명 이민족인 폴이건만 음식교감이 되니까, 비로소 완전 밀착된 느낌이 든다. 꼭 한국 애 같은 생각이 든다.

우리가 PERTH에 살았던 당시엔, 한국 사람이 애들까지 포함해 200명이 채 안됐었다. 대부분이 월남 패망 후에 건너온 기술자들 가족과, 우리를 포함한 열 몇 주재원 가족들이 전부였다. 한국식당은커녕 한국식품점도 없었다. 그런데 강산이 두 번이나 변하는 동안, 이민가족들과 유학생들이 엄청 몰려 들었나보다. 교포사회가 폭이 넓고 다양하게 성장해서 식당도 많은 모양이었다.

인제는 한국음식도 세계적으로 많이 알려졌다. 한국 식당에 가서 외국인들을 보면 알 수 있다. 또 한국의 국력과 경제시장이 커진데다가, 모든 공산품들이 범세계적으로 인정받는 추세로 도약했다는 것도 느껴진다. 어느새 우리나라 제품들이 이렇게 환영받게 됐나 실감이 안 나고, 솔직히 거품이 될까봐 약간은 우려가 되기도 한다. 그래도 어깨가 으쓱거려진다.



폴이 뉴욕에 와서 나와 애들에게 각성제 주사를 따끔하게 놓고 갔다. 나 같은 보통사람이, 현실적으로 진정하게 애국하는 길은, 조그만 물건이라도 국산품을 애용하는 것이란 걸, 새삼 깨우쳐 주고 갔다. 애들도 좀 더 나이를 먹으면, 좀 더 제 뿌리를 의식하게 되면, 사지 말라고 해도 국산 차를 사려고하면 좋겠다. 아니 사게 될 것이다.

폴은 우리가족으로 인해서 코리아가 제 2의 고향이 됐다고 한다. 우리 가족도 역시 호주

가 또 하나의 고향이다. 그리고 I love Paul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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