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A 폭동은 미국 한인 사회를 각성시켰다
기자명 손인서
입력 2022.0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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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주년, 그때 그곳의 이야기가 지금 여기 우리에게 전해 주는 것
LA 폭동의 ‘불편한 진실’, 피해자이자 가해자였던 재미 한인
지금으로부터 30년 전인 1992년 4월 29일, 미국 로스앤젤레스의 사우스 센트럴 지역은 말 그대로 지옥으로 변했다. 흑인과 라틴계 주민 수천 명이 몰려나와 마구잡이로 방화와 약탈을 저질렀고, 지역의 건물들은 순식간에 불길에 휩싸였다. 사태는 무려 6일 동안 지속되었다. 무려 60여 명이 죽었고 2000여 명이 다쳤다. 이곳은 한인 이민자들의 미국 최대 경제 중심지였던 코리아타운이 자리 잡고 있었다. 폭동으로 코리아타운은 일주일도 채 되지 않아 대부분 잿더미가 되었다. 한인 경제는 산산조각이 나고 회복할 수 없는 경제적 피해를 입었다. 폭동의 최대 피해자는 한인들이었다. 하지만 LA 폭동은 단순히 한인 이민자들에게 물질적 피해를 안겨 준 것만은 아니었다. 폭동은 한인들에게 자신은 미국에서 보호받지 못할 유색 인종임을 뼈저리게 깨닫게 해 준 결정적 사건이었다.
1992년 4월 29일, 미국 로스앤젤레스의 사우스 센트럴 지역에서 일어난 폭동은 6일 동안 계속됐다. (사진 출처 = commons.wikimedia.org)
우리는 흔히 LA 폭동을 흑인들이 백인 사회에 품었던 분노가 한인들에게 잘못 투영되어 벌어졌던 사건쯤으로 기억한다. 흑인의 폭력적이고 비문명적인 행태에 분노하고 타국에서 열심히 일하는 한인들을 옹호해 왔다. 물론 폭동의 직접적인 도화선이 되었던 것은 1991년 과속으로 운전하던 흑인 로드니 킹을 백인 LA 경찰 4명이 검거하여 무차별적으로 폭행한 사건에서 비롯되었다. 이 사건으로 기소된 경찰들이 법정에서 무죄 선고를 받은 바로 그날 폭동이 시작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잘 모르는 사실은, 로드니 킹의 폭행이 있었던 같은 해 LA 빈민가에서 상점을 운영하던 두순자 씨가 15살 흑인 소녀 나타샤 할린스를 절도범으로 오인해 총으로 사살한 사건이 있었다. 그는 재판에서 집행유예 판결을 받았다. 이 사건은 흑인 사회에서 한인에 대한 반감을 불러일으켰고, 폭동의 주요한 배경이 되었다. 재미 한인 작가 캐시 박 홍이 말했듯, 한인은 ‘인종 차별의 피해자이면서 동시에 가해자’였던 것이었다.
흑인과 아시아인을 분열시킨 ‘모범 소수자’ 신화
그러나 LA 폭동의 원인은 그렇게 간단치가 않다. 그 이면에는 한인과 흑인의 갈등을 조장해 온 미국 사회의 뿌리 깊은 인종주의가 있다. 1960년대 흑인 민권운동이 불타오르면서 백인 주류 사회는 아시아계 미국인을 이용해 흑인들의 권리 주장을 잠재우고 백인 우월주의 사회를 합리화하려고 했다. 1960년대 중반부터 주류 미디어는 아시아계 미국인의 성공을 대서특필하면서, 이들의 성공 원인을 노력과 근면을 숭상하는 아시아 문화에서 찾았다. 그 주장의 이면은 흑인들의 빈곤과 어려움을 백인들의 차별이 아니라, 다분히 그들 자신의 미개하고 열등한 문화 탓으로 돌리려는 의도가 숨어 있었다. 이 아시아계 ‘모범 소수자’(model minority)의 신화는 단지 흑인들의 민권운동을 비난하는 것을 넘어 흑인과 아시아계 미국인 사이의 갈등을 키워 가는 역할을 했다.
