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영범
·
넷플릭스의 시리즈 <Beef>는 한국계 미국인 대니얼 초(스티븐 연)와 중국계 미국인 에이미 라우 나카이(알리 웡)이 운전을 두고 시비를 벌이다가 걷잡을 수 없는 사태로 증폭되는 코미디 드라마다. 10부작인데, 회당 40분 안쪽이니까 길어야 400분. 여기서 'beef'는 소고기가 아니라 감정의 앙금, 누군가한테 시비를 걸고 싶은 마음이 있는 걸 뜻하는 말이다. After all these years, he still got some beef with me. 하는 식으로.
.
미국은 드라마를 제작하는 방식이 한국과 좀 다르다. 한국은 작가와 연출자가 각각 한 명씩(드물게는 두 명) 있고, 이들이 시리즈 전체를 책임진다. 미국의 경우에는 'showrunner'라고 부르는 일종의 master mind가 있다. (이 작품의 경우에는 한국계 미국인인 이성진이 그 사람이다.) 'Series creator'라고도 불리우는 이 사람이 드라마의 컨셉과 스토리라인, 이야기의 tone & manner를 결정하고, 그걸 가지고 여러 명의 작가들과 연출자들이 작업한다. 이 드라마 역시 연출도 몇 명이 나눠서 하고(1,4,5회는 히카리, 2,3,6~9는 잭 쉬라이어, 마지막회는 이성진), 쓰는 것도 여러 명이(1,9,10은 이성진, 2는 앨리스 주, 3은 캐리 켐퍼.. 하는 식으로 모두 아홉명) 했다. 각각의 작가는 보조작가들과 함께 일했을테니까, 실제로 극작에 참여한 인원은 꽤 됐을 거다.
.
Executive producer는 우리 말로는 '총제작'으로 옮기는 것 같은데, 이 역할의 내용은 매우 다양하다. 원래의 역할 그대로 시나리오 개발 단계에서 상영까지의 전과정을 컨트롤하는 경우가 있는가하면, 돈을 끌어오는 역할만 하는 경우도 있고, 유형무형으로 기여한 바가 크다고 평가해서 이름을 넣어주는 경우도 있다. 이 시리즈의 경우에는 이성진을 비롯해 두 주연배우, 가장 많이 연출한 감독이 리스트에 포함되어 있는데, 실제로 살림을 꾸리는 일을 한 건 긴 리스트의 맨 마지막에 이름을 올린 Ravi Nandan과 Alli Reich 두 사람일 가능성이 크다.
.
작가와 연출자가 바뀌다보니까 이야기가 흘러가는 과정에서 조금씩 톤의 변화가 생긴다. 무게중심도 조금씩 이동하고. 그래서 시리즈의 경우에는 앞부분에서 자리를 잡아주는 게 굉장히 중요하다. 대개 시리즈 크리에이터가 첫 에피소드를 쓰는 것도 그래서다.
.
<Beef>의 경우는 첫회를 보고나서는 대니얼의 이야기일 거라고 생각했으나 회를 거듭하면서 점점 에이미 쪽으로 기울어갔는데, 여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수 있겠지만, 역시 가장 중요한 건 각 인물이 맺고 있는 관계의 복잡성과 거기에서 만들어지는 문제들의 진실성일 것이다. 대니얼과 관계를 맺고 있는 대상은 동생, 사촌, 부모, 교회, 에이미 등이 있는데, 이 중에 동생과 사촌, 교회는 대니엘이 하는 일과 연동되어 있고 서로 잘 스며들어 있어서 각각 따로 시간을 들여서 전개시킬 필요가 적다. 반면에 남편, 딸, 시모, 사업, 폴, 부모, 대니얼과 관계를 맺고 있는 에이미의 경우는 각각의 관계들이 다른 관계에 대해 긴장관계를 가지고 있어서(이를테면 남편과의 관계와 사업과의 관계는 갈등관계이고, 시모와의 관계는 우리가 겪는 것과 내용은 좀 다르지만 역시나 매우 복잡하다) 따로따로 공을 들이지 않으면 균형이 어긋날 수밖에 없다. 그러니 당연히 시간을 각각 더 투여해야 하고, 그 결과 이야기의 균형추가 에이미 쪽으로 기울어지게 된다.
.
사실 이야기의 승부는 여기에서 대충 갈린다. 에이미의 이야기가 지나치게 진지해진다고 해서 충분히 진행시켜야 할 이야기를 잘라내거나, 대니얼과 형제들의 이야기가 재미있다고 해서 그걸 필요 이상으로 키우거나 하면 결국 이야기의 구조가 허물어진다. 반면에, 각각의 관계에 필요한 만큼 충분히 시간을 줘도 이야기가 흔들릴 수 있다. 결정적으로, 이야기가 산으로 가면서 '재미'라는 게 사라지기도 하고. 시작할 땐 산보 같았는데 가다보니 등산이 되면, 등산이 나빠서가 아니라 그냥 난감한 거 아닌가. 그래서, 결국 문제는 균형이다. 처음에 아무리 풍부한 이야깃거리를 가지고 시작했다고 생각하더라도, 중반으로 넘어가면 그야말로 'thin red line' 위를 걷는 게 드라마라는 장르(크고작은 스크린을 위한 대본, 희곡, 소설--극적 구성을 가진 것들을 모두 포함하는 말이다)의 숙명이다. 모든 관계가 균형을 이뤄야 하기 때문이다. 물론 균형을 잃어도 흥행을 얻을 수는 있다. 마음껏 울리거나 마음껏 웃기거나 마음껏 때려부수거나 하는 게 그런 것 아닌가. 이걸 다 뒤섞기도 하고. 하지만 어떤 이야기를 통해서 과거와 현재, 여기와 저기, 이 사람과 저 사람, 개인과 집단 사이의 균형, 연결을 찾으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면 반대편에 도달할 때까지 이 외줄 위를 걸어야 한다. 별 도리 없다.
21 comments
Like
Comment
Comments
Most relevant
No comments:
Post a Com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