모범 소수자라는 신화와는 다르게 실제로 한인 이민자들의 삶은 나아지지 않았다. 한인을 비롯한 아시아계 미국인에 대한 사회적 차별은 개선되지 않았던 것이다. 한인 이민자들은 여타 이민자들에 비해 높은 비율로 세탁업이나 식품점 등 자영업에 종사한 이유도 유색 인종 이민자에 대한 차별 때문이었다. 이들은 스스로 코리아타운을 형성해서 그들만의 경제권을 만들거나, 백인 상업 지역을 피해 흑인이나 라틴계 주민의 거주 지역에 상점을 열어 생계를 이어 나갔다. 하지만 주민들은 한인의 진출을 자신들에 대한 또 다른 차별로 받아들였다. 한인 자영업자와 흑인과의 갈등은 이미 1970년대부터 서서히 싹을 키워 가고 있었다.
(이미지 출처 = Pixabay)
뿌리 깊은 흑인에 대한 인종 차별과 백인의 한흑 갈등 조장을 넘어,
재미 한인은 이제 차별을 넘어선 연대의 가치를 깨달았다
LA 폭동에서 보여진 흑인들의 극단적인 분노와 폭력성은 역사적으로 흑인을 향한 미국 주류 사회의 끔찍하고 폭력적인 차별에 기인한다. 흑인들의 비즈니스과 상업은 역사적으로 백인에 의해 철저하게 파괴되었다. 가장 극적인 예는 털사 학살이었다. 20세기 초 오클라호마주의 털사는 '검은 월스트리트'라 불릴 정도로 흑인들의 상업이 발달했던 지역이었다. 그러나 1921년 백인들은 이 지역을 초토화해 버리고 인종 학살을 자행했다. 흑인 수백 명이 학살당한 것으로 전해질 뿐 제대로 된 수사와 보상은 전혀 없었다. 이런 방식으로 흑인들은 미국 사회에서 경제권을 박탈당했다. 자신의 거주 지역에서 상업을 키워갈 수도 없었던 것이다. 게다가 흑인들은 백인들과 거주지도 분리된 채 사회, 경제, 문화적으로 낙후된 지역에서 살아오면서 빈곤의 늪에 빠져들었다. 이런 역사적 배경에서 한인 이민자들의 진출은 흑인들에게 백인에 이은 또 다른 인종의 경제 침탈로 비추어졌다. LA 폭동은 이렇듯 인종주의의 역사 속에서 터진 사건이었다.
미국 정부의 LA 폭동에 대한 대처는 철저하게 인종차별적이었다. 폭동 기간 내내 경찰은 수수방관하는 태도로 일관했다. 증언에 따르면, 부유한 백인 거주 지역으로 향하는 길목만을 막고 있었다고 전해진다. 코리아타운의 피해가 그렇게 컸던 이유도, 그리고 한인들이 상가 옥상에 올라가 스스로 무장하고 방어했던 이유도 공권력이 전혀 개입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폭동이 끝난 후에 한인들은 거리로 몰려나가 정부의 피해보상 대책을 요구했다. 그러나 아무것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수십 년간 타국에서 쌓아 온 이민자의 노력은 모두 무너졌다.
LA 폭동은 아메리칸 드림의 민낯을 그대로 드러내 주었다. 미국 사회에서 한인은 결코 백인이 될 수 없다는 현실을 가장 적나라하게 보여 준 사건이었다. 하지만 보다 뼈아픈 깨달음은 한인 역시 인종 차별에 동참해 왔다는 사실이다. 폭동의 이면에는 부득이할지라도 흑인과 라틴계 미국인과 거리를 두면서 소수 인종임을 애써 부인했던 한인 이민자들의 외면이 자리 잡고 있다. 폭동 이후 한인 사회는 비로소 흑인을 비롯한 여타 소수 인종과의 공존과 연대를 모색하고, 소수 인종으로서 정치적, 사회적 정체성을 인정받기 위해 노력하기 시작했다.
30년이 흐른 지금 한인 사회는 백인 주류 사회로의 맹목적인 편입을 좇기보다는 인종 간 평등과 공존의 가치를 추구하고 있다. 하지만, 지금 여기 한국은 역으로 이주민과 타 인종을 향한 혐오를 키워가고 있다. LA 폭동은 우리 자신도 타국에서는 한 명의 소수 인종에 불과하며 인종 차별은 타인뿐 아니라 우리 자신의 문제임을 일깨워 준다. 폭동은 30년 전의 일이 아니라 바로 지금 한국의 이야기가 될 수도 있다.
손인서
비정규직 박사 노동자로 고려대 아세아문제연구원 소속.
미국 듀크대학교에서 사회학 박사학위를 받았고 이주민과 성소수자 등 사회적 소수자의 불평등과 차별에 대해 연구하고 있다.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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